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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도덕의 진보는 종교 아닌 과학과 이성의 힘”

등록 2018-06-07 18:56수정 2018-06-07 19:19

미 과학 저널리스트 마이클 셔머
‘감응적 존재’ 인간의 도덕 발전론
“고문·노예제 폐지, 민주·인권 확대는
과학혁명과 이성적 도덕률 덕분”

도덕의 궤적-과학과 이성은 어떻게 인류를 진리, 자유, 정의로 이끌었는가
마이클 셔머 지음, 김명주 옮김/바다출판사·4만8000원

“인류는 과학과 이성을 통해 도덕적으로 진보해왔으며, 앞으로 더 진보하게 될 것이다.”

미국의 과학 저널리스트인 마이클 셔머가 <도덕의 궤적>에 담은 핵심 주장이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과학과 이성이 어떻게 인류를 진리, 자유, 정의로 이끌었는가”(부제)를 다양한 사례와 문헌, 통계 분석 등 ‘과학적 방법론’으로 논증한다. 그가 보기에 “(지금)인류는 종의 역사에서 가장 도덕적인 시기를 살고 있다.” 얼른 와닿지 않는다. 세상엔 전쟁과 테러, 빈부 양극화와 온갖 범죄 소식이 끊이지 않고, 어느 때보다 인간애와 영성이 절실하다는데….

지은이가 “삶의 많은 분야에서 확인”하는 “도덕적 진보의 증거”는 거시적이고 통시적이다. 민주주의의 부상과 신권·전제정치의 쇠락, 재산권 확대, 행복추구권과 소수자 보호를 포함한 폭넓은 권리 보장, 동물권 옹호, 역사상 최고 번영과 최저 빈곤율, 건강과 장수, 노예제 금지, 살인율 급감, 고문·사형 폐지의 보편화…. 지은이의 관심은 이런 성취의 원동력이 어디에서 비롯했는가에 있다.

19세기 영국의 선교사이자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으로 붙잡힌 원주민들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모습을 스케치한 그림.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등 주요 종교는 노예제에 함구하거나 옹호했으며, 노예제 폐지 운동은 근대의 합리적 이성과 계몽주의 시대 이후 본격화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19세기 영국의 선교사이자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에서 노예사냥으로 붙잡힌 원주민들이 쇠사슬에 묶여 끌려가는 모습을 스케치한 그림.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등 주요 종교는 노예제에 함구하거나 옹호했으며, 노예제 폐지 운동은 근대의 합리적 이성과 계몽주의 시대 이후 본격화했다. 출처 위키피디아

셔머는 “과거 몇 세기의 도덕적 발전은 대부분 종교적 힘이 아니라 세속적 힘의 결과”라고 말한다. “근대 이후 과학은 종교의 인과론이 허위임을 폭로했고, 미신적인 생각들을 허물어뜨렸”으며 “불과 100여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의 중심에는 과학과 이성, 합리적 세계관이 있었다.” 예컨대,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없는 시대에 횡행한 ‘마녀 재판’에서 유·무죄를 가리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혹독한 고문이었다. ‘마법’에 대한 미신이 사라진 것은 “17세기 과학혁명과 철학혁명을 일으킨 일련의 지적 변화들이 지식인의 사고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뒤였다. 인간에 대한 최악의 학대와 착취인 노예제도는 종교의 시대에도 당연시됐을 뿐 아니라 권장되기까지 했으며,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등장한 것은 이성과 계몽의 시대 이후”였다.

지은이는 기독교의 최고 도덕률인 ‘십계명’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과학과 이성에 기반한 도덕 체계의 관점에서 재구성”한 현대판 십계명을 제시하기도 한다. 3000년 전에 쓰인 이 계율은 오늘날 헌법(종교·표현·양심의 자유)과 법률(연좌제 금지)에 위배되거나 개인의 자유권과 선택권을 심각하게 제약하며, 구약의 다른 대목들과 모순된다는 것. 따라서 “십계명은 현대인과 무관하거나 현대인이 지킬 경우 부도덕한 사람이 된다.” 이쯤 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이 실재한다면 지옥행 급행열차의 맨 앞칸 티켓은 지은이의 차지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책을 더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셔머는 “과학은 그 방법들과 결론을 바꾸고, 개선하고, 업데이트하면서 발전한다. 도덕과학도 그래야 한다”며 ‘이성적인 십계명’ 원리를 제시한다. 호혜적 이타주의, 상대에게 먼저 물어보기, 책임과 용서, 타인 방어, 도덕권 확장, 생명 애호 등이 그 일부다.

1571년 네덜란드에서 마법을 행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 기소된 안네킨 헨드릭스가 화형을 당하는 모습의 그림. 마녀 재판에서 피고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혹독한 고문은 17세기 과학혁명으로 마법에 대한 미신이 걷힌 뒤에야 사라졌다. 바다출판사 제공
1571년 네덜란드에서 마법을 행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에 기소된 안네킨 헨드릭스가 화형을 당하는 모습의 그림. 마녀 재판에서 피고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혹독한 고문은 17세기 과학혁명으로 마법에 대한 미신이 걷힌 뒤에야 사라졌다. 바다출판사 제공

셔머의 이력을 보면 그는 이런 책을 쓰기에 적임자다. 대학에서 기독교신학을 공부하다가 진로를 바꿨다. 실험심리학(석사)과 과학사(박사)로 학위를 딴 뒤 창조론과 사이비 종교학에 맞서 대학과 강연회에서 활발한 과학 강연 및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2015년부터 한국어판이 나오고 있는 교양과학 계간지 <스켑틱>의 창간자이기도 하다. ‘스켑틱’(sceptic)은 신비주의·심령술 등을 포함한 유사종교나 과학적 방법론이 결여된 유사과학에 비판적인 ‘(과학적) 회의주의자’를 뜻한다.

