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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고추가 맵나, 왜 눈물이 나는 걸까

등록 2018-04-27 16:06수정 2018-04-27 16:12

암투병하는 아내 위해
부엌에 선 남편의 ‘레시피 일기’
담담하게 적어내려간 글 아래
감춰진 슬픔이 마음 건드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떠나는 아내의 밥상을 차리는 남편의 부엌 일기
강창래 지음/루페·1만3800원

아내는 이제 남편이 해준 음식 외에는 먹지 못한다.

예전의 남편은 “말도 못하게 게으른” 사람이었다. “호텔에서 룸서비스를 받으며 사는 것이 소원”이고, 요리라고는 라면에 계란과 떡을 넣어 끓이는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암 투병을 시작한 아내가 요리를 부탁하면서 그는 부엌에 서게 됐다. 병이 깊은 아내는 남편이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 그것도 조금밖에는 먹지 못하게 됐다. 아내가 그때그때 먹고 싶은 음식을 유기농 야채, 방사 계란 등 좋은 재료를 사용해 저염건강식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음식을 사먹거나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를 간호하면서 만든 음식 레시피를 짧게 메모한 글을 올리다 점점 요리를 하면서 느낀 점도 같이 올리기 시작한 글이 출판 편집자의 눈에 띄어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란 제목의 책으로 묶여나왔다. 남편인 지은이 강창래는 오랫동안 출판 편집기획자로 일하다 지금은 인문학 강의를 하는 작가이고, 아내는 알마 출판사를 운영해온 정혜인 전 대표다.

정혜인, 강창래 부부가 마지막으로 함께 찍은 사진. 사진 강영호, 루페 제공
정혜인, 강창래 부부가 마지막으로 함께 찍은 사진. 사진 강영호, 루페 제공
남편은 느리지만 하나씩 요리를 알아간다. 전에는 부엌에만 서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얼어버렸지만, 이제는 일머리가 생겨서 일 순서가 잡히고 재료 양도 꽤 가늠이 된다. 신 과일이나 채소를 먹으면 토하는 아내가 비타민C를 섭취할 수 있도록 신맛이 안 나는 감자로 튀김을 만들어주거나, 냉이나물 무침에 소금이나 간장을 쓸 수 없어 청양고추를 넣어 “매운맛으로 싱거운 맛을 잊게 만드는 진부한 전략”을 사용하는 식이다.

사실 책에 나오는 요리들은 대부분 가족 중에 환자가 없어도 평소에 해먹으면 좋을 만한 요리들이다. 물론 시간이 갈수록 이런 맛있는 음식은 줄어들지만, 탕수육이나 나가사키 짬뽕, 짜장면 같은 중국요리도 등장한다. 지은이가 이렇게 거창한 뜻으로 시작하지는 않았겠지만, 뒤늦게 자기처럼 후회하지 말고 지금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 먹이라는 당부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림 김미희, 루페 제공
그림 김미희, 루페 제공
지은이는 환자가 무슨 병에 걸렸고 병간호를 어떻게 했는지 등을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는다. 독자들은 그의 언뜻언뜻 비치는 말들을 통해서 병세를 짐작만 할 뿐이다. “아내가 맛있게 먹었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먹을 수 있는 게 점점 줄어든다. 먹을 수만 있다면.” 같은 문장들에서.

아내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은 뭐라도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파인애플이 들어간 탕수육 소스가 생각난다는 아내를 위해 탕수육을 절반쯤 만들었지만, 갑자기 아내가 장 폐색으로 병원에 실려가 결국 완성하지 못한다. 아내는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기 전에 남편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 “그동안 간호한다고 고생 많았어. 당신이 해준 밥을 이렇게 오래 먹을 거라고 생각지도 했고, 맛있을 거라고는 더욱더. (…) 내가 죽고 나면 어떻게 살 건지 알고 싶어. 당신이 가장 잘 하는 일,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시작해. 이제 더이상 거칠 게 없을 테니까. 죽기 전에 당신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할 건지 분명한 그림을 보고 싶어.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죽을 수 있게 해줘.”

그림 김미희, 루페 제공
그림 김미희, 루페 제공
그림 김미희, 루페 제공
그림 김미희, 루페 제공
책에는 아내가 언제 어떻게 떠났는지 정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장례를 치렀다는 말에 아 그랬구나, 느낄 뿐이다. 그 뒤에도 아내는 문득문득 다시 찾아온다. 출근하는 아들을 배웅할 때, 제주도를 향해 떠나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 제라늄의 꽃말을 찾아보다 ‘당신이 있어 행복합니다’라는 설명을 마주치는 순간들에. 달걀라면 끓이는 게 할 줄 아는 요리의 전부였던 그가 아내가 떠난 뒤에는 아들의 밥상을 차려주고, 취나물 무침을 무쳐서 얹고 표고버섯 고명까지 예쁘게 올린 국수를 해먹으며 묻는다. “이러라고 아내는 그렇게 까탈스럽게 굴었던 것일까?”

서효인 시인이 추천의 말을 쓴 것만큼 이 책을 정확하고 생생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토록 아름답고 눈부시게 슬프며 놀랍도록 담담한 요리책이라니, 침샘과 눈물샘이 동시에 젖는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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