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 작가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필자로 이름을 올린 뒤, 사실상 국외로 추방당했으며, 그 뒤 13년을 운동가로 살아야 했다. 황 작가가 지난 14일 <한겨레>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자택인 경기도 고양시 주택가 화단에 서 있는 모습.
▶ 광주항쟁을 최초로 기록한 책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1985)는 민주화운동의 불덩이였다. 광주를 알게 된 뜨거운 가슴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결국 1987년 6월항쟁의 승리로 이어졌다. 1980년 광주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부끄러움이 담아낸 진실의 힘이었다. 초판 저자인 소설가 황석영(75)씨와 개정판 공동저자인 이재의(62), 전용호(60)씨를 만나 출간에 얽힌 얘기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14일 경기 고양의 한 카페(황석영)와 15일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이재의, 전용호)에서 따로 이뤄졌다.
“모든 일은 형님 책임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아실 필요도 없습니다.”
1985년 초봄의 어느 날 광주 운암동 황석영 집에 정상용과 정용화가 찾아왔다. 1980년 광주 민중항쟁 당시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총을 들고 싸웠던 두 사람은 1984년 11월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초대 의장 정상용, 부의장 정용화)를 만들었다. 이 단체의 가장 중요한 사업은 5·18 진상규명이었다. 두 사람은 5·18 항쟁 5주년인 그해 5월을 목표로,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는 책을 만드는 작업을 비밀리에 해오고 있었다. 그날 황석영을 찾아간 것은 그 책의 저자로 이름을 빌려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광주 학살에 대한 얘기를 유언비어라고 몰아붙이던 전두환 정권의 주장을 뒤엎고 진실을 알리려면 저명인사의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책 출간에 대한 책임만 져야 하는 ‘이상한’ 조건이었지만, 황석영은 그러겠다고 흔쾌히 수용했다.
―당시 언론도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에 막혀 광주의 진실을 알릴 수 없었다. 책이 출간되면 저자가 구속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는데 그런 것에 대한 주저나 두려움은 없었나?
황석영(황) “그런 건 전혀 없었다. 내가 1978년부터 광주에 살면서 문화운동을 했는데, 같이 했던 젊은이들이 5·18 때 많이 죽었다. 내가 관여해 만들었던 극단 ‘광대’ 회장을 맡았던 윤상원도 도청에서 죽었다. 5·18 당시 광주에 없었다는 죄책감, 살아남은 자로서의 부채감 때문에 무슨 일이든 하지 않으면 미안해서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로 수락했다.”
1980년 광주에서 살던 황석영은 5·18 항쟁 때 서울에 있었다. 극단 ‘광대’가 사용할 전용 소극장 계약금 등 문화운동 자금을 구하기 위해 5월16일 상경했다가 5·18 항쟁이 일어나면서 광주가 봉쇄되는 바람에 돌아가지 못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산파역 전용호
이재의(이) “원고가 거의 완성된 뒤에 누구 이름으로 출간할지를 놓고 책 출간을 추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고민이 있었다. 처음에는 광주의 원로 두어 분에게 요청했다. 이들은 ‘정말 의미있는 일인데 아직은 빠르다, 전두환 정권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지금 책을 내면 여러 사람이 다치게 된다’면서 우리를 만류했다. 그때 전용호씨가 황석영 선생이 어떻겠느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들이 먼저 찾아갔던 이는 광주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 홍남순(2006년 작고)과 전남대 교수이자 작가였던 송기숙이었다.
전용호(전) “나는 그때 황 선생 댁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5·18 직후 구속됐다가 그해 말 감옥에서 나온 뒤에 마당극 등 문화운동을 함께 하면서 그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 이분 같으면 책 저자로 이름을 빌려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 선생은 작가 이전에 문병란 시인과 함께 몇 안 되는 ‘움직이는 운동가’였기 때문이다.”
광주항쟁 때 숨진 윤상원과 1978년 불의의 사고로 숨진 들불야학 교사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1982)을 계기로 황석영이 자신의 집에서 노래극 <넋풀이>를 만들 때 전용호는 주요한 멤버 중 한명이었다. <넋풀이>에 나오는 노래 중 하나가 광주항쟁을 상징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황석영이 승낙하자, 1985년 4월초 이재의와 전용호, 조양훈 등은 원고 복사본 한부를 들고 다시 황석영을 찾아갔다.
