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대계’라 불릴 정도로 학문은 한 국가의 밑돌이다. 그러나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한 정책, 곧 ‘학술정책’은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과제로 대우받지 못했다. 특히 인문·사회 분야는 효율성을 강조하는 시장과 발전주의에 경도된 국가 모두로부터 외면당해왔다. <한겨레>는 올해 개원 40년을 맞은 한국학중앙연구원과 함께 학술정책의 새틀짜기를 위한 진단과 제언을 4차례 연재한다.
‘에이치케이’(HK·인문한국)는 지난 10년 동안 우리에게 꽤 친숙한 말이 됐다. ‘에이치케이 교수’ 또는 ‘에이치케이 연구교수’라는 직함을 단 인문·사회 분야 학자들이 활발하게 책과 논문을 펴내고, 이들이 소속된 대학 연구소들이 다양한 학술행사를 조직해온 덕이다. 2007년 “대학 내 인문학 연구소 집중 육성을 통한 인문학 연구 인프라 구축 및 세계적 수준의 인문학 연구 성과 창출”을 목표로 걸고 시작한 ‘인문한국’ 지원사업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문·사회 분야 학술 지원 체계로 꼽힌다. 지난해 7월 기준으로, 전체 43개 인문한국 연구소가 연구소당 평균 10억원가량을 지원받았다.
대학 구조조정과 학과 통폐합 등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우려가 날로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국가가 인문·사회 분야에 이렇게 대규모의 장기적인 투자를 해왔다는 건 학술지원정책의 선진화를 보여주는 선례가 될 수 있을까? 학계에선 이와 정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인문한국 지원사업의 현재 모습은 ‘제대로 된 학술정책’이 없는 우리나라의 고질적 문제를 보여주는 창”이라는 것이다. 2007년 인문한국 지원사업을 가장 먼저 시작했던 16개 사업단이 지난해 처음으로 10년 사업을 끝냈고, 앞으로 사업단별로 순차적으로 1기 사업이 종료될 예정이다. 지난 10년 동안 착실하게 싹을 뿌렸다면 앞으로 성과를 키워내고 수확할 일만 남았을 터인데, 이처럼 비관적인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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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들 “HK 교수 고용 안정” 약속 외면
HK사업 16곳 등 43곳 순차 종료
싹틔운 인문학 열매 거둬야 하지만
연구소 올스톱… HK교수 설자리 잃어
10년 쌓은 학문적 네트워크 무너질 판
1기 사업에 참여했던 한 사립대 연구소 소속 ‘인문한국 교수’ ㄱ은 “지난해 10년 동안의 국가 지원이 끝난 뒤 연구소 활동은 사실상 ‘올스톱’ 된 상태이며, 대학은 연구를 전담해야 할 ‘인문한국 교수’들을 학과에 배치하거나 교양과목 강의 인력으로 써먹는 등 연구 활성화라는 인문한국 지원사업의 애초 취지를 거스르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사립대의 ‘인문한국 교수’인 ㄴ은 “‘인문한국 교수’는 대학 사회에서 ‘뭔가 부족한 사람’ 취급을 받아왔는데, 국가 지원 종료 뒤 그 처지가 더 애매해졌다. 대학은 일반 전임 교수들과 동일하게 강의를 맡고 논문을 써내라고 하는 한편, 보수에는 차이를 두겠다고 하는 식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인문한국 교수들도 연구소에 남기보다는 차라리 학과에 배속되길 원한다”고 말했다.
흔히 인문학 진흥의 열쇠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문한국 지원사업의 핵심은, 연구소 소속 전임 연구인력(‘인문한국 교수’)의 인건비를 국가가 10년 동안 지원하고 그 뒤엔 대학이 이를 승계하도록 하는 것이다. 기존 학과 중심에서 벗어나 연구소 중심으로 새로운 학문 주체를 만들자는 것이 인문한국 지원사업의 주된 목표였기 때문이다. 한국연구재단에서 만든 ‘인문한국지원사업관리운영지침’은 대학이 ‘인문한국 교수’를 연구소 소속의 전임교원으로 채용하도록 명시했다. 그러나 국가 지원이 끝나자 대학들이 연구소 중심의 인력 운용에서 슬그머니 손을 놓고, 그 결과 연구소를 떠받쳐야 할 ‘인문한국 교수’들이 대학 내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를 두고 한 인문학자는 “공공성을 저버린 대학이 관료의 행정중심주의 아래에서 잇속만 차리는 모양새”라고 일침을 날렸다.
