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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권력’에 춤추는 대학, 주인의식 박탈당한 연구자

등록 2018-06-21 19:45수정 2018-06-21 20:08

[한국학중앙연구원·한겨레 공동기획 : 학술정책 백년대계가 없다]

① ‘십년대계’ 인문한국
② 학술정책 누가 만드나
③ 대학과 연구자의 현 주소
④ 학술정책의 큰 그림 그리자
2016년 3월 서울 성북구 성신여대에서 학교의 일방적인 학과통폐합 등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대학의 기업화’ 현상 속에서 대학 구조조정은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2016년 3월 서울 성북구 성신여대에서 학교의 일방적인 학과통폐합 등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대학의 기업화’ 현상 속에서 대학 구조조정은 일상적인 풍경이 됐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학문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학자, 곧 연구자다. 따라서 연구자가 놓인 현실은 한 사회가 학문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보여주는 가늠자가 된다. 대학은 가장 중요한 행위자인데, 대다수 연구자들이 대학이란 요람에서 태어나고 대학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학문 생태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20여년 동안 ‘대학의 기업화’ 현상을 겪으며, 많은 학자들이 ‘대학은 학문을 위한 공간’이란 명제 자체가 배반당한 현실을 성토하는 데에 이르렀다. 한 중견학자는 <한겨레>에 “대학은 임용, 월급, 강의 등 연구자의 모든 것을 다 통제하고 있지만, 단 한 가지, 학문만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대학이 갖춰야 할 공공성을 내팽개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계량화된 숫자가 우선인 대학과 정부 기업처럼 경영되는 대학의 최대 관심사는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하자면, 대학의 상품성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대학 밖 권력이 정해주는 서열 순위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국제적으로는 <타임스> 같은 언론사나 ‘쿼콰렐리 시몬스’(QS) 같은 전문 평가기관이, 국내에서는 <중앙일보> 같은 언론사들이 작성하는 ‘대학 평가’에서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대학은 자신의 모든 자원을 평가 기관들이 제시하는 척도에 맞추어 정렬하고 배치한다. 교수당 연구비, 논문 게재 편수, 학생 취업률 등 궁극적으로 그 결과물은 모두 숫자로 표시되는데, 계량화된 지표를 써야만 순위를 매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량화된 지표들은 정부와 대학, 한국연구재단 같은 전문기관과 연구자들이 모두 공유하는 ‘공통의 존재 양식’이 된다. 교육부, 한국연구재단, 대학의 공식 문서들을 보면, 각 조직의 인력 현황에서 시작해 논문 게재 편수, 단행본 저술 수, 학술대회 개최 수 등의 나열로 이어지는 천편일률적인 형식과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런 존재 양식에는 다양성보다 획일성을, 자율성보다 종속성을, 순수 학문보다 실용 학문을 중시하는 위계 질서가 강하게 녹아 있다. 대학이 교수를 채용하거나 교수 업적을 평가할 때 쓰는, “(국제 학술지 리스트인) A&HCI 및 SSCI급 저널에 게재한 논문 1편은 한국연구재단 등재지에 게재한 논문 6편으로 환산한다”는 식의 논리가 대표적이다. 이른바 ‘명문대’들은 세계 대학 평가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국내 대학들은 국내의 대학 평가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기 위해 ‘평가하는 권력’이 제시하는 지표에 자신을 맞추고자 노력한다. 인문사회 분야의 통폐합이 중심이 된 대학 구조조정, 비정규직 연구자의 확산, 논문 양산 및 연구 성과 부풀리기 등은 모두 이런 환경에서 나온 문제들이다.

강명구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가 2014년 발표한 ‘어떤 학자와 교수를 키울 것인가’ 제목의 논문은 이런 맥락을 잘 드러낸다. 논문은 한국에서 2000년대 이후 임용된 언론학 분야 교수 115명의 배경과 연구 분야를 분석했는데, 분석 대상 가운데 76.5%가 최종학위를 미국에서 취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주된 연구 분야는 주로 미디어 산업과 광고·홍보 산업의 요구에 맞는 연구들이었으며, 윤리나 이론, 철학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인문학자는 “한국에서 학문의 성취는 대학 본부가 취합하는 숫자로서만 존재한다. ‘한국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학문의 장(場)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2010년 고려대를 다니다가 “자본과 대기업의 하청업체가 된 대학을 거부한다”며 대학을 그만둔 김예슬(24)씨.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 없는 대학에서, 우리 20대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 세대’가 됐다”고 쓴 그의 ‘대학거부선언’은 우리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0년 고려대를 다니다가 “자본과 대기업의 하청업체가 된 대학을 거부한다”며 대학을 그만둔 김예슬(24)씨.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 없는 대학에서, 우리 20대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 세대’가 됐다”고 쓴 그의 ‘대학거부선언’은 우리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한겨레> 자료사진

