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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지도에서 괴물을 내쫓고 인간은 괴물이 됐다

등록 2018-07-19 20:09수정 2018-07-19 20:21

독일 신예작가 유디트 샬란스키
세계 50개 섬에서 벌어진
잔혹하고 기이하고 신비한 일들
가고 싶지 않아질 섬 이야기
머나먼 섬들의 지도
-간 적 없고, 앞으로도 가지 않을 50개의 섬들

유디트 샬란스키 지음, 권상희 옮김/눌와·1만9800원

“낙원은 섬이다. 지옥 또한 그렇다.”

<머나먼 섬들의 지도>를 폈을 때 가장 먼저 맞닥뜨렸던 이 문장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책을 다 읽고나서 돌아와 보니 이 문장, 꽤 야심 차다. 책 전체를 근사하게 요약하면서도, 그 자체로도 의미심장한 아포리즘. 다른 글에서 꼭 인용해보고 싶다.

유디트 샬란스키? 국적도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생소한 이름이다. 그녀는 1980년 동독에서 태어났다. 국외 여행이 금지되어 있고 오직 올림픽 선수단만이 국경을 넘을 수 있던 그 나라. 8살이었던 그는 갈라파고스제도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그곳으로 너무나 가고 싶어 지도책을 펼친 뒤로, 지도를 사랑하게 됐다. 그는 세계일주 같은 무한한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 지도를 문학과 다를 바 없다 말한다. “이제 지도학은 시학의 한 범주로 자리를 얻고, 지도책은 문학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래야 ‘테아트룸 오르비스 테라룸', 즉 ‘세계의 극장'이라는 본래의 이름과도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릴 테니까.”

유디트 샬란스키. 독일의 떠오르는 신예 작가이면서 북디자이너다. 그가 낸 세 권의 책 중 두 번째인 이 책은 2009년 ‘가장 아름다운 독일 책’으로 뽑혔고, 19개 언어로 번역됐다. 그가 직접 이 책을 디자인했고, 한국어판도 원서의 디자인을 그대로 살렸다. 국내엔 지난해 2월 번역된 소설 <기린은 왜 목이 길까?>(2011년 작)도 2012년 ‘가장 아름다운 독일 책’으로 꼽혔다.

플로레아나 섬의 지도. <머나먼 섬들의 지도>에서 지은이 유디트 샬란스키는 왼쪽에는 글, 오른쪽에는 지도를 배치해 섬의 크기를 짐작하도록 했다. 그는 나폴레옹이 죽은 세인트헬레나섬이든, 이름조차 생소한 작은 섬이든 모두 한 쪽짜리 글로 다루는 엄격한 형식을 따른다. 눌와 제공
플로레아나 섬의 지도. <머나먼 섬들의 지도>에서 지은이 유디트 샬란스키는 왼쪽에는 글, 오른쪽에는 지도를 배치해 섬의 크기를 짐작하도록 했다. 그는 나폴레옹이 죽은 세인트헬레나섬이든, 이름조차 생소한 작은 섬이든 모두 한 쪽짜리 글로 다루는 엄격한 형식을 따른다. 눌와 제공

책 표지와 제목만 보면 요즘 감수성에 발맞춘 낭만적인 책일 것 같다. 멀리 떨어진 섬들에서 들려오는 아름답고 외로운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하지만 이 책이 그런 인상을 박살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다음 페이지를 넘겼을 때 수많은 첩을 거느린 섬의 독재자가 여자들의 반란에 얼굴이 짓이겨지고 있을지, 배가 난파돼 1㎢의 모래톱에서 16년을 버텨야 했던 노예들의 얼굴을 대면할지, 엄마가 갓 낳은 아기를 바닷물에 던지고 있을지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심연을, 마치 자연을 관찰하듯 냉정하게 다룬 하드보일드 문체의 소유자인 미국 소설가 코맥 맥카시가 썼다면 비슷한 작품이 나왔을까. 지은이는 부제를 ‘간 적 없고, 앞으로도 가지 않을 50개의 섬들'이라고 달았는데, 여기에 ‘가고 싶지도 않아질'이란 표현을 덧붙이고 싶어진다. “가장자리 따위는 없는 둥근 지구의 어디에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에덴동산은 없다. 멀리까지 탐험해 상상 속 괴물들을 지도 밖으로 쫓아냈지만, 대신 스스로 괴물로 변해버린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 바로 이런 최악의 사건들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이야기가 될 잠재력을 갖고 있고, 또 섬은 완벽한 무대가 된다.”

