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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끝까지 들어주겠니…부끄러운 어른들의 잘못을

등록 2018-05-28 05:00수정 2018-05-28 08:03

한·중·일 ‘평화 그림책’ 10년
평화그림책 <꽃할머니> 가운데 나물 캐던 소녀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장면. 애초 초판에서 끌고 가는 남자 2명은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일본어판을 펴내기 전에 꼼꼼한 고증 작업을 거쳐 일반복으로 바꾸었다. 사계절 제공
평화그림책 <꽃할머니> 가운데 나물 캐던 소녀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는 장면. 애초 초판에서 끌고 가는 남자 2명은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일본어판을 펴내기 전에 꼼꼼한 고증 작업을 거쳐 일반복으로 바꾸었다. 사계절 제공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풍부한 신뢰 관계를 쌓고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중국, 한국, 일본 세 나라의 그림책 작가들이 힘을 합쳐서 평화를 위한 그림책을 만들면 어떨까요? 그림책은 아이의 마음을 직접 움직일 수 있는 매체니까요.”

2005년 10월, 하마다 게이코를 비롯한 일본의 그림책 작가 4명이 그림책 <강아지똥>의 정승각 작가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 한 통이 ‘12명의 한·중·일 그림책 작가들이 함께 어린이들에게 평화의 의미와 가치를 전하는 그림책 시리즈를 만들고 이를 공동 출판한다’는, 유례없는 기획의 씨앗이 됐다. 사계절(한국), 도신샤(일본), 이린출판사(중국)가 세 나라에서 공동출판을 맡을 출판사로 결정됐다. 나라를 뛰어넘은 열정이 한데 모아져, 2010년 드디어 일본군 ‘위안부’ 고 심달연 할머니의 사연을 담은 <꽃할머니>(권윤덕 글·그림)가 ‘평화그림책’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세상에 나왔다.(<한겨레> 2010년 6월11일치 고통 품어안고 평화 피운 ‘꽃할머니’ 참조)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첫 작품이 나온 지 8년이나 흘렀지만 ‘평화그림책’ 시리즈는 아직 완간되지 못했다. 애초 기획된 전체 12권 가운데 한국과 일본에서는 11권이, 중국에서는 8권이 출간된 상태다. 평화그림책이 걸어온 험난한 여정에는, 역설적이게도 이 유례없는 기획을 통해 꼭 극복하겠다고 다짐했던 한·중·일 3국 사이 역사적으로 누적된 긴장과 갈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평화그림책 <사쿠라>의 한 장면. 당시 사람들에게 전쟁을 강요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표어를 썼는데, 중국어판은 이 표어들 때문에 출간 허가를 받지 못했다. 사계절 제공
평화그림책 <사쿠라>의 한 장면. 당시 사람들에게 전쟁을 강요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표어를 썼는데, 중국어판은 이 표어들 때문에 출간 허가를 받지 못했다. 사계절 제공
첫 책인 <꽃할머니>는 일본에서 8년 동안 출간되지 못하다가, 지난 4월 출판사가 도신샤(동심사)에서 고로컬러로 바뀌어 간신히 출간됐다. 이 과정에는 ‘위안부’ 당사자의 증언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태도 차이가 있었다. 일본판을 내기 전에 출판사와 작가는 그림책의 토대가 된 심 할머니의 증언을 꼼꼼히 점검했고, “군인에 의해 강제연행됐다”, “대만으로 끌려갔다”, “군영 안에 위안소가 있었다” 등 증언을 뒷받침하는 사실관계가 불충분한 경우 일부 내용을 고치기도 했다. 그런데도 도신샤는 “사실관계의 일치가 여전히 불확실하다. 우익의 공격에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며 출간에 난색을 표했다. 아베 정권 아래 눈에 띄게 우경화한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그 배경이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하기로 결정해, 도신샤의 평화그림책 목록에서는 이 책을 찾아볼 수 없다.

