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제주도 서귀포시 모슬포항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이달 초 발간을 시작한 ‘한국칸트학회(학회) 기획 칸트 전집’을 두고 논쟁이 뜨겁다. 정부 지원사업의 특성상 짧은 번역 기간으로 인한 사소한 문제점이 있었지만, 그동안 축적돼 온 전문성 속에서 기존 번역의 문제점을 바로잡고 일반인도 접근할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인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의미 있는 전집이라는 것이 칸트 학계 안팎의 평가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칸트 학자이자 학회 번역에도 참여한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한겨레>와 통화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학회에서 전집을 번역하기로 한 원인은 ‘트란스첸덴탈’(transzendental)을 ‘초월적’이라고 심각하게 왜곡해 번역한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철학과)가 제공했다”고 말했다. 그는 “칸트는 그 이전의 신과 영혼 같은 초월적 존재자들에 대한 사변을 파괴하고 철저히 내재적인 형이상학을 전개한 철학자다. 하지만 칸트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트란스첸덴탈’을 현세적 차원과 내재적 지평을 뛰어넘는다는 뜻이 담긴 ‘초월적’으로 번역을 하니, 대다수 칸트 학자들은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어 새로운 전집 번역으로 바로잡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학회는 4차례의 학술대회와 용어조정위원회의 논의 끝에 ‘트란스첸덴탈’을 ‘선험적’으로 통일해 전집을 번역한 바 있다.
이어 김 교수는 “플라톤이나 니체와는 다르게 칸트 철학은 주제와 논의의 폭이 너무나 넓다. 한 사람이 칸트의 모든 저작을 다 번역하는 것보다는 각 저작의 전문 연구자들이 나눠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2002년부터 현재까지 모두 11권의 칸트 주요 저작을 번역해 아카넷 출판사에서 출간했고, 지난 2014년에 이를 ‘한국어 칸트전집’으로 확대해 향후 10년간 4명의 후학과 함께 전 24권으로 낸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번 달에 1차분 3권을 낸 한국칸트학회는 한길사에서 내년까지 모두 15권의 전집을 출간한다는 계획이다.
학회에서 ‘트란스첸덴탈’에 버금가는 핵심 용어인 ‘a priori’를 ‘선천적’, ‘선험적’, ‘선차적’이 아니라 ‘아프리오리’라고 번역한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결정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독일의 현상학자 에드문트 후설의 저작을 10여종 넘게 번역한 이종훈 춘천교육대학교 교수(윤리교육과)는 지난 19일 <한겨레>에 보내온 글에서 “백 교수가 ‘남김없이 자국어로 옮기는 것만이 번역’이라고 비판한 것은 궁색한 억지로 들린다. (우리말로 번역하기에 적절치 않은 용어를 음차해) 번역한 예는 ‘포스트모더니즘’, ‘딜레마’, ‘에피스테메’, ‘헬레니즘’ 등 무수히 찾아볼 수 있다”고 반박했다.
독일어 문장 구조를 그대로 살린 백종현 전집에 비해 최대한 우리말에 가깝게 문장을 다듬은 학회 전집이 비전공자들도 칸트에 접근할 수 있도록 문턱을 크게 낮춘 의미가 적지 않다는 평도 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백 교수 전집은 완전 직역으로 독일어 원전을 같이 읽을 수 있는 전문가들에게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칸트를 읽어보려는 다른 학문 연구자나 일반인들은 학회 전집을 보는 것이 도움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논쟁이 법적 소송으로까지 비화할 가능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백종현 교수는 지난 13일 학회 회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홍보문에서 ‘정본’ 표현을 거두라 △‘한국칸트학회 공인 칸트 전집’이라고 표현하지 말라 △‘한길사 판’ 또는 ‘학회 회원 34인 번역 칸트 전집’으로 호칭하라 △학회 학술지 등에 ‘한길사 판 칸트 전집’에서 사용한 용어를 강요하지 말라 △가독성 운운하지 말라 등 5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이후 백 교수는 추가로 이충진 회장 쪽에 ‘기자간담회에 나가서 한 발언으로 학회 회원 간에 반목을 일으킨 이 회장과 책임연구자 최소인 영남대 교수 등 5명은 오는 23일까지 이번 일을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학회를 탈퇴하라. 그렇지 않으면 다른 회원들에게 문제 해결을 호소할 것이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경고한 상황이다.
한국칸트학회는 지난 16일 이사회를 열어 가까운 시일 내에 긴급 총회를 열어서 회원 전체의 의견을 모아 백 교수의 요구에 답하기로 했다. 이충진 회장은 <한겨레>와 통화에서 “아직 이사회에서 총회 날짜를 정하지 못했다. 학기 일정도 있고 전국에서 회원들이 모여야 해서 백 교수가 요구한 시한에 맞춰서 총회를 여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에 김상봉 교수는 “전집 출판을 두고 일어나는 마찰은 학회 안에서 서로 선의로 조율하고, 학회 쪽에서도 백 교수의 정당한 요구는 받아들일 생각이다. 하지만 백 교수의 현재 요구는 너무도 과도하고 비상식적이다. 왜 이렇게 나오는지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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