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한국학술번역 ‘현주소’ 보여준 칸트 전집

등록 2018-06-07 19:55수정 2018-06-09 14:37

한국칸트학회 기획 칸트 전집 출간
번역어 통일·초역·가독성 성과
짧은 번역기간에 완성도 우려
미번역 서신·강의록·유고 아쉬워

비판기 이전 저작 Ⅱ(1755~1763)
임마누엘 칸트 지음, 김상봉 이남원 김상현 옮김/한길사·3만5000원

학문으로 등장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형이상학을 위한 서설·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
김재호 옮김/한길사·3만2000원

도덕형이상학
이충진 김수배 옮김/한길사·3만5000원

석정 이정직이 1905년 펴낸 <강씨(칸트)철학설대약>으로 이마누엘 칸트가 국내에 소개된 지 113년. 우리는 언제쯤이면 우리말로 번역해 완결된 칸트의 전집을 가질 수 있을까? 이번에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해 번역해내는 칸트 전집으로 ‘완간된 칸트 전집’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한국칸트학회가 주도해 천차만별이었던 번역어를 통일하고, 상당수 저작이 초역이며, 가독성을 개선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은 작업이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에 걸맞지 않게 급박하게 진행된 번역은 한국 학술번역의 한계를 그대로 노정했다.

칸트 전집은 한국칸트학회가 기획하고 한길사가 최근 1차분 3권을 출간해, 내년 가을까지 모두 16권을 완간하는 대기획이다. 학회 소속 학자 34명이 대거 번역에 참여해 5~6년 동안 번역과 두 차례에 걸친 심사, 해제·역주 작업을 거쳐 순차적으로 결과물이 나오고 있다. <비판기 이전 저작>(전 3권)은 95% 이상,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원리>, <논리학>, <서한집>, <윤리학 강의>는 모두 국내 초역이다. 지난 4일 서울 중구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충진 한국칸트학회 회장(한성대 교양학부 교수)은 “이번 전집은 한국칸트학회에서 공인하는 번역서다. 앞으로 나올 다른 번역들은 이 전집을 기준으로 해서 더 잘된 것인지 못된 것인지 평가받을 것”이라며 전집 출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번 전집 작업은 학회가 중심이 돼서 번역 원칙과 번역어를 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학회에선 지난 2014~2015년 모두 네 차례의 학술대회를 열어 번역 원칙과 용어를 통일했다. 특히 칸트 철학의 기본 용어인 ‘transzendental’과 ‘a priori’를 어떻게 번역할지를 두고는 뜨거운 토론이 벌어졌다. 각각 ‘선험적’, ‘선천적’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쪽과 ‘선험론적’, ‘선험적’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쪽이 팽팽히 맞서, 결정을 내리기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용어만 두고 두 차례의 학술대회에서 발표와 토론을 벌이고, 용어조정위원회에서 오랜 기간 조정 작업을 거쳤다. 결국 각각을 ‘선험적’, ‘아프리오리’로 번역하기로 결론 내렸다. 칸트 전집 5권을 번역한 김재호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는 “칸트 철학에서 사용한 ‘transzendental’ 같은 용어는 이후 헤겔, 셸링, 후설, 하이데거가 이어받아 사용했는데, 번역어가 통일되지 않아 그동안 다른 학회에서도 혼란이 많았다. 한국칸트학회에서 번역어를 정함으로써 통일된 용어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4일 서울 중구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린 칸트 전집 1차분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번역에 참여한 칸트학회 회원 학자들이 전집 발간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한길사 제공
4일 서울 중구 복합문화공간 순화동천에서 열린 칸트 전집 1차분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번역에 참여한 칸트학회 회원 학자들이 전집 발간의 취지를 설명하고 있다. 한길사 제공

가독성이 떨어졌던 이전 번역본들의 문제점도 상당 부분 개선했다. 이충진 회장은 “(많이 읽히는) 백종현 서울대 교수 번역본은 가독성 면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이건 칸트 연구자들은 모두가 하는 이야기다. 이번 전집은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도 읽을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였다”라고 말했다.

