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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잊지 않았나요? 정확한 글이 주는 기쁨

등록 2018-05-17 19:33수정 2018-05-17 19:53

93년 전통의 주간지 <뉴요커>에서
‘산문의 신’이라 불리는 책임교열자
문법·어휘 둘러싼 일화 풀어놔
유쾌·솔직· 정확한 글쓰기 모범

뉴욕은 교열 중/메리 노리스 지음, 김영준 옮김/마음산책·1만5000원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코리 스탬퍼 지음, 박다솜 옮김/윌북·1만6500원

<뉴요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연재했고,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와 <롤리타>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 같은 거장들이 글을 연재했으며, 최근엔 <아웃라이어>의 맬컴 글래드웰이 전속작가로 일하는 미국의 고급 주간지. 1925년 창간해 올해로 93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창간호처럼 손으로 그린 서정적이거나 유머러스한 일러스트를 주로 표지로 사용해 그 자체만으로도 유명한 잡지이기도 하다.

<뉴요커>가 유지해온 이런 견고한 명성을 지탱하는 기반엔 견고한 언어가 있다. 이곳의 편집 공정은 교정·교열·취합·편집·팩트체킹이 나누어져, 엄격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여기에 실린 글들은 당대 영어 사용의 표준으로 구실을 할 정도다. “<뉴요커>에서 이렇게 썼으니, 앞으로 이렇게 쓰는 게 가능해”라는 말이 있는 이유다.

이곳 교열부의 꼭대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바로 메리 노리스, 일명 ‘콤마 퀸’으로 불리는 교열자다. <뉴욕은 교열 중>은 <뉴요커>의 책임 교열자 노리스가 40년 동안 이곳에서 일하면서 작가와 동료 직원들과 있었던 에피소드와 문장부호를 둘러싸고 벌어진 영광과 실수들을 때론 우습고 솔직하게 때론 감동적으로 풀어낸 책이다. 웬만한 문법책보다 자동사와 타동사의 차이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허먼 멜빌의 <모비딕>(Moby-Dick)의 제목에 붙임표(-)가 들어간 이유, 트랜스젠더 동생에게 3인칭 대명사로 상처준 이야기, 연필 집착 등 책과 문학, 언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끌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단어광들을 위한 순결한 포르노”(<워싱턴포스트>)라는 평이 꽤 적확한 이유다.

그는 열다섯살에 공중수영장 무좀 검사원으로 돈벌이를 시작해, 의상업체 직원, 우유배달원, 치즈 공장 직원을 거쳐 1978년 <뉴요커>에서 편집부 도서실 사서로 일을 시작한다. 입사 초기 그는 주 업무가 아닌 비공식 교육이었던 최종 교정지 검토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한 작가가 블루밍데일스 백화점 지하에서 크리스마스 쇼핑으로 살 만한 식품을 소개한 칼럼의 한 대목에 눈이 멎는다. 목록에 설탕과 “flower”(꽃)라고 쓰여 있던 것. 노리스는 소심하게 “flour”(밀가루)로 고쳐서 넘긴다. “(작가, 교열자, 교정자, 팩트체커가) 힘을 합해도 하지 못한 일을 해주셔서 우리 모두 고마워한다”는 쪽지를 받고, 그는 그만 교열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미국 뉴욕에 있는 <뉴요커> 사무실에서 벽에 붙여놓은 교정지를 살펴보고 있는 교열자 메리 노리스. 마음산책 제공
미국 뉴욕에 있는 <뉴요커> 사무실에서 벽에 붙여놓은 교정지를 살펴보고 있는 교열자 메리 노리스. 마음산책 제공

