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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공감·내러티브…인간 뇌가 AI보다 뛰어난 이유

등록 2018-07-20 19:44수정 2018-07-20 19:48

영문학자 권택영 ‘하이브리드 인문학’
라캉 정신분석서 인문-과학 통섭으로
뇌과학·문학·영화 등 지적유산 동원해
인공지능 시대 인간다움의 근원 성찰

생각의 속임수-인공지능이 따라하지 못할 인문학적 뇌
권택영 지음/글항아리·1만8000원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과거를 회상하는 능력에 있다. 회상은 의식의 진화에 의해 나타나는데, 이 자의식은 경험을 무한히 수용하기 위해 저장을 뇌의 다른 부분, 즉 ‘기억의 흔적’에 남긴다. ‘의식’은 시간을 따르지만 ‘흔적’은 그렇지 않다. 생각의 속임수는 뇌의 이와 같은 ‘일원적 이중 장치’에 의해 나타난다. 이 책은 이런 이중장치가 고독, 착각, 후회, 집착, 공감, 그리고 알면서 하지 않거나 모르면서 하는 뇌의 특성(각각 책의 1~6장을 구성한다)으로 나타나는 것을 일관성 있게 밝힌다. 이것이 상상력이고 문화와 예술을 창조한 동력이었다. 그리고 이 허구성은 효율성을 중시하는 인공지능이 결코 흉내내지 못하는 뇌의 고유한 인문학적 기능이다.”

다소 길게 인용한 위 구절은 권택영 경희대 명예교수가 쓴 의 고갱이라 할 만하다. 영문학자인 지은이는 인간의 감정과 의식을 인문학이란 열쇠말로 통찰하고 ‘인공지능이 따라하지 못할 인문학적 뇌’(부제)의 존재와 가치를 논증해 나간다. 정신분석과 심리학, 뇌과학, 진화생물학 등 정교한 과학이론들뿐 아니라 시·소설·희곡 같은 동서양의 고전문학, 영화, 그리스 신화와 불교 철학 등 인류의 지적 유산이 총동원되는, 흥미롭지만 녹록지 않은 여정이다. 유연하고 낭만적인 상상력과 문학적 수사가 넘치면서도, 탄탄한 배경지식과 논리가 뒷받침돼 쉽게 읽히지만은 않는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교양 과학서와 인문학 에세이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하는데, 양쪽을 자유분방하게 넘나들며 지적 호기심과 긴장감을 자극한다. “심리학자인 나의 두뇌가 저자의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혜안으로 발화되는 것 같았다 (…) 절정의 셰프가 요리한 진정한 융합의 결실”(최기홍 고려대 교수)이라거나 “다양한 아우름, 저자가 일궈온 비평적 영토의 풍경 (…) 이 책의 시효가 매우 길 것이며 새로운 통찰의 출발이 될 것”(표정훈 출판평론가)이란 평가가 나온 것도 그래서일 테다.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구조주의 언어학으로 분석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1901~1981). <한겨레> 자료사진.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구조주의 언어학으로 분석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1901~1981). <한겨레> 자료사진.

영문학자가 웬 뇌과학? 지은이의 이력을 보면 이해가 된다. 권택영은 “무의식이 언어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 자크 라캉을 비롯해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등 20세기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을 1990년대부터 주목하고 국내에 활발히 소개했다. 라캉은 인간의 욕망 또는 무의식이 언어로 표출된다고 보고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을 접목했다. 라캉 정신분석에 대한 지은이의 관심은 이내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융합으로 확장됐다. <자크 라캉의 자연과 인간>(2000), <바이오 휴머니티: 인간과 환경의 경계를 넘어서>(2015) 같은 책이 그 결과물이다.

‘생각의 속임수’는 이번 책에 담은 사유를 함축한 표현이다. 지은이는 먼저 “나는 이성적이기 전에 동물로서, 그리고 ‘감각’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동물적 감각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의 영역이기에, 언어로 표현되는 순수개념보다 더 정확하다”는 논리다. 라캉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뒤집어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고 선언한 게 바로 그런 뜻이다. 지은이에게 “생각하는 것은 추억을 더듬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내 생각이 객관적 ‘판단’이 아니라 내 경험들의 집합소에서 나온 ‘느낌’이라면 (그것에) 집착할수록 나는 더 크게 속는 것”이다. 도발적인가? 과학적 설명이 더 쉬울지도 모르겠다. “나의 뇌는 자연과학의 대상이지만 인문학적으로 구조돼 있으며, 뇌과학이 밝히는 기억의 구조는 그 자체가 이야기이자 허구를 포함한 문학”이다. 뇌의 본질적 기능은 ‘경험의 저축(기억)’이며, 의식은 기억의 저축통장에서 지난 경험을 상황에 따라 인출한다는 것.