760여쪽의 만만치 않은 분량이지만, 세계사의 익숙한 풍경과 영화, 뉴스 등 구체적 이야기들로 딱딱함을 덜고 읽는 맛은 보탰다. 베트남전을 다룬 미국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년)에는 칼에 베여 어깨뼈가 훤히 드러난 채 머리만 붙어 있는 물소가 나온다. 촬영을 위해 실제로 물소를 칼로 벴다. 그러나 2011년에 나온 미국 영화 <워 호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400만 마리의 말을 스크린에 등장시켰지만 한 마리의 말도 죽이지 않았다. 컴퓨터그래픽과 편집기술 덕분이다.

그렇다고 지은이가 종교에 대한 과학의 최종 승리를 선언하거나, 이성을 차갑고 정교한 컴퓨터로 여기는 건 아니다. 셔머는 프롤로그에서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2014년, 사이언스북스)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비인간적 행위는 오랫동안 도덕적 교화의 주제였다. (…) 우리는 ‘왜 전쟁이 일어나는가’라는 물음 대신 ‘왜 평화가 존재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우리가 잘한 일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며,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지은이가 “도덕적 행위자는 감응적 존재”라고 밝힌 것에도 주목하자. 이때 ‘감응적’이란 “감정, 지각, 감각, 반응, 의식이 있어서 느끼고 고통 받을 수 있음”을 뜻한다.

이 대목에서, 미국의 인지신경과학 전문가 마이클 가자니가가 <뇌는 윤리적인가>(개정판 2015년, 바다출판사)에서 언급한 ‘뇌와 자유의지의 관계’를 상기해보는 것도 좋겠다. 가자니가는 인간의 종교적 믿음이나 도덕적 입장은 뇌에서 만들어지지만 사회적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며, 자유라는 것도 사회의 상호작용 안에서 발견된다고 짚었다. “신경과학이 ‘책임’에 대응하는 뇌의 상호관련자를 찾을 수 없”는 이유도 “책임이라는 건 뇌에 부여하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소득 불평등과 월가에 대한 구제금융 제공은 2011~12년 ‘오큐파이(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로 터져나왔다. 그러나 <도덕의 궤적>의 저자 마이클 셔머는 “역사를 돌아보면 산업의 종류가 바뀌면서 자본과 부의 생산도 변했다.(…) 위기에 대응해 적응과 변화를 모색할 수도 있으므로 낙관할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논쟁의 여지는 여전하다. 사진은 저자가 직접 찍었다. 바다출판사 제공
미국의 소득 불평등과 월가에 대한 구제금융 제공은 2011~12년 ‘오큐파이(월가를 점령하라)’ 시위로 터져나왔다. 그러나 <도덕의 궤적>의 저자 마이클 셔머는 “역사를 돌아보면 산업의 종류가 바뀌면서 자본과 부의 생산도 변했다.(…) 위기에 대응해 적응과 변화를 모색할 수도 있으므로 낙관할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논쟁의 여지는 여전하다. 사진은 저자가 직접 찍었다. 바다출판사 제공

셔머는 ‘유토피아’ 대신 ‘프로토피아’를 추구한다. 영어로 ‘프로그레스(progress·진보)+유토피아(utopia)’의 조합어인 프로토피아는 실제로는 어디에도 있지 않은 완벽한 이상향이 아니라 측정할 수 있는 꾸준한 진보가 일어나는 현실의 장소다. 지은이가 책에서 언급한 전쟁 억제, 노예제·고문·사형 등의 폐지, 투표권 확대, 동성결혼 법제화, 동물 보호 등의 사례가 그렇다. 세계가 끊임없이 진보하는 것이라면, 지금 우리는 어디쯤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지은이는 “도덕적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경제·사회적 차원에 따른 문명 진보 유형을 제안”한다. 문명 1.0(원시인류의 이합집산)에서 시작해, 문명 1.4(도시국가와 봉건 왕조), 문명 1.7(선거 민주주의와 공화국), 문명 1.9(민주 자본주의) 등을 약술한 뒤, 현재와 먼 미래까지를 아우르는 문명 2.0(지구촌과 지구문명)을 내다본다. 문명 2.0은 전 지구적 차원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디지털 정보·지식, 모든 사람이 사회적 계약으로 맺어진 민주주의 정치체, 부족·인종 차별의 소멸 등을 포함한다.

최근 200년 새 세계 인구의 빈곤율이 급감한 것은 과학기술 발달과 산업생산력 증대에 힘입은 바 크다. 바다출판사 제공
최근 200년 새 세계 인구의 빈곤율이 급감한 것은 과학기술 발달과 산업생산력 증대에 힘입은 바 크다. 바다출판사 제공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2017)를 비롯해, <과학과 종교>(2017), <다윈 평전>(2009) 등 30여종의 과학책을 우리말로 옮긴 김명주 번역가가 책 마지막에 붙인 말은 지은이의 집필 의도를 명료하게 밝히는 독서 나침반이다. “<도덕의 궤적>은 도덕의 주도권을 놓고 종교와 과학을 맞세우거나 사실에서 당위로 무작정 넘어가는 과학적 환원주의를 추구하는 책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더 나은 방식을 과학과 이성의 도구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바탕으로, 감응적 존재들이 번영을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조건들을 알아내는 도덕과학을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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