라파이티 섬. 눌와 제공
라파이티 섬. 눌와 제공

1929년 남미의 왼편 바다인 갈라파고스제도에 있는 에콰도르령 플로레아나섬. 독일인 여교사와 치과의사는 ‘문명 세계에서 더는 얻을 게 없다’는 생각에 각자의 배우자를 버리고 이 섬으로 떠나온다. 이 둘은 작은 땅을 경작하고 사람들이 찾아올 때만 옷을 걸치며, 흡사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같은 삶을 산다. 이들의 이야기가 알려지기 시작하고, 정착 3년 뒤 자신이 ‘여남작'이란 오스트리아 출신 여성이 남성 애인 둘을 거느리고 이곳에 호화로운 호텔을 짓고 싶다며 찾아온다. 2년 뒤 여남작과 애인 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치과의사는 식중독에 걸려 죽고, 오직 교사만이 살아서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전 세계 신문은 추측성 기사를 쏟아낸다. “범인은 누구일까?”

태평양 산타크루즈제도에 있는 티코피아 섬의 면적은 겨우 4.7㎢. 작은 면적이 이 섬의 1200명 주민에게 강제하는 절대 규칙이 있다. 인구가 늘어선 안 된다. 폭풍우나 심한 가뭄으로 농사를 망치면 대부분의 사람은 목을 매거나 카누를 타고 돌아올 수 없는 항해를 떠난다. 서서히 굶어 죽어가는 것보다 망망대해에서 죽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다. 이 섬에선 장남만 가족을 꾸리고 동생들은 독신으로 지낸다. 장남이 결혼할 나이가 되면 부모는 새로 태어난 자신들의 아기가 목숨이 끊어지도록 땅바닥에 얼굴이 닿은 자세로 엎어둔다. 이렇게 죽은 아이들은 무덤도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 아기는 아직 이 섬에서 생활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코피아 섬. 눌와 제공
티코피아 섬. 눌와 제공

너무 어두운 이야기만 했으니 이번엔 신비한 이야기. 프랑스의 한 작은 도시에 사는 여섯 살 소년은 꿈에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언어를 배운다. 마르크 리블린이란 이름의 이 아이는 꿈에서 배운 언어를 깨서도 유창하게 구사한다. 그가 33살 때, 학자들이 덤벼들었지만 그 언어를 해독하기란 불가능했다. 학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항구에 있는 술집으로 리블린을 데려간다. 거기에서 리블린의 언어를 듣던 한 해군 출신 바텐더가 그런 언어를 쓰는 여인을 안다고 말한다. 리블린은 교외의 공영주택 단지에 사는 그 노부인을 찾아간다. 그는 자신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인 그 노부인과 결혼해 1983년에 그녀의 고향섬으로 떠난다. 뉴질랜드에서 3620㎞ 떨어진 태평양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있는 라파이티섬으로.

유디트 샬란스키(Judith Schalansky). ⓒJohanna Ruebel. 눌와 제공
유디트 샬란스키(Judith Schalansky). ⓒJohanna Ruebel. 눌와 제공

이외에도 섬의 새들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하는 ‘조류 보호 운동의 창시자’ 한스 폰 베를레프슈 남작, 섬에 묻힌 보물을 찾는다며 땅을 파헤치다 16년을 허송했는데도 여전히 보물이 있다고 믿는 코코섬의 아우구스트 기슬러 등 여러 인물과 사건은 잊기 어려운 인상을 남긴다. 여기에 나온 이야기들은 창작이 아니라 실제 자료에 기반한 것인데, 작가가 따로 출처를 밝히지 않아 도대체 이런 이야기들을 어디에서 찾았는지 궁금해진다.

극도로 자원이 부족하고, 공권력도 보는 눈도 없는 곳에서 내면에 숨어 있던 괴물이 기어 나오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섬의 모습부터가 마치 수면 아래 짓눌려 있다가 본모습을 드러낸 인간의 욕망과 망상을 형상화한 것 같지 않나. 하지만 너무 낯설어하거나 신비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곳도 사실 대륙이 아니라 섬일지도 모르니까. “섬은 작은 대륙이고, 대륙은 거대한 섬일 뿐이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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