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체성-포스트소비에트의 이념과 정서
제임스 빌링턴 지음, 박선영 옮김/그린비·2만원
지난 3월 4선 집권에 성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24년까지 러시아를 이끌게 된다. 이로써 그의 전체 집권 기간은 무려 24년으로, 소비에트연방 시절 ‘철권’ 통치자 이오시프 스탈린(31년)을 바짝 뒤쫓는다. 소련 해체 이후 자국 역사상 최초로 “제국이 아닌 국가, 독재정이 아닌 민주주의”가 된 러시아의 선택은 결국 민족주의를 앞세운 ‘강한 러시아’로 귀결되는 것일까? 소비에트연방 붕괴 이후, 곧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에 러시아는 과연 자국의 본성과 운명에 대해 어떤 논의를 벌여온 것일까?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미국의 러시아 문화사가 제임스 빌링턴(89)의 <러시아 정체성>(2004)은 바로 이 질문에 상세한 답을 주는 책이다. 1987년부터 2015년까지 무려 28년 동안 미국 의회도서관장을 지내기도 했던 빌링턴은 러시아 문화사 연구의 대표적인 고전으로 꼽히는 <이콘과 도끼>(1966)를 써내는 등 러시아에서도 인정받는 러시아학의 거장으로 꼽힌다. 출간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이 책은 여전히 포스트소비에트 시기 ‘우리는 무엇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색해온 러시아의 고민을 큰 틀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준다. 언뜻 보기에 ‘푸틴이라는 현상’만이 포스트소비에트 시기를 대표하는 것 같지만, 지은이는 러시아 내부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던 ‘정체성 찾기’의 다양한 결들을 풀어내 보인다. “러시아보다 국가 정체성의 문제에 답하는 데에 지적 에너지를 더 쏟아부었던 국가는 여태껏 없었을 것이다.” 이는 19세기부터의 흐름이었는데, 제정러시아 시기 ‘슬라브주의자’와 ‘서구주의자’ 사이의 논쟁이 그 시초다. 정교 신앙, 슬라브 민족성, 공동체적 기구들, 농경 중심의 사회 구성 속에서 러시아 고유의 ‘정신적인 힘’을 찾으려 했던 슬라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인민주의·혁명주의 등 서구 이상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서구주의자들과 대립했다. 이런 ‘정체성 찾기’의 노력들은 20세기 들어서면서 문화·종교적 관점, 사회학적·반종교적 관점, 민족·지리적 관점 등으로 갈라지고 이어져왔다.
러시아의 화가 일리야 글라주노프의 작품 <대실험>(1990). 러시아의 끈질긴 ‘정체성 찾기’의 여정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출처 일리야 글라주노프 누리집
지은이는 “대(大)러시아 민족주의가 소비에트 전체주의를 만들고 그것을 떠받쳐 수명을 연장하고 종국에는 그것을 해체하는 데 있어서조차 구동력이었다”고 짚는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은 현대 세계에서 공식 명칭에 민족적 지명도, 지리적 지명도 포함하지 않았던 최초의 중요한 주권이었다. 그러나 “국제 공산주의에 대한 최초의 믿음이 사라지자마자 러시아의 모든 것에 대한 민족주의적 믿음이 1930년대 스탈린 집권 하의 소비에트 제국을 위한 주요 정당화 요소가 되었다.” 스탈린은 ‘대러시아 쇼비니즘’을 정치적으로 활용했고, 그의 집무실에는 이반 뇌제, 표트르 대제의 초상화가 마르크스, 레닌의 초상화와 함께 걸려 있었다. 그렇지만 1991년 소비에트연방을 붕괴시킨 원동력 또한 ‘자아 정체성 찾기’에 몰두하는 러시아인들의 민족적 자부심이었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진 뒤 러시아는 주요 상대국의 모델을 대대적으로 도입하는 자신들의 전통에 따랐지만, “러시아의 냉전 이후 민주주의적 실험 위를 어둡게 드리우고 있던 것은 ‘유라시아주의’라는 새로운 비전”이었다. 지은이는 대중적 인기를 얻은 ‘유라시아주의’가 사실상 서구 중심의 ‘범대서양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했다는 데에 주목한다. 이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아시아와의 새로운 애정사의 시작을 한다기보다, 서구와의 보답 없는 애정사에 느낀 환멸감”의 차원에서 제기됐다는 것이다. ‘유라시아주의’는 민족주의를 앞세운 권위주의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대상이다. 대표적인 우익 이론가 알렉산드르 두긴은 푸틴 정권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힌다.
미국의 러시아 문화사가 제임스 빌링턴. 그의 책 <이콘과 도끼>는 러시아를 이해하기 위한 대표적인 고전으로 꼽힌다. 출처 www.openworld.gov
지은이는 90년대 후반 새로 생겨난 러시아어 속어 ‘스툐프’와 ‘포피기즘’을, 혼란한 포스트소비에트 시기 러시아의 ‘자아 정체성 찾기’가 봉착한 어려움을 말해주는 단어들로 꼽는다. ‘스툐프’는 사람도 말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삶에 대한 접근법을, ‘포피기즘’은 ‘난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태도를 가리킨다. 포스트소비에트 시기 살아남은 특권 관료(노멘클라투라)와 신흥 재벌(올리가르히)에 대한 대중의 분노 등이 이런 태도의 배후에 있다. 겉으로 보기엔, 지정학적인 현실과 역사적 흐름 위에서 대중의 냉소주의와 정치적 무관심을 등에 업고 민족주의적 권위주의가 고착화되어 가는 것이 러시아의 현재 상황인 것만 같다.
다만 지은이는 “러시아 특유의 냉소주의자는 모든 것을 비웃는 포스트모던한 인간이라기보다는 올바른 사람을 찾으며 어두운 세계에서 자그마한 램프를 비추고 있는 포스트모던한 디오게네스”라고 말한다. 러시아의 냉소주의는 서구의 냉소주의와 다르며,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러시아인들의 깊은 고뇌와 노력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포스트소비에트 시기 러시아 내부에서 제기된 다양한 지적·이념적 논쟁들을 보여주는 한편, “메시지 전달 매체로서 ‘푸블리치스티’(저널리즘)가 과거 ‘벨레트리스티카’(소설)를 대신하여 이제 막 깃털이 나기 시작한 민주주의의 주도적인 예술 양식이 됐다”고 말한다. 피살된 언론인, 종교인 등 민주주의를 위해 ‘순교’한 인물들을 조명하기도 한다. 러시아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를 하나씩 열어보듯, “겹겹이 이루어진 국가 정체성의 얼굴 안쪽에 숨겨진 개인의 삶의 진실에 관한 러시아인들의 보편적인 탐색”에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