국공립대의 경우 문제가 덜할 것 같지만, 더욱 심각하다. 나라에서 부여하는 교육공무원의 정원을 임의로 늘릴 수 없다는 걸 핑계로 삼아 대학들이 ‘인문한국 교수’들의 전임 채용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려 들기 때문이다. 전임교원 채용을 보장했던 ‘인문한국 교수’에 대한 처우가 이럴진대, 그런 조건마저 없는 ‘인문한국 연구교수’는 아예 연구소 내에 남아 있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연구재단은 지난해 6월 기준으로 인문한국 지원사업으로 인문한국 교수 229명, 인문한국 연구교수 193명 등 전체 422명의 전임 연구인력을 확보했다고 집계했으나, 국가 지원이 끝난 뒤의 현황은 파악조차 어렵다. <한겨레>는 “1기 사업 종료 뒤 각 대학별 ‘인문한국 교수’들의 소속과 구체적인 처우가 어떤지” 연구재단에 질의했지만, “사업이 종료됐기 때문에 각 대학별 현황을 따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회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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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쌓은 학문적 네트워크도 사라질 위기
인문한국플러스 2기 새로 선정
1기 배제했다 선별 지원 선회
황무지 버려지는 게 결말이라면
2기 미래도 학술정책 미래도 없어
이것은 단지 ‘인문한국 교수’의 잘못된 처우를 바로잡는 문제를 뛰어넘는다. ㄱ은 “1기 사업 종료 뒤 그동안 쌓아온 연구 역량을 향후 어떻게 발전시켜나갈 것인지, 대학이든 연구재단이든 교육부든 그 어디에서도 관련 논의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ㄴ은 “대학 본부에서는 연구소 쪽에 ‘자립 방안’을 만들어내라고 독촉하는데, 인문학 연구소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자립할 수 있는 것인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인문한국 지원사업에 참여했던 한 연구소장은 “연구소 주도로 지난 10년 동안 국제적인 학문 네트워크에 진출했는데, 국가 지원이 끝난 뒤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답답함을 호소했다. 요약하자면 우리 사회는 인문·사회 분야에 무려 10년 동안 1500억원이 넘는 돈(사업 종료된 16개 사업단)을 투자하고도, 그 결과물을 제대로 활용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교육부와 연구재단은 인문한국 지원의 2기 사업으로 ‘인문한국플러스’(HK+) 사업을 시작했다. ‘기회를 골고루 나눠야 한다’는 논리를 앞세워 1기에 참여하지 않았던 연구소들을 새로 선정해 지원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에 대해 “1기 사업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이 없다”는 반발이 일자, 이미 참여했던 연구소들에는 심사를 통해 연간 3억원가량의 운영비를 지원하기로 뒤늦게 결정했다. 인문한국 지원사업에 참여하는 연구소들의 모임 ‘인문한국연구소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성민 건국대 교수는 “인문한국은 ‘향후 100년을 바라보자’는 취지의 장기적인 비전에 기반한 사업이다. 10년 동안 국가 지원을 받고 마는 게 아니라, 연구소 중심의 연구 역량이 장기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엄정한 평가에 따른 계속 지원이 필요하다. 교육부에서도 학계의 이런 목소리에 공감했기 때문에 ‘인문한국플러스’에 ‘2유형’ 사업을 만든 것이며, 앞으로 이를 더 안정화시키고 확대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 지원이 끝난 뒤 아무도 돌보지 않는 황무지로 버려지는 것이 1기 인문한국 지원사업의 결말이라면, ‘인문한국플러스’ 사업의 미래도, 그 어떤 ‘학술정책’의 미래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큰 그림 없는 학술정책…‘인문한국’ 난맥상 단면
지난해 8월 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국정운영 5개년 계획)를 발표했다. 여기에 ‘학술’이란 말은 단 한 차례 등장할 뿐이다. ‘남북교류 활성화를 통한 남북관계 발전’ 과제 아래 “학술·역사·언어·교육·문화유산 등 사회문화 교류협력을 확대하고 제도화한다”는 서술에서다. 실제로 학술과 연관 있는 과제는 ‘고등교육의 질 제고 및 평생·직업교육 혁신’ 정도다. 그러나 이 역시 ‘학술정책’을 전반적으로 다룬다기보다 ‘대학정책’에 더 가까우며, “거점 국립대 육성 등으로 대학의 공공성과 경쟁력을 강화한다” 등 추상적인 서술에 머물고 있다. 이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는 “우리 사회의 장기적 기틀을 마련해야 할 ‘촛불정부’마저 학문·학술 등 국가의 ‘백년대계’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부족하다”는 우려가 나온다.
인문한국 지원사업이 겪고 있는 난맥상은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학술정책 부재’가 가져온 문제의 한 단락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학술정책, 특히 ‘큰 밑그림’을 그리는 정책이 없다는 비판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식민 지배와 분단을 거치면서 과거 학문 체계의 전통이 끊어졌고, 그 뒤로는 서구의 학문 체계에 종속되는 경향을 보여왔다. 과거 정치권력들은 학문을 전체주의적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에만 급급했을 뿐, 학술과 학문에 사회적 위상을 부여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이공계열의 경우 ‘발전주의적 국가 전략’과 결합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인문·사회 분야는 그렇지도 못했다.
과거 학자들은 우리나라 인문·사회 분야 학술정책의 현실을 잘 표현하는 말로 ‘학진(학술진흥재단) 시스템’이란 말을 꼽곤 했다. 지금은 한국연구재단으로 통합됐지만, 한국학술진흥재단은 1990년대 말 국가가 인문·사회 분야 학자들에게 연구비를 나눠주는 체계를 처음으로 도입했고 이 체계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 쓰는 ‘학진 시스템’이란 말 속에는 “학문적 성취와 무관하게 학진이 제시하는 기준에 잘 적응하는 학자가 나라로부터 연구비를 받아낼 수 있다”는 자조적인 시각이 섞여 있다. 학진에서 관련 사업의 설계에 깊이 간여했던 한 인문학자는 “전문 관료도 아닌, 학술 분야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일반 관료가 학술정책의 큰 그림을 좌우하는 시스템이 20년 넘게 지속되어온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안병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은 “조선 시대 세종과 정조는 각각 집현전과 규장각이라는 기관을 통해 학술정책과 문화정책에 온 힘을 기울였기 때문에 당대와 후대 모두에 위대한 왕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다. ‘촛불정부’인 문재인 정부의 최우선 과제 역시 학술, 특히 인문·사회 분야에서 큰 밑그림을 그리고 대대적인 투자에 나서 국가의 나아갈 방향을 닦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