평화그림책 <꽃할머니>에 나오는 일본군 위안소 장면. 애초 위안소 앞뒤 모두에 철조망이 있었으나, “당시 위안소는 군영 내에 있지 않았다”는 고증에 따라 뒤쪽 철조망을 없앴다. 사계절 제공
평화그림책 <꽃할머니>에 나오는 일본군 위안소 장면. 애초 위안소 앞뒤 모두에 철조망이 있었으나, “당시 위안소는 군영 내에 있지 않았다”는 고증에 따라 뒤쪽 철조망을 없앴다. 사계절 제공
평화그림책 <꽃할머니>에서 그려낸 일본군 위안소의 모습. 사계절 제공
평화그림책 <꽃할머니>에서 그려낸 일본군 위안소의 모습. 사계절 제공

국가가 직접 출판을 운영하는 중국에서는 당국의 방침이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2014년 출간된 일본 작가 다바타 세이이치의 <사쿠라>의 경우, 중국 당국이 일본 군국주의 시절을 보여주는 전쟁 표어 등의 표현을 문제 삼아 출간 허가를 받지 못했다. 한국의 <강냉이>(권정생 글, 김환영 그림)와 <춘희는 아기란다>(변기자 글, 정승각 그림)는 2016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배치로 고조된 한-중 갈등 상황에 발이 묶였다. 중국 당국이 비공식적으로 내린 ‘한한령’(한국 콘텐츠 제한 명령)에 걸려 출간이 기약없이 미뤄진 것이다. 시리즈 마지막 권인 중국 저우샹 작가의 <토요일, 맑음>은 아직 중국에서조차 출간이 안 된 상태다. 그림책 속에 실린 지도의 국경선이 정확해야 한다는 이유로 출간 허가를 받지 못한 사례도 있었다.

평화그림책 <평화란 어떤 걸까?>의 한 장면. (평화란) “잘못을 저질렀으면, 곧바로 사과하는 것”이라는 문구가 들어가는데, 작가인 하마다 게이코가 타국의 동료 작가·편집자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넣은 장면이다. 사계절 제공
평화그림책 <평화란 어떤 걸까?>의 한 장면. (평화란) “잘못을 저질렀으면, 곧바로 사과하는 것”이라는 문구가 들어가는데, 작가인 하마다 게이코가 타국의 동료 작가·편집자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넣은 장면이다. 사계절 제공
평화그림책 시리즈의 한국어판 편집자인 김장성 이야기꽃 대표(전 사계절 주간)는 “2007년 난징에서 한·중·일 3국 사람들이 함께 모여 출간을 결의할 때만 해도 10년이 넘게 걸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3~4년 안에 완성될 것’이라는 “낭만적인 생각”이 있었는데, 정작 한·중·일 3국 사람들이 공유하는 콘텐츠를 만들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여러가지 문제들이 시야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위안부’ 당사자 증언에 대한 태도, 사드로 인한 한-중 갈등, 과거 군국주의 표어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 등 그 문제들의 연원은 대체로 동북아시아의 역사적 갈등 경험, 거기서 비롯한 국제·정치·사회적 환경에 있었다.

“아이들에게 평화의 의미 전하자”
‘3개국 공동출판’ 뜻 모았지만
위안부 다룬 첫 작품 ‘꽃할머니’ 뒤
누적된 역사적 갈등에 가로막혀
10년 넘도록 시리즈 완간 못해

일본선 우익세력 반발 우려로 난색
중국은 반일정서·‘한한령’ 걸림돌
한국도 ‘조선적’ 이유로 무산 사례

“아이들 마음 움직일 평화 씨앗으로”
동아시아 비극 극복할 ‘인식의 공유’
작가들 협업에서 싹튼 연대는 성과

한국에서도 평화그림책 기획이 가로막힌 사례가 있다. <춘희는 아기란다>를 쓴 재일조선인 변기자 작가는 애초 <꽃할머니>의 일본어판 번역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2011년 한국에서 열리는 기획회의에 참석하려던 그에게, 한국은 ‘조선적’ 재일동포라는 이유로 비자를 내주지 않았고 회의는 끝내 무산됐다. 더욱 안타깝게도 변 작가는 번역을 다 마치지 못한 채 2012년 세상을 떠났다. 식민지배와 이주, 분단 등 비극적인 역사가 준 고통을 평화와 그림책으로 승화시키려고 했던 의지가, 바로 그 비극적인 역사가 만들어놓은 ‘경계’에 가로막힌 셈이다.

