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중앙연구원·한겨레 공동기획 : 학술정책 백년대계가 없다]
① ‘십년대계’ 인문한국
② 학술정책 누가 만드나
③ 대학과 연구자의 현 주소
④ 학술정책의 큰 그림 그리자
① ‘십년대계’ 인문한국
② 학술정책 누가 만드나
③ 대학과 연구자의 현 주소
④ 학술정책의 큰 그림 그리자
‘학술정책 백년대계가 없다’ 기획 시리즈의 마지막 차례로 안병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과 박구용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의 대담을 마련했다. 안 원장은 과거 학술로서 사회를 변혁하려 했던 ‘학술운동’의 전통을 만들고 이끌어온 역사학자이고, 박 본부장은 광주 ‘시민자유대학’ 이사장을 맡는 등 ‘세계시민적’ 관점으로 학문과 교육 문제를 고민하고 실천해온 철학자다.
지난 15일 오전 경기도 성남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안병욱 원장(오른쪽)과 박구용 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이 학술정책 문제점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성남/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안병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 민주화 운동과 학술운동, ‘과거사’ 진실규명 등 다양한 영역에서 폭넓은 실천을 펼쳐온 역사학자.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1~2013년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로 일했다. 학술단체협의회 공동대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한국 민주화운동의 성격과 논리> <전환시대의 한국 사회>(공저) 등이 있다.
토론도 범사회적 합의도 부재
‘진흥 방향’ 범사회적 담론 만들고
국가학술진흥위 같은 기구 검토를 사회 국가가 인문사회 분야의 학문 진작에 힘을 쏟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 조선왕조가 건국되고 나서 26년째에 겨우 21살 청년 세종이 임금이 됐는데, 그는 앞으로 나라의 굳건한 기틀을 세우기 위해 뭐가 필요한가 고민했다. 그 결과 세종은 학술정책을 펼쳐 조선 500년 대계를 구축했다. 세종 때 300개가 넘는, 말하자면 프로젝트에 따른 보고서가 나왔다. 한 국가를 경영한다고 하면, 지식, 지혜, 학술, 이런 분야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오늘날 정부 수립 70년이 넘었는데, 70년 동안 학문에 대해 어느 정부도 주목하지 않았다. 이것이 현재 한국의 위상을 말해준다. 대학에도, 교육부에도 대학원 담당 부서가 따로 없을 정도로 학문정책에 아무도 신경을 안 쓴다. 그런데 스포츠 선수를 키우는 데 들이는 정성은 얼마나 대단한가. 지난 평창 올림픽 때 스켈레톤이라는 생소한 종목에서 윤성빈 선수가 금메달 따는 걸 보고 놀랐다. 그것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만이라도 학문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주면 어떨까 생각했다. 박 1979년 학술진흥법이 제정됐고, 1981년엔 한국학술진흥재단이 만들어져 2009년 한국연구재단으로 통합됐다. 학술진흥 사업은 이런 역사 속에서 여러 변화를 거쳤는데, 대부분 그때그때 임기응변식으로 사업을 벌여왔다. 무엇보다 학문과 학술을 경제적 지표로 바라보는 관점이 두드러진다. 지표로 드러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다보니, 공학 분야와 기초 이공 분야의 연구 지원은 세계적 수준이다. 그러나 인문사회 분야는 당장 경제적 효과가 나타나진 않으니 지원도 없었고 체계화되지도 않았다. ‘인문학은 성과 없이 돈만 달라고 한다’는 비판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동안 성과가 없지도 않았지만, 그런 성과를 요구하는 가운데 붕괴된 것이 무엇인지 봐야 한다. 첫째, 학문공동체가 학문적 담론의 장소가 아니라 연구 성과물을 게재하는 곳, 곧 전시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둘째, 교수가 되지 못한 연구자들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하는 등 젊은 학자들이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연구비가 증액된다면, 기존 정규직 교수들이 아니라 제대로 된 학술활동을 하는 학문후속세대에게 지급되어야 한다. 안 동아시아권에서 학문의 지적 유산을 보면, 한·중·일 가운데 한국이 중국, 일본에 뒤지지 않는다. 최근의 ‘한류’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전통으로 축적되어 왔던 문화가 19~20세기 파동을 겪으면서 발현될 기회를 갖지 못하다가, 1990년대 이후 정치사회적 안정을 이룬 데에서 비로소 움터 싹을 틔운 현상이라고 본다. 이걸 계속 유지하고 꽃피워가려면 정책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 때의 현상으로 사라질 수 있다. 이전에는 우리 스스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족적 주체성’ 같은 걸 강조하는 데 매몰됐다. 지금은 70억 인구가 지구촌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데, 그 속에서 한국이 제 위상을 확보하려면 고유의 역량을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과학기술도 중요하지만, 인문사회 분야의 소양과 지식이 없으면 자기 몫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박 문재인 대통령이 정치를 하게 된 동기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일하면서 당시 추진했던 개혁 과제가 거꾸로 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게 무너졌다. 뒤집힐 수 없는 튼튼한 길을 만들고 싶다.” 나는 문재인 정부가 만들어가고 있는 평화의 길도 인문사회 분야의 토대가 없으면 거꾸로 갈 수 있고, 이 때문에 치러야 할 비용도 막대할 것이라 믿는다. 국정교과서, 블랙리스트 등의 사건들에서 그 사례를 보지 않았던가. 예컨대 평화라는 의제를 담론 축적과 토론 없이 그저 개인의 기능주의적 연구에만 맡겨놓으면, 결과적으로 그 비용은 전쟁으로 지불해야 할 수 있다. 인문사회 분야 학술은, 말하자면 사회적인 자산 또는 자본을 축적하는 과정이다. 안 지금이 100년 대계의 학술정책을 펼칠 수 있는 적합한 시기다. 인프라 구축에서 출발하여 장구한 시간 동안 국가가 투자에 나서야 한다. 이 정부 임기 안에는 효과를 보지 못할 수 있지만, 지금 씨를 뿌리지 않으면 안된다. 정치권에서는 3월에 투자하고 12월에 결과 내라고 요구하곤 한다. 그렇지만 학자를 양성하고 학문을 융성시키는 일은 적어도 세대 단위로 기획해야 한다. 