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박광호 옮김/후마니타스·2만3000원 유럽에서 앙시앙 레짐이 무너지는 부르주아 혁명의 격변기에 <미국의 민주주의>(1835~1840)를 쓴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1831년 봄부터 1년간 신생국 미국을 여행하다 큰일을 당할 뻔한 적이 있다. 그가 탄 증기선이 너무 낡아빠진 탓에 강의 모래톱에 부딪혀 좌초한 것. 토크빌이 조선사들에게 ‘왜 배를 더 튼튼하고 안전하게 만들지 않느냐’고 묻자, 그들은 “증기선 항해술이 나날이 진보하고 있기 때문에 현 상태로도 배들이 오래 갈 것”이라고 대꾸했다. 토크빌은 이런 경험이 당시 미국 민주주의의 모습과도 닮았다고 봤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바로 오늘 필요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토크빌이 “민주주의자들은 열정적이면서 체념적이기도 하다”고 한 이유다. 영국 정치철학자 데이비드 런시먼(51)의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2013)는 민주주의가 가진 ‘역동적 적응력’과 ‘오만한 안주’의 양면성에 주목하고 그 괴리에서 비롯한 문제와 과제들을 날카롭게 짚어낸 저작이다. 다만, 엄밀히는 개념이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가 책의 곳곳에서 혼용되거나 등치돼 쓰이는 서구 중심주의 시각은 거슬린다. 런시먼은 케임브리지대에서 정치사상사, 국가론, 대표제론 등을 가르치며 다수의 저서를 냈는데, 한국에 그의 책이 번역·소개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런시먼은 책의 상당 분량을 토크빌의 민주주의론을 인용하고 오늘날 민주주의 현실과 비교·분석하는 데 할애한다. 토크빌에게 신생 독립국 미국은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실험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다. “미국인들의 커다란 특권은 자신들이 저지를지도 모르는 잘못들을 시정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유연성은 실수에 대한 ‘도덕적 해이’를 낳았다. 민주주의의 장점이 동시에 단점이 되고, 그런 단점을 극복하는 힘을 가진 민주주의의 ‘역설’을 처음으로 포착한 이가 토크빌이었다. 런시먼은 바로 이런 통찰을 빌려와, 20세기 이후 양차 세계대전, 첨예한 냉전 대립, 오일 쇼크와 2008년 금융위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개정판 후기)까지 현대 민주주의의 결정적 위기들의 원인과 극복 과정을 분석한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의 초상.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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