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께 찍은 것으로 알려진 카를 마르크스의 사진. 마르크스는 한때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에 비유됐으나,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지나치게 신화화됐다’는 비판이 일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역사 속 걸출한 사상가들이 다들 그렇지만, 카를 마르크스의 생명력은 유난히 기구하면서도 길다. 1818년 5월5일 독일 트리어에서 시작한 그의 삶은 1883년 영국 런던에서 끝이 났지만, ‘신화’가 됐든 ‘유령’이 됐든 ‘인간’ 마르크스를 넘어서 우리 주위를 끊임없이 배회해온 마르크스는 올해로 탄생 200년을 맞았다. 지난해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인류사적 사건’인 러시아 혁명(1917년)이 일어난 지 100년, 마르크스를 대표하는 저작인 <자본론> 1권이 출간(1867)된 지 150년이 되던 해이기도 했다. 90년대 초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함께 매장되어버릴 위기를 겪었지만, 반복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속에서 마르크스의 생명력은 역설적이게도 더욱 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탄생 200년을 맞아 국내에서도 마르크스에 대한 다양한 책들이 출간됐다. 오랫동안 마르크스와 한몸이라 여겨졌던 것, 곧 ‘마르크스주의’를 마르크스 자신으로부터 떼어내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의 의미를 재해석하려는 경향이 엿보인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두드러지는 흐름이다. 책마다 그 결은 다르지만, 영국의 정치사상사가인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가 쓴 마르크스 평전 <카를 마르크스-위대함과 환상 사이>(아르테),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오월의봄), 16개 열쇳말로 마르크스를 조명한 토머스 스타인펠트의 에세이 <마르크스에 관한 모든 것>(살림) 등이 대체로 이런 흐름 위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와 한몸인 마르크스의 모습은 무엇인가? 1989년 국내에 출간됐다가 마르크스 탄생 200년을 맞아 이번에 다시 출간된 <마르크스 전기>(노마드)를 참고해볼 수 있겠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설기관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가 1973년 영어로 펴냈던 이 책은, 풍부한 사료를 통해 마르크스의 삶과 사상을 재구성하는 한편 그것을 러시아 혁명을 거친 ‘현실 사회주의’ 탄생에 이르는 역사와 하나로 꿰어 매끄럽게 풀이해낸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독일 철학과 프랑스 사회주의, 영국의 정치경제학을 치열하게 연구하며 혁명적 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세상을 변혁할 도구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완성해나가는 인물로 그려진다. 머리말에 등장하는, 신으로부터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프로메테우스와의 비유는 ‘마르크스주의와 한몸인 마르크스’의 고전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1867년 독일어로 출간된 <자본론> 1권 초판의 표지.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가장 최근인 2016년 나온 평전 <카를 마르크스>는 <마르크스 전기>와 여러모로 대척점에 위치한다. 경제학자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이 옮긴 이 책은 ‘위대함과 환상 사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마르크스에게 덧씌워진 ‘환상’을 걷어내야 19세기 정치사상사 속 마르크스의 ‘위대함’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이를 위해 지은이는 마르크스 자신을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떼어놓을 뿐 아니라, 그의 사상적 동반인 프리드리히 엥겔스, 더 나아가 마르크스의 최대 저작인 <자본론> 및 정치경제학으로부터도 떼어놓으려 시도한다. 거칠게 옮기자면, 마르크스는 독일 관념론의 영향을 받은 철학적 사변으로부터 노동, 소외 개념 등 자기 이론의 주된 틀거리를 도출해내긴 했으나 이를 정치경제학적으로 증명하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것이 지은이의 주된 논지다.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를 이윤으로 전유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비밀을 밝혀내겠다는 야심을 품었지만, 추상적인 서술에 그친 1권과 마르크스 사후에야 간신히 출간된 2·3권으로 이뤄진 <자본론>은 끝내 이를 밝혀내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남았다는 것이다. 대신 지은이는 마르크스가 실제론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와 사뭇 다른 정치적 입장을 보였으며, ‘마르크스주의’는 애초 엥겔스와 독일 사회민주당 세력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지적하는 데 주력한다. 그는 <자본론> 집필에 집중하지 못한 마르크스가 1860년대 노동조합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등 되레 ‘사회민주주의적’ 관점을 드러냈다는 것, 더 나아가 말년에는 베라 자술리치에게 보낸 편지 등 러시아 인민주의자들과의 교류 속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루지 못한 러시아의 농경 사회 속 ‘촌락공동체’가 지닌 변혁 역량에 기대를 걸었다는 것 등을 강조한다. 