이 “누가 집필자인지 드러나면 안 되니까 이 원고를 황 선생이 직접 연필로 원고지에 써야 한다고 말했더니, 그는 그러겠다고 하더라. 작가의 자존심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면 거부할 텐데 그는 오직 그것이 해야 하는 일인지 아닌지를 놓고 판단하더라. 고맙기 이를 데 없었다.”
책은 광주 출신의 나병식(2013년 작고)이 대표로 있는 풀빛출판사에서 내기로 했다. 황석영은 풀빛출판사 근처 여관에 방을 잡고는 마지막 작업에 들어갔다.
황 “책 내용이야 확인을 거쳐 작성한 것이기에 고치지 않았다. 대신 글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순서를 조금 바꾸고, 소제목을 붙였다. 또, 머리말에 해당하는 내용을 써서 붙였다. 문병란(2015년 작고) 시인의 시에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 제목을 따왔다. 그러고는 내가 원저자라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 원고지에 한장 한장 필사를 했다.”
5·18 진상을 알리는 책을 만드는 일은 광주항쟁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1980년 말부터 시작됐다. 정용화와 조봉훈이 각각 따로 착수했다. 전남대 출신의 청년 활동가였던 정용화는 1979년에 결성된 ‘현대문화연구소’의 소장을 맡기도 했다. 윤한봉 등 광주의 문화운동가들이 만든 현대문화연구소는 광주·전남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센터 역할을 했다. 정용화는 5·18과 관련해 구속됐다가 1980년 10월 말에 석방되자마자 5·18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던 조봉훈도 5·18 직후 구속됐다가 그해 11월에 석방된 뒤 광주 항쟁 자료 모으기에 나섰다. 조봉훈은 1979년 성동구치소에서 옥살이를 하면서 알았고 당시 포고령 위반으로 수배중이던 소준섭에게 같이 책을 쓰자고 제안했다. 소준섭은 조봉훈이 수집해놓은 공소장과 투사회보 등 문서자료를 바탕으로 항쟁에 참여한 인사들의 증언을 듣고 항쟁의 기승전결 전모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1981년 5월초 마침내 ‘광주 백서’를 완성했다. 5월 18일 계엄군의 무자비한 시위진압으로 시작돼 27일 무력으로 진압 당하기까지의 광주 항쟁의 진상을 밝힌 최초의 기록이었다. 나중에 이재의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를 쓸 때 ‘광주 백서’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 속에서 책을 출간할 수 없자, 소준섭은 1982년 초 인천에서 박우섭, 이범영(1994년 작고) 등과 함께 ‘광주 백서’를 정식 간행물이 아닌 팸플릿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팸플릿을 주요 인사들에게 우편으로 부치고, 기독교인권위원회(NCC) 등 시민운동 단체와 서울대 인문대 학회실 등 대학가에 몰래 배포하였다. 이 팸플릿은 광주항쟁의 진실을 전국에 알리고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지펴내는 불씨의 역할을 하였다.
서너 갈래로 진행되던 5·18 백서 간행 작업은 1983년에 들어 자연스레 통합됐으며, 전남민주청년운동협의회 출범(1984년 11월)을 전후로 본격적인 출간 작업이 이뤄졌다. 1984년 10월 정상용은 이재의를 은밀하게 만나서 집필을 맡아줄 것을 제안했다.
이재의(오른쪽)씨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집필 작업을 맡았고, 전용호(왼쪽)씨는 책 출간을 위한 자료 수집과 전달 작업 등을 맡았다. 전남대 경제학과 선후배인 두 사람이 지난 15일 광주의 옛 전남도청 청사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아내도 신혼생활 기꺼이 포기
―정상용씨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나?
이 “5·18 항쟁 때도 함께 일하는 등 전부터 잘 알기는 했다. 그 때문은 아니고, 나에게 부탁한 것은 보안문제 때문이었다고 나중에 얘기 들었다. 비밀리에 작업을 하자면 당국의 감시망을 벗어난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내가 거기에 맞았다고 하더라. 나는 1981년에 감옥에서 나온 뒤 직장 생활을 하는 등 이쪽하고는 담을 쌓다시피 하고 살았다.”
