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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돈이 아닌 선물로 결속하는 인간 공동체

등록 2018-08-02 19:35수정 2018-08-02 19:47

인류학자·철학자 마르셀 에나프
왜 어떤 것에는 가격을 매길 수 없나
‘인정’ 열쇳말로 증여의 계보학 추적
진리의 가격-증여와 계약의 계보학, 진리와 돈의 인류학
마르셀 에나프 지음, 김혁 옮김/눌민·3만8000원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부패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은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주는 가장 명백한 근거로 자신의 행동이 돈과 무관하다는 점을 들었다. 애초 철학을 어떤 ‘기술’로 만들고, 돈을 받고 가짜 진리를 파는 소피스트들을 비판해왔던 그다. 서구 정신사의 출발점에 선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드러낸 거대한 문제가 바로 철학과 돈 사이의 양립불가능한 관계였던 셈이다. 과연 우리는 어떤 것에 가격을 매기고 어떤 것에는 가격을 매길 수 없는가?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프랑스 출신 인류학자이자 철학자 마르셀 에나프(1942~2018)의 주저 <진리의 가격>은 인류학과 철학을 넘나들며 이 문제에 대한 논의들을 종합해낸, 현대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이다. 2002년 프랑스에서 첫 출간되어 전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독일 출신 사회학자 악셀 호네트는 2010년 에나프의 이론을 중심 주제로 삼아 학술행사를 열었는데, 이 내용은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발행하는 잡지 <베스텐트>의 한국어판(201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가 던진 화두로부터 출발해 철학과 인류학, 사회학 등 서구 지성사를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증여의 계보학’을 써내려간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해진 ‘거래’ 행위에 바탕을 둔 ‘계약 관계’와는 다른, 전통 사회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증여’ 행위에 바탕을 둔 ‘선물 관계’는 수많은 철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등을 매혹했던 연구 주제였다. 특히 마르셀 모스는 ‘의례적’ 성격의 선물 교환이 전통 사회에 보편적인 것이며, 증여는 필연적으로 답례, 곧 ‘대갚음’(reciprocity)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지적해 증여 연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바 있다.

프랑스 출신 인류학자이자 철학자 마르셀 에나프의 모습. 출처 societasethica.info
프랑스 출신 인류학자이자 철학자 마르셀 에나프의 모습. 출처 societasethica.info

모스와 레비스트로스 연구의 권위자로 평가받는 지은이는, ‘인정’이라는 열쇳말을 가지고 증여에 대한 모스의 이론을 보완하는 한편 자신만의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증여의 본질을 두고 많은 학자들은, 이타성에 뿌리를 둔 도덕적 몸짓으로, 베푼 것을 언젠가 되돌려받는 시스템으로, 오늘날 교역관계의 먼 조상으로, 제각각 바라본 바 있다. 그러나 지은이는 “‘선물’의 목적은 경제학자를 사로잡는 증여물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모럴리스트를 매혹하는 증여의 몸짓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의 목적은 연대의 창조와 재생에 있다”고 주장한다. 의례적 선물교환은 “상호 인정을 위한 조건”으로서, 친밀한 유대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관계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증여자는 자신의 일부를 선물로 주는 행위를 통해 서로를 동료, 동맹으로 인정하는 절차를 시작한다. 받은 이는 상호 대갚음을 통해 이를 이어가는데, 이는 ‘빚진 것을 상환한다’는 개념과는 그 맥락이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도 지은이는 이 같은 의례적 선물 교환이 경제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유용하지도, 자비롭지도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공동체를 세운다는 것은 코뮤니아(com-munia)의 사회가 된다는 것, 곧 공유된 선물(muni)이 있는 사회가 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말해, 선물 교환은 공동체가 결속하고 유대하는 원리로서 애초 돈을 매개로 하는 ‘상업 교환’(계약 관계)과는 전혀 다른 질서로 움직인다. 일부 학자들은 ‘과거 선물 교환이 상업 교환으로 대체됐다’는 식으로 풀이하는데, 지은이가 보기에 이 둘은 “형식적인 경합을 하지 않으므로 비교조차 불가능하며” 서로 다른 원리에 기대어 공존해왔을 뿐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지은이가 ‘계보학적’ 탐구를 펼치는 주된 이유다.

<증여론>을 쓴 프랑스 출신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증여론>을 쓴 프랑스 출신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에겐 상업 교환이 지배적인 삶의 양식인 것이 사실이다. 서로가 진화, 대체, 경쟁의 관계가 아니라면, 상업 교환이 이처럼 지배적인 삶의 양식처럼 자리잡은 이유는 과연 뭔가? 지은이는 이를 설명해주는 핵심 연결고리로 ‘화폐’를 지목한다. 게오르크 지멜은 화폐와 시장이 현대 사회에서 상호 교류와 행동의 근본 조건이 되었다고 지적하며, 이를 모더니티의 핵심으로 탐구한 바 있다. 지은이는 생산과 필요의 다양성이 폭발하는 도시 속에서 개개인이 정치체제가 만든 법에 의해 공적 인정을 받고, 경제질서로 보장된 공정한 가치평가의 도구, 곧 화폐에 기대어 자신의 자율성을 확보하게 된 상황을 지적한다. “근대 사회에서는 모든 종류의 재화에 대해 상업적 등가성을 추구하려는 잠재적 경향이 존재한다. 시장이 사회 전체와 동일하도록 범주가 확장되어, 활동, 지위, 프로젝트를 모두 포괄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처럼 “법으로 보장하는 시민권도, 경제적인 상호 의존성도, 타인을 한 사람으로 ‘인정’하도록 이끌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모든 것에 가격을 매기는 ‘상업 교환’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엄을 요구하고 인정받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 묻는다. ‘선물 교환’ 없이 ‘상업 교환’에 기댄 앙상한 거래만으로는 인간 공동체가 당연히 갖춰야 할 사회적 유대를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이다. 애초 소크라테스가 제기했던 돈과 철학 사이의 갈등은,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모더니티의 총체적 모습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특히 마지막 장에서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의 논의를 끌어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지은이는 선물 교환은 한 공동체 테두리 내에서 이뤄지는 것이라는 한계를 지적하며, ‘공동체 바깥에 있는 타자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묻는다. 이 질문의 중심에도 역시 인정의 문제가 놓여 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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