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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누구에게나 숨 쉴 구멍은 필요하다

등록 2018-06-07 19:53수정 2018-06-07 20:44

섬세한 시선과 유려한 문장으로
시골 농장 생활 그려내며
자연에서 얻은 위로와 깨달음 전한
‘뉴욕타임스’ 장기 연재 칼럼 모아

단순하지만 충만한, 나의 전원생활
벌린 클링켄보그 글·나이젤 피크 그림, 황근하 옮김/목수책방·2만2000원

전원에서 쓴 편지-덕암농장 이야기
최병욱 지음/산인·1만7000원

번잡한 도로와 빌딩숲을 떠나 자연 속에 파묻혀 쉼을 얻기를 고대하지 않고 살아가는 도시인들이 있을까. 현대 도시인들이 마음 속으로만 그리는 삶을 포착해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데 가장 능한 나영석 프로듀서가 ‘자발적 고립 다큐멘터리'인 <숲 속의 작은 집>(tvN)을 기획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전세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대형 사건과 고통스런 이야기를 매 지면 눌러담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일간지 <뉴욕 타임스>. 이 신문 한켠에 ‘전원생활’이라는 꼭지의 연재 칼럼이 16년이란 긴 기간 동안 이어져왔던 것은 아마도 누구에게나 치열한 세상살이 속에서 잠시 숨 쉴 구멍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전원생활’ 칼럼을 맡아 글을 써온 이는 미국의 문필가 벌린 클링켄보그(66)다. 작가로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문예창작을 가르치다가, 1997년부터 2013년까지 <뉴욕 타임스>의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매주 또는 격주꼴로 신문에 그의 글이 실렸는데, 커트 보니것이나 존 레논 같은 이들의 인물론이나 유전자변형작물(GMO)에 대한 시사평론 등 매우 다양한 글을 썼다. 하지만 그의 전매특허는 역시 ‘전원생활'이었다. 이번에 국내에 출간된 <단순하지만 충만한, 나의 전원생활>은 그가 ‘전원생활'에 쓴 글 173편을 선별해 담은 책이다.

<단순하지만 충만한, 나의 전원생활>은 미국의 문필가 벌린 클링켄보그가 <뉴욕 타임스>에 연재한 ‘전원생활’ 칼럼을 가려 묶은 책이다. 목수책방 제공
<단순하지만 충만한, 나의 전원생활>은 미국의 문필가 벌린 클링켄보그가 <뉴욕 타임스>에 연재한 ‘전원생활’ 칼럼을 가려 묶은 책이다. 목수책방 제공
그의 집은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한 시골에 있는 작은 농장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집으로 파견 나온 특파원처럼 농장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변화와 가축과 야생동물들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그가 보내온 ‘르포’나 ‘사건 기사’의 대상은 키우는 말·돼지·닭·오리의 삶과 죽음, 봄이 가까워 옴을 알리는 새들의 소리, 100년된 주엽나무가 쓰러진 이야기 등과 같은 사소한 일상들이다. 유심히 귀를 기울이고, 오래 들여다봐야 간신히 보이는 자연의 속삭임과 흔들림들을 밀도 있는 문장으로 담아낸 글을 읽다보면, 그가 어떻게 깐깐하게 필자를 선별하기로 유명한 <뉴욕 타임스>에서 장기간 연재를 이어올 수 있었는지 느끼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일. “며칠 전 아침이었다. 헛간 바닥에 느슨하게 쌓여 있던 건초 더미에서 건초 한 뭉치를 들어 올렸는데, 거기서 여우가 한 마리 뛰쳐나왔다.” 보통 여우들은 인간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여우가 인간의 생활공간에 들어오는 건 닭을 훔쳐 곧바로 달아나려고 할 때 정도뿐. 그런데도 이 여우가 굳이 헛간에 숨어들어 비가 세차게 퍼붓는 밤을 피한 것은 진드기 피부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이를 정도로 너무나 쇠약해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녀석과 나는 1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녀석이 만일 개였다면 도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눈 속에 가득한 동정심을 보고도 녀석은 너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가 자연을 들여다보는 섬세한 시선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맨얼굴에 닿는다. “자연은 아무런 토도 달지 않는다. 경제가 무너져도, 정치가 부패해도, 혹여 개인적 슬픔이 찾아와도 자연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나 이 농장의 다른 생물들은, 이 놀랄 만치 긴장된 인간의 계절에 내가 얼마나 사로잡혀 있는지를 상기시켜준다. 겁먹은 채 사로잡힌 그 느낌, 무언가 근본적인 것을 잊어버렸다는 느낌에서 나는 날카로운 부끄러움을 느낀다.” 책을 덮고 나니, 지금 당장 전원 생활을 꾸릴 수는 없겠지만 가까이 있는 산이나 바다, 강을 찾아 거기에 있는 것들을 오래 들여다보고 짧게라도 글을 써보는 걸로 조금씩 시작해보고 싶다는 기분 좋은 갈망이 인다.

<전원에서 쓴 편지>는 최병욱 인하대 사학과 교수가 2005~2007년 충남 아산 덕암리에 있는 자신의 농장을 가꾸어 온 전원생활을 적은 일기를 가려 모은 책이다. 종손인 아버지의 명의로 된 종중의 수천평 전답을 놀릴 수가 없어 장남인 그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그만 농사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농부로 새로 정하고, 3무(비닐, 제초제, 농약) 농법에 ‘잡초가 작물을 키우는’ 잡초농법을 사용해 소출은 적지만 건강한 먹거리를 수확하고 있다. 2008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으로 기록이 중단되어, 초기 3년의 기록만 남았지만 농사 일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매년 별 다를 것 없어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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