대학평가 순위에 매달리는 대학
계량화된 평가가 학문 세계 지배
주인의식 박탈당한 연구자들
“어떤 자발적인 연구를 기대하는가”

■ 주인의식을 박탈당한 연구자 대학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삼는 연구자들은 계량화된 척도에 최대한 자기 자신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박사 학위를 받고 난 뒤 정규직이 되느냐는 대개 5년 안에 판가름 나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한 해에 서너편씩 논문을 쓴다. 운 좋게 임용이 되더라도, 재계약과 연봉 인상 등 더 안정적인 생존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꾸준히 ‘평가 권력’이 요구하는 연구 실적을 내야 한다. 정규직 교수인 한 인문학자는 “연구자의 신분이 온통 논문에 걸려 있는 셈”이라고 자조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대학 내에서 정규직으로 자리잡지 못하면, 연구에서든 생계에서든 감수해야 할 위험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 때문이다. 시간강사, 연구교수 등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 연구자들은 정규직과의 구조적인 차별 속에서 오직 생존을 위한 자격 조건으로서 논문 작성과 프로젝트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국제적으로 인문학 분야에서 영향력이 큰 A&HCI 등재 학술지에 10여편의 논문을 게재한 바 있는 한 비정규직 인문학자는 “만약 전임교원이었다면 이 같은 연구 실적으로 큰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강사는 구조적으로 그런 혜택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고 말했다. “연구재단의 학술연구 지원을 받게 되자, 그에 상응해 강의료가 깎인 적도 있다”고도 했다.

애초 ‘세계적 연구소 육성’을 목표로 내걸었던 ‘인문한국’(HK) 사업의 또다른 목표는, 이처럼 대학에서 안정적으로 자리잡지 못한 연구자들을 연구소 중심으로 품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공고한 대학 내 차별구조를 어쩌지 못했고, 일각에서는 연구소장-인문한국교수-인문한국연구교수-연구원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차별구조를 만들었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전임 자리를 보장받은 ‘인문한국교수’마저 “학내에서 같은 교수가 아닌 ‘2등 교수’ 취급을 받는다”고 토로할 정도다. 그는 “주인의식을 박탈당한 학자가, 과연 연구에서 어떤 자발성과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학계도 ‘학술정책 새 틀’ 방향 모색 나서

안정적인 연구환경 제공 시급
“학술정책 총괄하는 위원회 필요”

최근 학계는 우리 학술정책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짚고 새로운 학술정책의 틀거리를 짜야 한다는 목소리를 잇따라 내고 있다. 21일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는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학술단체협의회, 대학공공성 강화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와 함께 ‘학문 절벽의 시대, 비정규 교수·연구자의 위기 실태와 극복’이란 제목의 토론회를 열었다. 오는 26일에는 유은혜 국회의원실과 한국인문학총연합회 등 인문사회 분야 주요 단체들 주최로 ‘인문사회 분야 학술연구 진흥·발전을 위한 국회 토론회’가 열릴 예정이다.

학술정책, 특히 인문사회 분야 학술정책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방향의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현재 대학이 제대로 품지 못하고 있는 비정규 연구자들에게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제공하는 등 ‘연구자 살리기’다. 민교협 등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발표자로 나선 김귀옥 한성대 교수(사회학)는 비정규 연구자 11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들을 제시하고, 이들의 열악한 연구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설문에 참여한 비정규 연구자들의 소득은 월 평균 166만6000원~250만원 수준으로 한국 일반인의 평균 월 소득 285만원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경제적 이유”(84.7%)나, “연구업적 평가 대비”(44.7%)를 위해 연구재단 등의 연구지원 사업에 참여한다고 밝힌 것도 눈에 띈다.

실제로 전문기관들은 현재 1~3년에 그치는 연구지원 사업에서 벗어나, 대학에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연구자들에게 중장기적인 지원을 하는 프로그램들을 검토하고 있다. 연구재단은 정부와 지자체 지원을 받아 6년씩 최장 18년 동안 인문사회 분야 연구자를 채용하는 ‘국가교수제도’(가칭)의 신설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태학사’란 이름으로 5년씩 최장 10년 동안 박사학위를 끝낸 연구자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다만 연구자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학술정책의 큰 뼈대를 이룰 수 없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때문에 인문사회 분야에서는 “실질적인 집행 능력을 갖춘 국가위원회”의 필요성에 대해 입을 모은다. 가장 높은 차원의 위상을 부여받은 새로운 ‘단위’가 만들어져, 여기서 학술정책을 총괄적으로 관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교협 주최 토론회에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학술정책은 교육정책의 상위에 존재하며 지식정책의 일부에 속한다. 따라서 교육부보다는 대통령 직속, 아니면 국회 차원에서 ‘국가학술위원회’를 설치해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배성인 한신대 교수 역시 ‘한국인문사회과학위원회’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이 위원회는 인문사회과학 계열의 학문정책을 수립, 법제화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최원형 기자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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