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과학전문서점 갈다 개점식에 참여한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갈다’ 간판 위에 있는 사람), 갈다 대표 이명현 천문학자(간판 오른쪽에 기대어 있는 사람), 장대익 서울대 교수(맨 아래 줄 왼쪽 셋째)와 갈다 이사, 주주, 직원들. 사진 원병묵
삼청동 뒷골목에 과학이라는 이상한 나라로 통하는 작은 공간이 생겨났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삼청동 카페 골목에서 살짝 안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한적한 골목길. 하얗고 모던한 외벽을 두른 붉은 벽돌집 한 채가 손님들을 맞이한다.
이 집은 베스트셀러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의 지은이 이근후(83) 이화여대 명예교수(정신과 전문의)가 1979년에 지은 집이다. 일제 때엔 조선총독부 관리가 살던 단층 적산 가옥이 있던 곳이다. 이 명예교수가 2002년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집을 새로 지어 자녀 4가구와 함께 옮겨간 후로, 삼청동 집은 지인이 오랫동안 비폭력대화센터로 운영해왔다.
3년 전 센터가 강남으로 이전하며 집이 비게 되자 이 명예교수는 장남이자 천문학자인 이명현 박사에게 “하고 싶은 일에 쓰라”고 공간을 내줬다. 이명현 박사는 지난 2015년 12월 제주도 출장길에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와 의기투합해 과학 전문 서점과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로 결정했다.
과학자들과 과학 저술가, 출판사 대표 등 110명의 주주를 모아 모두 5억원을 모았다. 이 돈으로 리모델링을 하고, 책을 사고, 직원을 고용했고, 주식회사 ‘갈다’(Galdar)가 탄생했다. 이씨가 대표이사를, 김인호 바다출판사 대표, ‘하리하라’ 이은희 작가, 정지훈 경희사이버대 교수가 이사로 참여했다. 6월 초 정식 오픈에 앞서 지난 27일 연 개점식에는 주주로 참여한 최재천·김범준·김상욱·정인경·김명남·김탁환 등 과학계 안팎의 학자, 작가, 출판계 인사 등 90여명이 서점을 가득 채웠다.
이 대표는 갈다의 탄생을 진화의 원리로 설명했다. “처음부터 전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남은 결과가 진화잖아요. 갈다도 치밀한 계획이 있던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논의를 하다가 현재 여건에서 실현 가능한 것이 모여서 이뤄진 거죠. 이곳을 과학 콘텐츠 생산과 유통의 허브이면서 살롱으로 만들고 싶어요. 혼자서나 다른 데서는 못하는 강연 기획, 전집 번역 출간 같은 걸 하려고 합니다.”
삼청동 주택을 과학전문서점과 문화공간으로 만들어보자고 최초로 아이디어를 모은 장대익 서울대 교수(왼쪽)와 이명현 갈다 대표(오른쪽). 사진 박승호
장대익 교수는 “과학이 문화로 자리 잡는 일에 일조를 해보자는 뜻이 컸다”고 했다. “이 서점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고 프로그램이 돌아가면 10년, 20년 후엔 문화가 만들어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리처드 도킨스 같은 외국 과학자가 방한하면 꼭 들러서 강연하고 교류하는 그런 곳을 만들고 싶습니다.”
‘갈다’는 장 교수가 지은 이름이다. 갈릴레오(Galileo)와 다윈(Darwin)의 앞글자를 따서 ‘세상을 바꾼 과학을 만나는 곳’이란 뜻부터 ‘문화의 터전을 갈다’, ‘지식의 칼날을 갈다’, ‘딱딱한 과학을 부드럽게 갈다’, ‘지식의 판을 갈다’ 등 모두 5가지 뜻을 담았다.
서점엔 특별한 큐레이션을 거쳐 전문가들이 직접 선정한 도서나, 특정 저자의 책 또는 특정 주제의 책들이 진열된다. 그 첫번째로 사이언스북스 출판사와 협업해 칼 세이건 특별전을 꾸렸다. 2층에는 ‘작가의 공간’이란 방을 마련해 주주인 작가들이 상주하며 집필도 하고 방문객들에게 공간을 안내하는 역할도 한다.
갈다의 백미는 일급 강사들이 이끄는 프로그램이다. 6월7일부터는 하리하라와 이지유 작가가 ‘과학책 초보들을 위한 과학책 같이 읽기’를, 10일부터 이명현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끝까지 읽기’ 모임을 시작한다. 오는 가을엔 장 교수가 자신이 번역한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읽는 모임을 꾸릴 예정이다.
갈다의 영역은 삼청동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과학자들이 평범한 시민들과 함께 경남 통영에 내려가 김현정 셰프의 레스토랑 ‘오월’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일러스트레이터 밥장이 연 게스트하우스 ‘믿는구석통영’에서 묵으며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다. 내년에는 칠레로 개기일식을 보러 가는 여행도 계획 중이다. 이 대표는 “록밴드 ‘퀸’의 기타리스트이자 천문학 박사인 브라이언 메이가 조직해 스페인령 카나리아제도 테네리페섬에서 열리는 ‘스타무스’(Starmus) 페스티벌을 본뜬 한국판 천문학 축제도 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개점식에서 만난 이근후 명예교수는 방금 산 <코스모스>를 보여주면서 “나도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완독해볼 참”이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공간이 있으면 먹자골목 일색이던 삼청동에도 문화가 생겨나지 않겠어요?”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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