셰익스피어 비극 <햄릿>의 주인공인 햄릿 왕자가 살해된 부왕의 어릿광대이자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주었던 요릭의 해골을 바라보는 모습을 묘사한 동상. 아버지의 유령에 이끌려 현실을 풀어가는 햄릿을 비롯해,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성보다는 감각의 힘에 압도된다. 픽사베이
셰익스피어 비극 <햄릿>의 주인공인 햄릿 왕자가 살해된 부왕의 어릿광대이자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주었던 요릭의 해골을 바라보는 모습을 묘사한 동상. 아버지의 유령에 이끌려 현실을 풀어가는 햄릿을 비롯해,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성보다는 감각의 힘에 압도된다. 픽사베이

권택영은 ‘인간이 고독한 이유’를 진화 과정에서 발생한 ‘자의식’에서 찾는다. “자의식은 나를 타인과 구별하는 ‘개체화’라는 진화의 선물임과 동시에 고독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 하등동물일수록 자의식(개체의식)이 없어 본능을 넘어선 욕망도 없으며 같은 무리로만 존재한다. 자의식이 싹트기 전 단계의 무의식 세계에선 자신과 대상을 구별하지 못한다. 거울 앞의 동물을 보라. 어린 아이가 아픈 시늉을 하는 식구를 보며 자신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다른 아이가 울면 자기도 덩달아 우는 절대 공감도 마찬가지다. 이같은 ‘거울 뉴런’은 동물의 생존에서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다. 인간의 언어와 사회적 소통도 상대의 마음을 읽는 거울 신경 덕분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마음을 예술과 철학이라는 인문학의 영역에서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낸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마음을 예술과 철학이라는 인문학의 영역에서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낸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공감은 오늘날 심리학과 뇌과학에서도 화두다. 고대 로마의 헤로도투스가 쓴 <역사>에는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가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포로로 잡은 이집트 왕 사메니투스의 눈 앞에서 그의 가족과 하인들을 처형하거나 모욕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메니투스는 딸이 하녀가 되고 아들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도 눈 하나 꿈쩍 않고 위엄을 지키다가 포로로 끌려가는 늙은 하인의 모습엔 울음을 터뜨린다. 권택영은 이 상황을 “왕이 늙고 초라한 하인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봤던 것”으로 해석한다. 공감 능력이야말로 자의식을 가진 인간만의 특성이며, 인간이 인공지능과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경계라는 이야기다.

미국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2015)의 한 장면. 주인공 소녀 라일리가 새로 이사 온 낯선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도록 그의 머릿속에선 (맨 왼쪽부터)버럭이, 까칠이, 기쁨이, 소심이, 슬픔이 등 감정을 의인화한 다섯 가지 캐릭터들이 분주하게 라일리에게 감정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영화에선 그동안 억눌려온 슬픔이 라일리의 정서적 안정에 결정적 구실을 한다. 월트 디즈니 코리아 제공
미국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2015)의 한 장면. 주인공 소녀 라일리가 새로 이사 온 낯선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도록 그의 머릿속에선 (맨 왼쪽부터)버럭이, 까칠이, 기쁨이, 소심이, 슬픔이 등 감정을 의인화한 다섯 가지 캐릭터들이 분주하게 라일리에게 감정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영화에선 그동안 억눌려온 슬픔이 라일리의 정서적 안정에 결정적 구실을 한다. 월트 디즈니 코리아 제공

인공지능을 둘러싼 최대 의문은 기계가 감정을 가질 수 있느냐다. 현대 뇌과학자들은 감정과 정서가 인지와 판단에 결정적 구실을 한다고 본다. “정서와 인지가 균형을 이루는 자의식 공감이 없다면 인공지능은 인간 뇌의 보조수단에 머물 것”이라는 게 지은이의 믿음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비롯해 지금까지 전해오는 잘 짜인 서사는 뇌의 두 가지 측면을 충족시키는 데 기여”한 반면, 인공지능에는 “생각의 속임수와 이야기를 꾸미는 능력,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뇌의 자연선택인 내러티브 창조”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단지 인간(생명)과 기계(첨단 과학기술)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에게 건네는 위로가 아니라, 과학적 설득력에 미학적 감수성을 입힌 하이브리드 인문학으로 읽히는 이유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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