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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죽거나 죽이거나…40만년간 쌓여온 전사의 주검들

등록 2018-08-02 19:33수정 2018-08-02 19:41

영국 군사저술가 “전쟁은 전쟁일 뿐”
피 쏟으며 죽어간 병사들 눈으로
인류 전쟁사의 참혹한 민낯 증언
무기 발달로 죄책감 줄고 광기마저
전쟁의 재발견-밑에서 본 전쟁의 역사
마이클 스티븐슨 지음, 조행복 옮김/교양인·2만8000원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 불구경 싸움구경”이란 속설이 있다. 세상에! 이 말은 인간이 남의 갈등과 파멸에 은밀한 흥분과 쾌감을 느끼는 가학 심리를 잘 보여준다. 단, ‘내 일 아닌 남 일’일 때 그렇다. 불과 싸움이 난무하는 전쟁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꼭 3년 전인 2014년 여름 저녁, 이스라엘 시민들이 언덕 위에 모여 앉아 자국 군대의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공습을 구경하며 화염과 폭발음이 터질 때마다 박수 치고 환호했다. 이런 희비극을 트위터로 세계에 알린 덴마크 언론인은 이 현장을 언덕의 이름을 따 ‘스데롯 극장’이라고 표현했다. 이른바 ‘전쟁 포르노’의 실시간 상영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은 인간 존엄성을 말살하는 극단적 폭력이다. 그럼에도 시간과 거리가 멀어질수록 그 참혹함과 교훈은 흐려지고, 숱한 목숨과 맞바꾼 승리 서사와 영웅 신화가 도드라진다. 소설·영화는 물론, 공식 기록도 그러기 십상이다. 영국의 전쟁사 저술가 마이클 스티븐슨의 <전쟁의 재발견>은 “심히 부담스러운, 그러나 최선을 다해 (…) 위험한 외줄타기”를 감수하며 전쟁의 맨얼굴을 폭로하고 인간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에 그려진 트로이 전쟁의 한 장면. 신들과 인간들이 뒤엉켜 비극적인 전쟁을 만들어냈던 트로이 이야기는 그리스인들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며 수많은 문학과 미술 작품의 단골 소재가 됐다. 한겨레 자료 사진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에 그려진 트로이 전쟁의 한 장면. 신들과 인간들이 뒤엉켜 비극적인 전쟁을 만들어냈던 트로이 이야기는 그리스인들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며 수많은 문학과 미술 작품의 단골 소재가 됐다. 한겨레 자료 사진

지은이는 전쟁을 결정하고 지휘한 권력층이 아니라 처절한 전쟁터에서 적군과 마주치고 피를 쏟으며 죽어간 병사들의 눈높이에서 인류의 전쟁 역사를 펼쳐 보인다. 전쟁 발발의 역사적·지정학적 배경, 전략·전술의 평가, 전쟁의 승패와 영향, 온갖 살상무기 등에 방점이 찍힌 대개의 전쟁사 문헌이나 논픽션과 구별되는 대목이다. “끔찍한 장면들을 묘사하지 않고 폭력에 의한 죽음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 그러나 “람보 스타일의 포르노 같은 폭력에 영합하지 않고 어떻게 이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까” 고민한 흔적이 묻어난다.

지은이의 눈길은 까마득한 선사시대의 전투에서부터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이 명멸한 전쟁, 중세 유럽의 왕위 계승 전쟁과 십자군 전쟁, 화약이 발명된 이후 총포 전쟁의 양상, 서구의 식민지 정복 전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현대의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전쟁사 전체를 아우른다. 참고문헌 목록에 밝힌 단행본과 문헌 자료만 230여종에 이를 만큼 탄탄한 사료 조사와 고증이 뒷받침됐다.

중세 유럽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 1840년, 들라크루아. 루브르 박물관 소장. 한겨레 자료사진
중세 유럽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약탈. 1840년, 들라크루아. 루브르 박물관 소장. 한겨레 자료사진

인간은 언제부터 전투에서 서로를 죽였을까? “영토를 차지하려는 본능이 죽음을 불러오는 행위로 바뀐 때는 약 40만년 전”으로 추정된다. 네안데르탈인이 경쟁자였던 호모 사피엔스(현생 인류)에 진화사의 다음 자리를 내어주고 멸종하기 직전 단계다. 호모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보다 신체적으로 열등했지만 우수한 지적 능력으로 투석기 원리를 이용한 최초의 발사 무기를 만들었다. 곤봉과 창으로만 싸우던 네안데르탈인은 적수가 되지 못했고, 약 2만년 전 활과 화살의 출현과 함께 끝내 멸종했다.

