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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대중의 정의가 오락으로 변질할 때

등록 2018-06-14 19:36수정 2018-06-14 19:58

[책과 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내가 죽어야 하는 밤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배명자 옮김/위즈덤하우스(2018)

어느 날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하게 되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로, 세상 사람들이 던지는 돌을 고스란히 받아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경찰도 나를 구하지 못한다. 과연 살아서 버틸 수 있을까?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내가 죽어야 하는 밤>은 의도적으로, 혹은 본의 아니게 늘 대중의 시선에 노출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두려움을 극대화한 스릴러 소설이다. 술주정뱅이 퇴물 드러머인 베냐민 뤼만은 어느 밤 갑자기 사냥게임 8N8의 목표로 지목된다. 누구나 각자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10유로를 내고 그 사람의 이름을 8N8 사이트에 입력하면, 주최 측에서는 한 명을 추첨하여 선정한다. 이 사람은 8월8일 밤 8시부터 다음날 아침 8시까지 12시간 동안 사냥에 노출된다. 사냥감을 추적하여 죽이는 사람은 천만 유로를 상금으로 받고, 독일 정부도 이를 방기, 혹은 협조한다고 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베냐민은 같이 사냥감으로 지목된 대학생 아레추와 함께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동시에 현재 중환자실에 누운 딸 율레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광분한 군중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친다.

서양 스릴러의 주제 중 하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체제가 일탈한 몇몇 개인을 통제하지 못하여 고장 난 상황에서 발생하는 폭력이다. <내가 죽어야 하는 밤>도 비슷한 조건을 두고 계속 질문을 던진다. 신뢰할 수 있는 질서는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는가? 혹은 그런 질서라는 게 과연 인류에게 존재할 수 있는가? 대중의 정의와 이기심, 가학적 욕망이 엄밀히 분리될 수 없는 현실에서 개인은 늘 판단의 갈림길에 선다.

8N8 게임은 그 자체가 필립 짐바르도의 루시퍼 효과를 전제한 거대한 대중 심리실험을 목표로 했다. 양심의 가책이 필요 없을 만큼 죄가 있는 대상이 있을 때, 그리고 정부가 사적 복수를 제대로 제재하지 않는다고 할 때 사람들은 남을 마음대로 벌할 수 있는 권리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행사할 것인가? 거기에 현대 인터넷 기술의 본질인 출처가 불확실한 정보, 익명으로 배포가 가능한 유통 경로들이 보장된다면, 정의 재판은 어떻게 오락으로 변질하는가? 소설은 철학적 결정 사이에 급박한 사건들을 쉴 틈 없이 배치하여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달려나간다.

오즈라는 가상의 인물이 진행하는 8N8 게임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현대인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것, <내가 죽어야 하는 밤>에 깔린 전제이다. 경솔한 말이나 사소한 무례 같은 개인적 코드의 위반부터 범죄까지 개인의 행동은 법적 처벌을 넘어 대중이 재판할 수 있는 대상이다. 혹은 잘못이 아니어도 “보기 불편하다”는 감정적인 이유가 집단화되면 비난할 수 있다. “욕먹을 만하다”는 낙인이 찍히면 정당한 시민운동과는 별개인 분노 해소와 폭력적 언사도 같은 명분으로 합리화된다. 익명 뒤에 숨어 안전한 이들이 그에 동참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도 대중의 사냥감이 되어버릴지 모르는 가능성을 깨달을 때까지는. 유명인도 아니고 큰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는 내게는 일어날 리 없다고? 베냐민 뤼만도, 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박현주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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