특히 러시아 촌락공동체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심에 대한 서술은, “사회주의적 노선 위에서 그것(러시아)을 변혁할 가능성을 창출할 수 있는 것은 러시아 혁명과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 계급의 승리에 의한 지원”이라고 풀이한 <마르크스 전기>의 서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마르크스가 편집장으로 있던 <라인신문> 폐간호에 실린 풍자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를 인쇄기에 묶여 있는 마르크스로, 그의 간을 쪼는 독수리는 프로이센의 검열로 묘사했다. 마르크스-프로메테우스 도식처럼 많이 알려진 비유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한 뒤인 1993년 처음 나왔던 <마르크스의 철학>은 2014년에 나온 재판을 저본으로 삼아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국내 출간됐다. 재판 서문에서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철학과, 노동자 운동과 계급투쟁 조직의 역사적 순환의 완료라는 시공간에 의해 한정된 관념들과 제도들의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가능한 한 근본적인 구분선을 긋고자 했다”고 밝힌다. 지난 20년 동안 변하지 않은 지은이의 작업은, 하나의 방향이나 일관된 전체성을 거부하려고 했던 ‘반철학’ 또는 ‘비철학’으로서의 마르크스의 철학을 되새기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 등의 개념 때문에 마르크스 사상은 역사 발전의 법칙성이나 ‘도래할 미래’를 강조하는 ‘독트린’으로 오해받기 쉬운데, 정작 마르크스 본인은 이런 개념을 사용한 적조차 없다. 지은이가 보기에, 마르크스는 “결론을 고정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이론가적이고, 현실을 외면하고 연구에만 몰두하기에는 너무나 혁명가적 인물”이었다. 이런 풀이로부터 하나가 아닌 다양한 역사 발전의 경로와 접합할 수 있는 ‘열린 마르크스주의’를 제시한다.
공산주의는 현재 상태에 대한 운동 자체
저널리스트이자 학자인 토머스 스타인펠트가 쓴 <마르크스에 관한 모든 것> 역시 후대에 덧씌워진 이미지를 벗기고 혁명가보다는 사상가로서, 더 정확하게는 저널리스트로서 마르크스를 조명하는 책이다. 명성, 선언, 음모 등 16개의 열쇳말로 마르크스의 삶과 사상을 에세이로 풀어냈다.
아르헨티나 출신 사회학자 로날도 뭉크가 쓴 <마르크스 2020-자본주의 위기에서 마르크스는 여전히 유효한가?>(팬덤북스)는 위의 책들과는 그 결이 제법 다른 책이다. 2000년에 <마르크스@2000>이란 제목으로 나왔던 바 있는 이 책은 마르크스란 인물 자체에도 주목하지만, 그보다 ‘마르크스주의’에 더 집중한다. 지은이는 마르크스주의 가운데에서도 정치경제학 비판, 곧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 계급 갈등에 관한 분석이야말로 마르크스가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이라고 본다. 과거 독일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소비에트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가져다 저마다의 이데올로기로 삼았으나,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그럴듯한 국가도, 사상을 지지하는 정당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다.” 지은이는 마르크스주의에 담긴 유럽중심적 사고, 과거 교조화된 마르크스주의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그러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여전한 가치와 그 필요성을 강조한다. 지금의 현실을 바꿔내는 데 도움이 된다면, 또 온전히 더 나은 미래를 위한다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란 주장이다. 책 마지막에 지은이는 <독일 이데올로기>의 대목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공산주의란 우리가 확립해야만 하는 상태도, 현실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도 아니다. 공산주의는 현재 상태를 폐지하고자 하는 현실 운동 그 자체이다. 이 운동의 조건은 현존하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마르크스의 친필 사인.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이밖에 도서출판비(b)는 ‘혁명가’ 마르크스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는 저작으로 꼽히는 <공산당 선언>을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했다. 언론인이자 작가인 손석춘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마르크스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디어 맑스>(시대의창)를 펴냈다.
영국 런던 하이게이트의 카를 마르크스 묘지. 김공회 경상대 교수 제공
2002년께 프랑스의 급진주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오늘날 마르크스는 ‘중간 계급의 철학자’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이제 교육받은 자유주의자들은 대체로 ‘자본주의는 분열적인 계급 갈등으로 움직이며, 그것은 소수의 지배 계급이 다수의 노동 계급의 잉여 노동을 이윤으로 전유하는 데에서 비롯한다’는 마르크스의 기본적인 생각을 옳다고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2011년께 이런 이야기를 했다. “2004년, 70년대부터 작업을 해오던 마르크스·엥겔스의 영어 번역본 전집의 마지막인 50권이 나오자, 침묵만이 이를 맞이했다.” 200돌 생일을 맞이한 지금, 더이상 ‘신화’도 ‘유령’도 될 수 없는 마르크스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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