또 한국 학자들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다른 나라들의 학자들도 지원하는 등 인류문명사적 시각을 가지고 학문을 진작시켜야 할 필요성도 크다. 우리 사회는 인류문명사적 의미를 지닌 ‘촛불혁명’을 했다. 그것을 우리 스스로 인류문명사의 자산으로 키워가야 할 필요가 있다. 박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동안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약이 있었다면, 지금이야말로 ‘세계시민적’ 관점으로 전환해야 할 시기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독일 유학 시절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에서 지원을 받았는데 지금까지도 책과 잡지를 보내오고 연락을 해온다. 그들은 이미 전 세계를 상대로 학술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세계시민적 관점으로 학술정책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박구용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 강연과 칼럼 등으로 대중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철학자. 전남대 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뒤 독일 뷔르츠부르크대에서 독일 관념론과 비판이론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한편, 5·18기념재단 기획위원장, 광주 시민자유대학의 초대 이사장을 지내는 등 각종 사회단체 활동에도 활발하게 간여해왔다. <우리 안의 타자> <부정의 역사철학> 등의 저작을 펴냈다.
성과를 통계치로 잴 수도 없어
학자 하고픈 연구하게 만들어주고
밑빠진 독 물 붓는 식 지원이 맞아 사회 학술정책의 큰 틀을 마련하라는 요구는 ‘국가가 연구를 좌지우지한다’는 오해를 부를 수도 있다. 두 분이 구상하는 학술정책의 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안 한중연에 와서 두 가지 연구 지원 프로그램을 새로 만들었다. 하나는 내년부터 시작할 ‘태학사’ 제도인데, 독일의 ‘하빌리타치온’ 제도와 비슷하다. 박사 학위를 딴 젊은 연구자에게 5년 동안(10년까지 연장 가능) 매달 500만원씩 장학금을 주고, 다른 어떤 것도 신경쓰지 않고 하고싶은 연구를 하도록 한 뒤 그 성과를 논문이나 저술로 내게 한다. 10명이 지원해서 그 가운데 1~2명이라도 성과를 낸다면 성공적이라고 본다. 연구비를 따와야 하는 등 여러가지 요구에 시달리는 기성 연구자들을 위해선, 5년 동안 매년 조건 없이 3000만원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만들고 있다. 그래서 몇 사람이라도 뛰어난 학자가 나올 수 있다면, 그들이 학계를 이끌어갈 수 있다. 박 말씀하신 ‘태학사’ 제도의 경우 마지막 연도에 드는 비용이 30억원 수준일텐데, 국가 차원에서는 그리 큰 돈이 아니다. 최고의 학자들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으로서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더 시급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전체 시간강사가 7만5000명 가량 되는데, 이 가운데 학문적 역량 있는 분들이 많음에도 늘 좋지 않은 여건에 놓여 있다. 프랑스에서는 ‘국가교수’란 제도를 운용하는데, 우리도 1000명 정도를 국가교수로 뽑는 제도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연구재단이 국가교수를 뽑아서 연구비를 지원하되, 대학 현장에서 강의비를 지원하는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연간 예산이 300억원 정도 드는데,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학자들은 국가가 책임질 수 있으면 좋겠다. 대학 내 안정된 일자리를 갖고 계신 분들에겐 연구에 드는 비용만 지원하면 된다. 다만 연구자가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행정적 부담을 가능한 한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안 학문에는 ‘자유’란 말이 따라붙는다. 국가가 행정적으로 간여해서 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행정이 아니라 철학이다. 국가가 ‘학문을 진흥시켜야 하겠다, 발전시켜야 하겠다’고 마음먹는 국정 철학. 돈 나눠주면서 일일이 간섭하는 게 아니라,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식으로 지원해야 한다. 학자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는 조건만, 그런 장(場)을 만들어주고 국가는 지켜보는 것이 학문 정책이다. ‘이렇게 지원했으니 이렇게 결과를 내라’ 이런 것과 거리가 멀다. 사실 결과와 성과에 대해 통계치를 가지고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학문정책의 어려움이 있다. 이런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 “대학은 산업”이라고 말하게 된다. ‘규정된 것을 제출하라’는 관료의 논리에 맞출 수 없기 때문에 학문이 이처럼 방치된 측면도 있다. 박 연구재단에서 개인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지점도 바로 이 지점이다. 대한민국은 행정체계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 행정의 논리는 간단하다. 예산을 투입하면, 그 결과물이 누구나 다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제출되어야 한다. 행정은 그것을 효율적으로 집행하는 주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지, 예산 투입의 방향까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문 연구가 행정체계의 틀에 갇혀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학문이 사회적 요구를 벗어나서도 안된다. 학문 발전과 학술연구 진흥의 방향에 대한 범사회적 담론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담아내고 정책을 입안하는 국가학술진흥위원회 같은 기구를 만드는 상상도 해야 한다. 이 과정에 학자들 스스로가 주체로서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공감과 학자들의 참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학술진흥 정책이 문재인 정부의 기본을, 국정 철학을 만드는 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끝> 사회·정리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