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시대-현재의 역사
판카지 미슈라 지음, 강주헌 옮김/열린책들·2만2000원
미국과 유럽, 중동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테러 사건 소식이 들려온다. 그러면 한켠에선 이민자들이 테러의 주동자들이고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며, 국경을 닫고 이민자들을 내쫓아야 한다는 극우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성들이 자신들의 일자리와 자존감을 빼앗았다’는 남성들의 분노가 인터넷 공간에서 여과없이 배출된다.
지난해 출간돼 <뉴욕타임스>, <가디언> 등 서구 유력 언론들의 집중 조명을 받은 <분노의 시대>는 현재의 시대를 ‘분노’라는 한 단어로 꿰뚫을 수 있다고 보는 야심찬 저서다. 일단 이 책의 지은이인 판카지 미슈라(49)는 특이한 이력으로 눈길을 끈다. 인도 출생으로 인도 뉴델리에 있는 자와할랄 네루 대학에서 영문학으로 석사를 받은 뒤, 취업을 하지 않고 23살 나이로 책을 싸들고 히말라야의 마쇼브라란 작은 마을에 들어갔다. 텔레비전과 전화기도 없는 그곳에서 5년간 책을 읽고 쓰는 일에 몰두했다. 인도 매체에 이어 미국의 유력 서평지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보낸 글로 세계 무대에 데뷔한 이후 논픽션과 역사책 등을 내며 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했다. 그가 2012년에 출간한 <제국의 폐허에서>의 번역본도 나와 있지만, 이번에 나온 그의 아홉번째 책 <분노의 시대>로 한국 독자들에게도 확실히 눈도장을 찍게 됐다.
2016년 벨기에 브뤼셀 구 증권거래소 앞에서 우익 시위자들이 최근에 일어난 테러 사건을 이유로 이슬람국가(ISIS)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며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다. 연합/로이터
이 책의 핵심 논지는 간단하다. 지금 서구와 중동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들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문명의 충돌도 아니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사건도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17세기 프랑스혁명과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근대 서구 문명의 핵심에서 소외된 이들이 품어온 유구한 분노의 결과물 중 하나라는 것.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널리 퍼졌지만, ‘근대 상업 사회’가 창출해낸 막대한 과실은 나눠지지 않는 현실의 모순이 불러오는 원한 감정이 독일 나치즘,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 이슬람주의 테러 등 각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분출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9·11과 이슬람국가(ISIS)의 테러리스트들, 힌두 민족주의자, 백인우월주의자 테러범의 심리 구조는 장 자크 루소, 바그너 같은 독일 낭만주의자들, 히틀러, 마르크스, 바쿠닌 같은 사회개혁가·혁명가들의 사상에 깔린 심성과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 지은이가 수많은 역사와 철학책을 섭렵한 뒤에 내린 결론이다.
지난해 12월 크리스마스 직전 파키스탄 퀘타에 있는 한 교회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나 1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연합/AFP
이를 입증하기 위해 지은이가 되살려내는 역사 속의 라이벌이 바로 두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와 루소다. 지은이는 볼테르(1694~1778)를 승리를 거둔 지배계급과 그들의 가치를 대표하면서 이 체제의 낙오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인물로 본다. 볼테르는 전제군주인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를 열렬히 지지하며, 그가 1768년 폴란드와 터키 등에 대한 전쟁을 시작하자 “계몽 철학을 위한 성전”이라며 응원단장을 자처했다. 황제를 위해 자신의 손으로 터키인들을 죽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또한 비열한 금융거래와 곡물 무역, 시계 제작으로 막대한 부를 모으며 상업 사회를 찬양한 최초의 ‘신자유주의자’였다.
반면 루소(1712~1778)는 힘없고 낙오된 자들의 대변인이었다. 계몽주의와 상업 사회가 불법적인 권한을 지닌 소수에게 다수를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의혹을 처음으로 제기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고 항상 짓밟히며 살아가는 ‘인민’이라는 계급을 고안해 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루소가 포착했던 이런 원한 감정은 18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독일 낭만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되풀이된다. 유럽 경제의 중심축이 영국, 프랑스 등 식민지를 개척하는 대서양 제국주의 국가들로 이동하자 독일은 중세 말에 누리던 주도적 지위를 잃는다. 독일의 젊은 사상가들은 서유럽에서 시작한 사회경제적 부흥과 합리주의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해 독일 민족을 이상화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곧 유대인 등 타민족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결합됐다. 히틀러의 나치즘은 이런 사상을 현실화시킨 것일 뿐이었다. 1800년대 초 나폴레옹의 프랑스에 독일이 점령당하자, 시인 테오도어 쾨르너는 “성전”을 부르짖으며 독일을 위한 죽음의 순교를 통해 “조국과 결혼”하라고 외쳤다. 지은이는 “탈기독교화된 유럽에서 벌어진 이 최초의 ‘성전’은 군사적이고 문화적인 제국주의에 맞선 이슬람 광신도들의 지하드보다 수십 년을 앞선 것이었다”고 말한다.
2017년 8월12일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열린 극우 백인민족주의자들의 행진에서 한 참가자가 독일 나치당 깃발을 들고 있다. 출처 트위터
지금 자살폭탄 테러에 뛰어드는 이들도 서구 사회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슬람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유학이나 이민을 통해 서구 사회를 경험했지만 거기선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었던 중동의 젊은이들이 9·11테러에 나서고 이슬람국가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풍요의 신 바알은 경제를 분열에 빠뜨리고 사회를 원자화하며, 과거의 가치를 위협하고 사회의 불균형을 불가피한 일로 만들며, 전지구적인 차원의 단층선들을 만들어냈다. 이 단층선들은 거대한 변화에 휩쓸린 여러 국가와 사회는 물론이고 인간의 영혼을 가로질러 뻗어나갔다. 힌두 민족주의와 중국의 민족주의만이 아니라 급진 이슬람주의의 보병들은 바로 이러한 바알 신의 희생자들로부터 생겨난다.”
‘현재의 역사’라는 부제에서 보듯 이 책은 스스로를 역사서로 규정한다. 역사서가 그렇듯이 이 책도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하진 않는다. 폭주하는 자본주의 시장을 비판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살짝 언급하지만 이마저도 충분하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는 “현대 정치와 문화에는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 고립되고 두려워하는 개인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집단 정체성과 자기 확대에 상응할 만한 것들이 거의 없다”며 “우리의 자아와 세계를 변화시킬 뭔가 진정으로 새로운 사고가 필요하다”고만 짧게 언급할 뿐이다. 이 세계의 단층선이 너무나 넓게 걸쳐져 있어 낙관하거나 대안을 말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기에 그럴 것이다.
판카지 미슈라 ⓔNina Subin, 열린책들 제공
이 책을 지난주 이 지면에서 다룬 마이클 셔머의 <도덕의 궤적>과 나란히 두고 관점과 방점의 차이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과학의 발전으로 “도덕적 세계의 궤적은 길지만 결국 정의를 향해 구부러진다”고 전망하는 셔머의 말이 장기적으로는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그 미래가 도래하기까지 또다시 전쟁과 인종청소, 대량학살, 독재를 겪을 수 있다는 것이 <분노의 시대>가 증언하는 역사적 사실이다. <분노의 시대>를 읽고 나면, 미국 주류사회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 있는 과학자들이 ‘다 잘 될 거야’라는 낙관을 바깥의 비명소리를 막아주는 귀마개로 사용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수도 있다. ‘현대의 계몽주의자’를 자처하는 그들이 과연 볼테르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일까.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