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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칸트 전집 번역, 논쟁이 시작됐다

등록 2018-06-10 13:31수정 2018-06-10 22:02

칸트 전집 번역 먼저 시작한 백종현 교수
한국칸트학회의 번역어와 번역주체 맹비판
“학회가 전집 번역한 나라 없어”
“번역어는 반드시 한국어로 번역해야”
지난해 4월 <한겨레>와 만나 포스트휴먼학회 활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 사진 강성만 기자
지난해 4월 <한겨레>와 만나 포스트휴먼학회 활동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 사진 강성만 기자
한국의 대표적인 칸트 번역자인 백종현 서울대 명예교수(철학과)가 한국칸트학회에서 번역해 내는 ‘칸트 전집’ 작업을 비판하고 나섰다. 학회와 출판사에서 ‘공인’과 ‘정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통일해 사용하는 번역어를 두고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학계에선 그동안 전집 번역과 번역어를 둘러싸고 공개적으로 치열하게 논쟁했던 사례가 많지 않아, 이번 논쟁이 이 문제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관련기사= 한국학술번역 ‘현주소’ 보여준 칸트 전집

백 교수는 지난 8일 210여명의 한국칸트학회 회원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앞서 지난 4일 한국칸트학회가 한길사 출판사와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1차분 3권을 공개하고, 칸트 전집 출간의 취지를 설명한 것에 대한 반박 형식의 글이었다. 200자 원고지 28매 분량의 이 글에서, 그는 먼저 한국칸트학회가 칸트 전집을 번역하면서 ‘a priori’라는 개념의 번역어를 우리말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음차한 ‘아프리오리’로 통일하기로 한 대목을 비판했다. “번역 작업이 의미가 있는 것은, 누구든 결국 사고와 이해는 모국어로 하는 것이므로, 기존의 낱말 가운데 그래도 가까운 말을 택해 새로운 뜻을 추가하거나, 그것도 안 되면 신조어를 사용해서라도 모국어를 키워감으로써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와 이해의 폭이 깊고 넓어지기 때문이다. (…) 번역, 특히 철학 고전의 번역에서는 한 낱말 남김없이 자국어로 옮기는 노고를 기울이는 것이 번역자의 책무이다.”

이어 그는 칸트 철학의 핵심 용어인 ‘transzendental’과 ‘a priori’의 번역어로는 각각 ‘초월적·초월론적’과 ‘선차적’(先次的)이 가장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앞서 학회에선 이 두 용어를 ‘선험적’, ‘아프리오리’로 통일해 번역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백 교수는 “(‘transzendental’는) 칸트가 당대의 독일 프로테스탄트 스콜라 철학자들과의 사상적 대결 중에 스콜라철학에서 차용하여,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그 의미를 전도시켜 사용했다”면서 자신이 사용해온 ‘초월적·초월론적’이란 번역어를 옹호했다.