전남대 경제학과 출신인 이재의는 5·18 항쟁 당시 계엄군이 물러난 5월21일부터 도청 상황실에서 일했다. 시민군과 도청 지도부와의 연락체계를 구축하고, 어수선했던 도청의 초기 행정 질서를 잡는 등의 일을 했다. 이틀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한 그는 잠깐 옷 갈아입으러 23일 저녁 집에 갔다가 형과 누나한테 납치되다시피 고향(곡성)으로 끌려가서 지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그는 5·18 직후인 1980년 9월쯤 광주항쟁을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어 뿌리다가 구속돼 열달 동안 옥살이를 했다. 그 일로 제적돼 직장에 다니다가 1984년 학원자율화 조처로 복학한 상태였다.
―비밀로 한다지만 필자가 드러날 가능성이 높고, 결국 또 구속될 수도 있었는데.
이 “구속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도청에 같이 있었던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어 나갔는데 나는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 그 죄책감이 너무 커서 죽는 날까지 항쟁의 진실을 반드시 밝히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다만, 고마운 것은 집사람의 지원이었다. 결혼식(1984년 12월)을 막 앞두고 있어서 아내 될 사람에게 미안했다. 그는 세무서 다니던 공무원으로 운동권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맡기로 한 일과 그 일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사실대로 얘기했더니 ‘사무실에서 5·18의 참상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하시라, 나도 뒷받침하겠다’고 말하더라. 그게 큰 힘이 됐다.”
이재의는 곧바로 고교 친구이던 조양훈에게 함께 작업하자고 제안했다. 조양훈도 신혼 초였으나, 흔쾌히 수락했다. 이재의 조양훈 두 사람은 정용화 등이 모아뒀던 자료를 정리하고, 투쟁위원회와 시민군 지도부의 핵심 인물 40여명을 만나 증언을 채록했다. 두 사람은 신혼집을 번갈아 옮겨가면서 창문을 담요로 가린 채 밤새 글쓰기 작업을 했다. 1985년 1월에 착수해서 4월초에 초고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황석영의 손을 거쳐 마무리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는 그해 5월20일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인쇄 도중 경찰이 덮쳐 1만권을 통째로 압수했지만, 인쇄소를 한 군데 더 구해놓았던 나병식의 주도면밀함 덕분에 다른 곳에서 급하게 찍은 1만권이 시중에 깔렸다. 전두환 정권은 그것마저 수거하려 애썼지만, 광주의 진실은 복사본을 통해 빠른 속도로 세상에 퍼져나갔다. 이에 정권은 출판사 대표 나병식을 구속하고, 유명 작가인 황석영에 대해서는 외국에 나가 있는 것을 조건으로 풀어줬다. 사실상의 추방이었다. 그는 이후 방북(1989)과 망명, 투옥(1993~98) 등 13년 동안 방랑 생활을 해야 했다.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이재의는 언론인(<광남일보> 경제부장)과 산업자원부 장관 정책보좌관, 광주시장 비서실장 등으로 비교적 순탄하게 살았다. 전용호는 그 이후에도 광주에서 문화활동을 계속했다. 올해 5·18 추모기간에 공연중인 뮤지컬 <빛의 결혼식-임을 위한 행진곡>의 대본은 전용호 작품이다.
개정판으로 ‘만해문학상 특별상’
―광주항쟁 기록 책을 쓴 뒤 고생이 많았는데.
황 “다 운명이다.(웃음) 하필 그때 광주에 사는 바람에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작가로서 오랫동안 제대로 창작활동을 하지 못해 안타깝기는 하지만, 진실을 알리는 데 일조한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광주항쟁 이후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에도 노동자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별로 없어 안타깝고 슬프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이 “이 책이 1987년 6월항쟁을 불붙이는 등 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자, 책을 폄훼하는 움직임도 적지 않았다. 북한에서 자료를 받아서 썼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게 참기가 힘들었는데 지난해 황석영 선생, 전용호씨와 함께 전면 개정판을 낼 수 있어서 뿌듯하다. 이제 공식적인 진상 규명만 남았다.” 전
“집단발포 책임자 등 풀리지 않은 문제가 이번 진상조사에서는 확실하게 밝혀져야 한다. 그때까지 책으로, 또 연극으로 진실을 계속 알려나가려고 한다.”
황석영과 이재의, 전용호는 지난해 말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창비) 개정판을 낸 공로로 ‘만해문학상 특별상’을 받았다. 광주·고양/글·사진 김종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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