사람의 손을 떠나는 무기에서 인격은 거세됐고, 냉혹한 살상 능력이 그 빈자리를 채워 나갔다. 그래도 11세기 초 화약과 총포류의 발명이 전쟁의 풍경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기 전까지는 육박전이 전투의 기본이었다. 창검을 쓰는 병사는 상대의 눈에 가득찬 두려움을 보고,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피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증오에 차거나 겁을 내거나 후회로 가득하거나 광적인 환희에 빠질 수는 있지만, 결코 감정에 동요되지 않거나 인간답지 않은 냉정함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고대 전쟁이 ‘인간적’이었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식민지 시대 이전까지 세계의 상당 지역에선 포로가 된 전사들을 고문하고 공개 살해하고 신체 일부를 먹어치운 사례가 많았다. 시신 훼손은 승리의 기념이거나 희생 제의에 바쳐진 일종의 의식이었다. 지은이는 고대 그리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장엄한 묘사를 “전투의 살인을 빛나게 채색하여 영웅적 형태로 제시하려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말한다. “전쟁을 있는 그대로 보면 너무 비열해서 견디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양날검과 팔랑크스(방패진)로 무장한 로마 군단이나 잔혹성에선 우열이 없었다.

그리스 도시국가 스파르타의 용사 300명이 페르시아 대군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전멸한 테르모필레 전투(기원전 480년)를 그린 미국 영화 <300>(2007년)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그리스 도시국가 스파르타의 용사 300명이 페르시아 대군의 침공에 맞서 싸우다 전멸한 테르모필레 전투(기원전 480년)를 그린 미국 영화 <300>(2007년)의 한 장면.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

중세의 전투도 말 탄 귀족 기사들에 매혹돼 상당부분 왜곡됐는데, 진짜 전투는 보병들의 피칠갑이었다. “중세에서 가장 잔혹한 전투로 꼽히는 1315년 모르가르텐전투에서 스위스 보병은 ‘그 가공할 위력을 지닌 도끼창으로 베고 타격하여 투구를 쪼개면서’ 오스트리아 공국 기사들을 절반 가까이 죽였다.”

투척·발사 무기의 발달은 전쟁의 비인격성을 가속화했다. 15세기 들어 원가가 저렴해진 화약이 화기 제작술과 결합하면서 전장의 치사율이 치솟았다. “총탄이나 열추적폭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냉정하게 표적의 중심으로 날아간다. (…) 화살은 판단력이 없으며 무인조종 드론이나 컴퓨터 자판에 손가락을 얹고 있는 사람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다.” 이제 병사들은 자기가 누구를 죽이고 누구의 손에 죽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현대 전투의 전장은 ‘텅 빈’ 곳이 됐다.”

1941년 태평양전쟁의 원인이 된 일본군의 미국 진주만 기습을 그린 미국 영화 <진주만>(2001년)의 한 장면. 브에나비스타코리아 제공
1941년 태평양전쟁의 원인이 된 일본군의 미국 진주만 기습을 그린 미국 영화 <진주만>(2001년)의 한 장면. 브에나비스타코리아 제공

기관총과 탱크, 독가스가 등장한 제1차 세계대전에선 ‘영웅적 전투’가 몰락하고 산 자와 죽은 자가 참호에서 함께 뒹굴었다. 고성능 폭탄과 집중포격은 “게걸스럽고 탐욕스러운 식욕으로 병사들의 육신과 영혼을 마구 먹어치웠다.” 제2차 세계대전에선 탄도 미사일과 원자폭탄까지 사용되면서 군인만 최소 16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수 급증에는 노골적인 인종주의 탓도 있었다.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미군 병사의 43%가 일본군에 대한 강한 살의를 표명한 반면, 유럽 전선에서 “정말로 독일군을 죽이고 싶었”던 미군 병사는 전체의 10%뿐이었다. 일본군도 ‘야만적인 미국인’. ‘미개한 중국인’ 이미지를 만들어 병사들의 살상 욕구를 북돋았다.

전쟁의 역사는 병사들의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 엷어지고 악마적 속성이 부풀려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베트남에서 싸웠던 미군의 한 헬리콥터 기관총 사수가 기억하는 한 장면. “칠면조 사냥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무방비 상태에 (…) 나는 제기랄, 보트에서, 논에서, 나무에서 사람들을 날려버렸다. 피에 굶주렸다. (…) 나는 신이며, 내 기관총과 미니건으로, 우리가 쏘는 로켓포로 징벌을 내리고 있다….” 이런 참상은 세월이 흐르면서 승자(가해자)에게도 깊은 트라우마를 남기게 마련이다. 지은이는 “전쟁 안에는 많은 것이 있지만 그 핵심은 남을 죽이거나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것 (…) 전쟁은 전쟁일 뿐”이라고 말한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1년 2월, 한 전투 현장에서 머리와 무릎을 다쳐 위생병의 도움으로 응급구호소에 온 부상병이 진흙구덩이에 넘어진 또다른 부상병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코리아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71년 2월, 한 전투 현장에서 머리와 무릎을 다쳐 위생병의 도움으로 응급구호소에 온 부상병이 진흙구덩이에 넘어진 또다른 부상병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출처 게티이미지코리아

책의 원제 (최후의 헌신: 군인들은 전투에서 어떻게 죽어가는가)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링컨 대통령이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한 게티스버그 연설(1863년 11월)의 한 대목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링컨은 “여기 있는 우리가 그들이 목숨까지 바쳐 가며 이루고자 했던 그 대의에 더욱 헌신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의 수호를 역설했던 바로 그 연설이다.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엄격한 조건들, 즉 무엇이 ‘정의로운 전쟁’인가를 놓고는 다양한 논리들이 나온다. 한가지 분명한 건 ‘정의로운 전쟁’이란 표현 자체가 형용모순이라는 사실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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