이에 한국칸트학회 회장인 이충진 한성대 교수는 “번역어가 반드시 우리말이어야 한다는 건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어 여러 사람의 오랜 논의 끝에 차선책을 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학회에선 지난 2014~15년 모두 네 차례의 학술대회를 열어 번역 원칙과 용어를 통일하려고 하였으나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특히 칸트 철학의 기본 용어인 ‘transzendental’과 ‘a priori’를 어떻게 번역할지를 두고는 학회 내에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각각 ‘선험적’, ‘선천적’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쪽과 ‘선험론적’, ‘선험적’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쪽이 팽팽히 맞서, 결정을 내리기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용어만 두고 두 차례의 학술대회에서 발표와 토론을 벌이고, 용어조정위원회에서 오랜 기간 조정 작업을 거쳤다. 결국 각각을 ‘선험적’, ‘아프리오리’로 번역하기로 결론 내렸다. 이 회장은 “가장 중요한 ‘transzendental’의 번역어를 먼저 정하니, ‘a priori’의 번역어로 마땅한 것이 없어 결국 발음을 그대로 옮기게 됐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로 백 교수가 문제 삼은 것은 한국칸트학회가 번역의 주체를 맡았다는 점 자체였다. 백 교수는 글에서 “독일을 비롯하여 각국에서 칸트 전집이 원전으로든 번역서로든 편찬되어 나오고 있지만, 적어도 문명국가에서는 ‘학회’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한국칸트학회’를 제외하고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번역에는 불가피하게 원전에 대한 해석이 수반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학설을 포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백 교수는 “‘학회’가 아니라, 임의의 연구자나 의견을 함께하는 연구자들의 모임, 또는 특정 출판사나 뜻 있는 연구소가 주체가 되어 ‘전집’을 펴내야만, 그 ‘전집’에 대해서 학회 회원 누구나 등거리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이충진 회장은 “학회에서 학자들끼리 나눠서 전집을 번역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용어를 통일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 전집 안에서 같은 용어가 다르게 번역될 수는 없지 않나. 그마저도 반드시 따라야 하는 필수 용어는 몇 개만 정해놓았고, 정 따르지 못하겠다는 경우엔 역주를 붙여서 설명하도록 했다. 앞으로 다른 칸트 번역서에서 학회 전집에서 사용한 번역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강제할 수도 없고 그럴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매뉴얼 칸트의 초상화. 위키미디어 커먼스
이매뉴얼 칸트의 초상화. 위키미디어 커먼스
특히, 한국칸트학회의 전집을 출간한 한길사 쪽에서 ‘정본’, 한국칸트학회에서는 ‘공인’이란 표현을 써서 논란을 키운 면이 있다. 백 교수는 글에서 “‘정본’이라는 것은 번역서가 아닌 ‘원저’에 대해서만 쓸 수 있는 말이다. 번역은 일종의 복제품인데, 복제품 중 하나가 ‘정본’이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백 교수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공인’이라는 말을 쓰면 공인받은 것은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인정을 못 받은 것이라는 말인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이 또 있겠나. 게다가 인정이라는 것은 제3자가 해주는 일인데, 자기가 한 번역을 자기가 인정하겠다는 것도 우스운 꼴이지 않나. 이런 표현들은 순전히 상업적인 목적으로 쓴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에 이충진 회장은 “공적인 학회에서 기획해서 번역도 모두 했다는 의미에서 공인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지 다른 번역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번 논쟁이 촉발된 이유 중 하나는 한국칸트학회에서 백 교수의 번역본을 두고 ‘가독성’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4일 기자회견에서 이충진 회장은 “(많이 읽히는) 백종현 서울대 교수 번역본은 가독성 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건 칸트 연구자들은 모두가 하는 이야기다. 이번 전집은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도 읽을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였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앞서 백 교수는 지난 2002년부터 아카넷 출판사에서 칸트의 3대 비판서 등 10종 11권을 번역해오고 있고, 지난 2014년에는 이를 칸트 전집 번역 작업으로 확대한 바 있다. 백 교수는 학회 번역에 참여하지 않은 5명가량의 후배 학자들과 함께 전체 24권 분량으로 향후 10년간 전집을 완간한다는 계획이다. 백 교수는 통화에서 “내 번역의 핵심은 원전의 글과 얼마나 부합하냐이다. 내 번역은 완전 직역이다. 대역본을 보듯이 완전하게 대조가 되게끔 독일어의 어문구조와 한국말의 어문구조가 다르지만 원문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이충진 회장은 “백 교수님 번역본이 가독성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번역본의 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가독성에 문제가 있다고 학문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결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서울 중구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린 한국칸트학회의 칸트 전집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번역에 참가한 학회 회원들이 전집 번역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한길사 제공
지난 4일 서울 중구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린 한국칸트학회의 칸트 전집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번역에 참가한 학회 회원들이 전집 번역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한길사 제공
이번엔 백 교수가 학회 번역의 질을 문제 삼으며 반격에 나섰다. 한국칸트학회의 칸트 전집은 사업 시작부터 종료까지 5~6년이 걸렸지만, 번역단 구성과 번역어 조정 작업, 해제와 역주 작업 등으로 인해 순수하게 번역에 들어간 기간은 평균적으로 3년에 그친다. 백 교수는 통화에서 “학술번역이 통역이 아닌 한에 전집 번역은 3년 안에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번역한 책의 논문도 한 편 안 써본 학자가 참여했을 가능성도 크다”고 의구심을 표했다. 또한 “학회 전집에는 34명이나 되는 사람이 번역에 참여해서 책마다 번역자가 다르고, 한 책을 서너명이 나눠 번역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번역자 중엔 중량감이 100㎏인 사람과 5㎏인 사람이 섞여 있어 실력이 들쭉날쭉한데 어떻게 제대로 된 전집이라고 할 수 있겠나. 국외에선 그 저작을 가장 정통으로 연구를 한 사람에게 번역을 맡기기 때문에, 영국 케임브리지판 같은 경우 완간에 20년이 넘게 걸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이충진 회장은 “5년 전에 내가 혼자 번역했던 텍스트를 이번에 다시 번역하면서 20년이나 어린 젊은 학자와 법철학을 전공한 법학자에게 검토를 받았다. 여러 사람이 같이 번역을 하고 서로의 번역을 평가하는 과정을 통해 많이 배웠고, 번역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백종현 교수는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외국(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칸트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90년 한국칸트학회 결성 당시 주도적 역할과 함께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도 학회 고문으로 있다. 그는 통화에서 “내가 학회 고문인데도 학회에선 번역에 참여하지 않은 회원들을 불러서 설명하고 평가를 구하는 과정을 거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학회에서 어떻게 공인한다는 말을 쓰나”라고 말했다.

이에 이충진 회장은 “학계에서 논쟁이 많이 벌어지는 것이 좋다. 예전에 이기상 교수가 ‘우리말로 철학하기’란 시도를 해왔는데 요즘 철학계에선 기운이 빠져 있어서 그런 중요한 작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성균관대 대학원에 다닐 때 백 교수의 수업을 듣고 칸트로 전공을 바꾼 사람이다. 백 교수는 사실 제 마음속의 은사와 같은 분이다. 백 교수는 전례를 찾기 힘든 작업을 해온 분으로 존경한다. 같이 번역을 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라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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