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의 고금유사
순화군(順和君, 1580-1607)은 선조가 순빈김씨(順嬪金氏) 사이에서 얻은 여섯 번째 아들이다. 왕위를 계승한 경우가 아니면 왕자는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지는 법이지만, 27살이란 젊은 나이에 죽은 순화군은 아주 드문 예외적 존재라 할 수 있다. 혁혁한(?) 이름을 역사에 떨쳤으니 말이다.
순화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해군과 함께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에게 잡혔다가 이듬해 풀려난다. 이후 순화군의 이름은 오직 폭행, 살인과 함께 거론된다. 1597년부터 자기 휘하 궁노(宮奴)의 폭행을 방조한 것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더니, 급기야 황해도 신계(新溪)에 머물러 있을 때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 소홀했다고 트집을 잡아 백성들에게 몽둥이를 마구 휘두른 사건으로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아비 선조는 당연히 순화군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 결과 폭력의 강도는 점점 더 높아졌다. 1599년 순화군은 이웃 사람을 구타해 죽였다. 19살짜리의 최초의 살인이다. 하지만 왕의 아들이라 피살자 쪽에서 소송을 제기하지 못했고, 사건을 인지했던 관원들도 입을 다물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선조는 순화군이 어려서부터 성질이 괴팍한 터라 사람 구실 못할 줄을 알고 있었다고 한탄했을 뿐 달리 대책이랄 것을 내놓지 못했다.
순화군이 명색 처벌이란 것을 받은 것은 선조의 첫 비(妃)인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사망한 해인 1600년이다. 순화군은 의인왕후의 빈전(殯殿)에서 생모 순빈김씨를 모시던 계집종을 강간했고, 이에 놀란 순조는 순화군을 수원으로 귀양을 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처벌도 아니었다. 순화군이 워낙 날뛰는 통에 수원부의 재정이 바닥이 났고 그에게 맞아서 죽게 된 아전도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처벌을 강화한답시고 순화군의 머무르고 있는 집을 높은 담장으로 에워쌌지만, 문을 열고 그냥 나오는 그를 제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폭력은 계속 되었다. 음식이 변변치 않다는 이유로 음식 담당 노비의 집에 불을 지르는가 하면, 여자 노비의 옷을 벗기고 밤새 매질을 하기도 하였다. 쇠뭉치로 얼굴을 쳐서 이빨을 부수고 집게로 뽑은 경우도 있었다. 이런 잔혹한 폭행으로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다시 잡아다 서울 남대문 밖 인가에 가두었지만, 역시 소용이 없었다. 여전히 사람을 쥐 잡듯이 죽였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1년에 약 10명을 죽였다고 한다. 그의 만행은 지면이 모자라 일일이 말할 수 없을 뿐이다(순화군은 1607년에 죽는다. 사인은 밝혀져 있지 않다).
순화군은 최소한의 인격도 교양도 없는 ‘인간쓰레기’였다. 그런 그가 날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왕의 자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땅에서 순화군 같은 인간쓰레기들은 왕조와 함께 사라졌다. 그런데 왕의 자식들이 사라진 자리를 이제 재벌의 자식들이 대신 채우고 있다. 특별한 능력도 자질도 없는 자들이 오직 재벌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새파란 나이에 높은 자리에 올라 권력을 휘두른다. 권력의 세습을 막지 않는 한 그들의 갑질은 계속 될 것이다. 어쩔 것인가!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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