반면, 이번 전집을 ‘결정판’으로 부르기엔 주저되는 면도 없지 않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출간한 15권짜리 칸트 전집은 출간연도로만 따져도 1992년부터 2012년까지 최소 20년에 걸쳐 발간됐다. 이에 비춰 기획부터 출간까지 6년 만에 모두 마친 한국의 칸트 전집이 완성도를 담보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 나온다. 핵심 저작인 <순수이성비판>은 4명, <판단력비판>은 3명이 나눠서 번역하는 등 학문적 깊이가 다른 번역자 34명이 나눠 맡은 번역의 질이 과연 일정하게 유지되었는지를 두고도 학계에선 의문을 표시한다. 또한 ‘칸트 생전에 출간된 저작을 모두 번역한다’는 점에서 전집 번역이라고 명명했지만, 이 기준에 해당하는 <자연지리학>은 시간 내에 마땅한 번역자를 찾지 못해 출간하지 못했다. 한국칸트학회 학술대회에서도 중요성을 강조한 편지와 강의 필기록은 3분의 1 정도만 선별적으로 번역됐고, 유고는 모두 빠졌다. 이에 전집 간행 사업 책임연구자인 최소인 영남대 철학과 교수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앞으로 <자연지리학>과 중요한 강의록과 유고들은 번역해서 전집에 포함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이마누엘 칸트가 살았던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지금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 세워진 이마누엘 칸트의 동상. 출처 위키미디어
이마누엘 칸트가 살았던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 지금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 세워진 이마누엘 칸트의 동상. 출처 위키미디어

학회가 이처럼 급박하게 번역을 진행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정부가 사업 기간을 못 박았기 때문이다. 한국연구재단이 토대연구지원 사업으로 선정해 6억원을 지원하는 대신 3년 안에 번역을 마치고, 사업 종료 2년 이내에 출간하라는 기간을 정해놨다. 이 기간을 넘기면 전임·공동연구자 6명은 연구재단의 다른 사업에 지원하지 못하는 일종의 ‘제재’를 받기 때문에, 일단 1차분 발간으로 겨우 일정을 맞춘 것이다.

지난해 11월부터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으로 일하는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정부가 번역만이 아니라 연구 과제 등 모든 재단 사업에서 기간을 제한하고 이에 맞추지 못하면 제약을 주는 것은 관료주의적 발상 때문이다. 교육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료들은 일정 기간 내에 결과가 나와야 성과를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구재단 쪽에서 중간평가로도 번역과 연구의 질을 담보할 수 있다고 사업 기간을 늘리자고 제안해오고 있지만 잘 먹히질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박 본부장은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학계가 칸트 전집을 완벽하게 번역을 해낼 정도의 연구자들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느냐는 문제가 있다. 정부와 대학이 제대로 지원을 하지 않는 열악한 상황에서 온전한 번역을 기대하는 것부터가 무리”라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바로잡습니다.

최초 보도한 기사에서 한길사에서 밝힌 바에 따라 “석정 이정직이 1905년 펴낸 <강씨(칸트)철학설대약>으로 이마누엘 칸트가 국내에 소개된 지 113년 만에 우리말로 번역된 칸트 전집이 나왔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기사 보도 이후 아카넷 출판사에서 대우고전총서로 2002년부터 출간한 백종현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칸트 주요 번역서를 확대해 2014년부터 ‘한국어 칸트전집’을 출간해오고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이에 바로잡습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1.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소방관’ 곽경택 감독 호소 “동생의 투표 불참, 나도 실망했다” 2.

‘소방관’ 곽경택 감독 호소 “동생의 투표 불참, 나도 실망했다”

이승환, 13일 윤석열 탄핵 집회 무대 선다…“개런티 필요 없다” 3.

이승환, 13일 윤석열 탄핵 집회 무대 선다…“개런티 필요 없다”

탄핵 집회에 힘 싣는 이 음악…‘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4.

탄핵 집회에 힘 싣는 이 음악…‘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탄핵 힘 보태는 스타들…“정치 얘기 어때서? 나도 시민” 소신 발언 5.

탄핵 힘 보태는 스타들…“정치 얘기 어때서? 나도 시민” 소신 발언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