전쟁의 아픈 기억을 담은 권정생 시에 김환영 작가가 그림을 담은 평화그림책 <강냉이>의 한 장면. 최근 국내에서 개정판이 출간됐다. 사계절 제공
전쟁의 아픈 기억을 담은 권정생 시에 김환영 작가가 그림을 담은 평화그림책 <강냉이>의 한 장면. 최근 국내에서 개정판이 출간됐다. 사계절 제공
애초 바람대로 한·중·일 3국에서 12권의 평화그림책 시리즈를 오롯이 완간하는 게 가능할지는 아직까지 미지수다. 중국에서 ‘한한령’이 풀린다 하더라도, 지금 상태론 일본에서 <꽃할머니>를, 중국에서 <사쿠라>를 애초의 평화그림책 목록에서 찾아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평화그림책의 성취가 시리즈의 완간 여부에만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한·중·일 3국 작가와 편집자들이 마음을 모았다는 것,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서 11권, 중국에서 8권의 평화그림책을 실제로 펴냈다는 것 자체가 큰 성과다.

평화그림책 <사쿠라>의 한 장면. 당시 사람들에게 전쟁을 강요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표어를 썼는데, 중국어판은 이 표어들 때문에 출간 허가를 받지 못했다. 사계절 제공
평화그림책 <사쿠라>의 한 장면. 당시 사람들에게 전쟁을 강요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표어를 썼는데, 중국어판은 이 표어들 때문에 출간 허가를 받지 못했다. 사계절 제공

특히 평화그림책 기획에 참여한 사람들은 국경을 넘은 협업이 가져다준 ‘인식의 공유’를 가장 소중한 성취로 꼽는다. 기획을 함께 하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 더욱 깊이 알게 됐고, 그것이 작품에도 반영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평화란 어떤 걸까?>의 작가 하마다 게이코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자신의 작품이 “피해자의 입장으로만 생각하고 있다”고 비판받았던 경험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는 그런 비판을 “평화를 생각할 때 하나의 좌표가 될 것”이라며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원안에는 없던 장면(“잘못을 저질렀으면, 곧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을 새로 넣기도 했다. 출판사가 바뀌긴 했지만, <꽃할머니> 일본어판이 나오는 지난한 과정 역시 ‘인식의 공유’와 그 확장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권윤덕 작가는 “‘위안부’ 문제라는 사회적이고 국제적인 문제를 공유해 가는 과정”, “우리의 공통의 기억과 연대의 발판을 넓히는 일”이라고 말한 바 있다.

평화그림책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의 한 장면. 동물들은 자유로이 오가지만 사람들은 자유로이 오갈 수 없는 분단의 상징 ‘비무장지대’를 소재로 삼아 평화를 염원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사계절 제공
평화그림책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의 한 장면. 동물들은 자유로이 오가지만 사람들은 자유로이 오갈 수 없는 분단의 상징 ‘비무장지대’를 소재로 삼아 평화를 염원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사계절 제공
평화그림책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의 한 장면. 동물들은 자유로이 오가지만 사람들은 자유로이 오갈 수 없는 분단의 상징 ‘비무장지대’를 소재로 삼아 평화를 염원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사계절 제공
평화그림책 <비무장지대에 봄이 오면>의 한 장면. 동물들은 자유로이 오가지만 사람들은 자유로이 오갈 수 없는 분단의 상징 ‘비무장지대’를 소재로 삼아 평화를 염원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사계절 제공
김장성 대표의 전자우편함 속 ‘평화그림책’ 폴더에는 3국의 작가, 편집자 등 평화그림책을 만들어내기 위해 애쓴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편지가 쌓여 있다. 최근까지는 마지막 책 <토요일, 맑음> 출간을 위한 서신 교류가 띄엄띄엄 이어지고 있다. 평화그림책은 속된 말로 ‘잘 팔릴’ 그림책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수많은 사례에서 봤듯 주어진 국제·정치·사회적 환경 속에서 불편함만 초래하는 그림책이다. 그럼에도 지난 10여년 동안 이들은 “아이의 마음을 움직이겠다”는 의지로 끈질기게 출간을 이어왔다. 이들이 이렇게 뿌려놓은 씨앗은, 다음 세대에게 얼마만큼 더 가깝게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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