그렇게 교열자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1993년부터 현재까지 <뉴요커>에만 있는 직책인 ‘오케이어’(OK'er)를 맡고 있다. 인쇄 직전까지 원고를 책임지고 교정하고 관리하는 자리다. 그는 새로 온 직원들이 교열자를 마녀처럼 생각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하이픈으로 찌르거나 콤마 한 상자를 강제로 먹게 만들 사람”처럼 무서워하기도 한다고 농담을 늘어놓는다. 그는 교열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사실 크게 틀리지 않다며 이렇게 솔직하게 고백한다. “교열자에 대한 이미지는 엄격하게 일관성을 유지하는 사람, 남들의 오류를 지적하길 즐기는 심술쟁이, 출판업에 발을 들여놓고 주목받길 원하는 보잘것없는 사람, 또는 더 심하게 말하면 작가가 되려고 했으나 쓰라린 좌절을 겪고 i의 점과 t의 교차선에 신경을 쓰는 사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작가들의 경력에 이바지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모든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가 유명 작가들의 글을 고친 이야기는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의 거장 필립 로스의 소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의 앞부분을 게재하는 책임을 노리스가 맡았을 때였다. 글에 두 번 반복해 인용된 아동용 역사책에 인용된 구절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작가인 로스가 교정지 여백에 “이 여성분은 누구죠? 이분이 저와 같이 살 생각은 없을까요?”라고 농담섞인 답을 적어서 보내왔단다.

2015년 발간된 <뉴요커> 표지는 1925년 창간호 표지를 패러디한 것인데, <뉴요커>는 창간호 표지 패러디를 즐겨한다. 마음산책 제공
2015년 발간된 <뉴요커> 표지는 1925년 창간호 표지를 패러디한 것인데, <뉴요커>는 창간호 표지 패러디를 즐겨한다. 마음산책 제공

2013년엔 제임스 설터의 소설 <가벼운 나날>을 읽다가 그 완벽한 소설 중 단 하나의 쉼표가 눈에 밟혀 고민하다가 결국 편지를 보낸다. 설터가 보내온 답장을 보면 훌륭한 작가들은 독자들이 쉽게 스쳐지나가는 문장부호 하나에도 꽤 많은 생각을 담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거꾸로 말하면 독자들도 교열자들처럼 문장부호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곱씹는다면 더욱 풍성한 문학의 맛을 즐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그라면 ‘컴퓨터의 맞춤법 기능이 있는데 더는 교열자가 필요하겠냐’는 의문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컴퓨터는 문맥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음이의어 중 어느 게 맞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등 교열자가 꼭 필요한 사례를 죽 늘어놓는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어법의 세계는 일정 단계를 넘어가면 정답이 없는, 주관으로 선택해야 하는 스타일의 영역에 접어든다는 것. 그렇기에 한 편집자는 노리스의 일을 “산문의 신이 하는 일”이라고 부른다.

더는 교열자를 두지 않는 언론사들이 늘어가고, 기자가 쓴 오타로 가득한 속보·연예기사가 편집자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포털을 뒤덮는 시대. 이런 때에 철자 하나 쉼표 하나에 목을 매고, 문장을 다듬어 글의 허리를 곧추세우는 교열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잊고 있던 기분 좋은 허기가 느껴진다. 좋은 글을 읽고 싶다, 정확한 글을 쓰고 싶다는 허기가.

<뉴욕은 교열 중>의 저자 <뉴요커> 교열자 메리 노리스. 마음산책 제공
<뉴욕은 교열 중>의 저자 <뉴요커> 교열자 메리 노리스. 마음산책 제공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는 온종일 조용히 앉아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는 교열자와 비슷한 사전 편집자가 쓴 책이다. 코리 스탬퍼는 미국의 가장 오래된 사전 제작사 메리엄 웹스터에서 20년간 사전 제작을 업으로 삼아왔다. 그에 따르면 사전 편집자가 되기 위한 비공식 요건이 하루 8시간씩 침묵 속에서 전적으로 혼자 일하는 것이 기질에 맞아야 한다고 할 정도로, 겉으로 보기에 이 일은 매우 정적이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전이 출간되는 즉시 이어지는 개정 작업을 시작하고, 정의·교열·어원·연도 등 최소한 10개 분야로 나누어져 정신없이 일하는 사전편집자들이 있다. 또한 ‘결혼’이란 단어에 ‘동성인 사람과 맺어진 상태’라는 정의를 추가하는 것으로도 미국 대법원의 동성결혼 합법 판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사회적으로도 영향력 있는 일이기도 하다. 사전 편집자란 올바르게 기술할 적확한 단어를 찾아 매일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면서, 평생에 걸쳐 천천히 눈이 멀어가는 숙명을 짊어진 일이지만 도전적이고 흥미로운 일임을 이 책은 보여준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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