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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벗기고, 자르고…파본 아닙니다

등록 2018-04-19 20:05수정 2018-04-19 20:51

책등 벗겨 ‘책의 물성’ 강조
‘누드 사철 제본’ 유행
종이책만이 주는 감각으로
아날로그 감성·소장욕 자극

“이거 파본 아니에요?”

최근 김영수 문학동네 편집자는 이런 전화를 받았다. 지난달 출간된 이정록 시인의 <동심언어사전>을 실물을 보지 않고 인터넷서점에서 주문한 독자가 책을 받아보고는 놀라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이 책은 책등을 표지로 덮지 않고 본문 종이를 철한 실이 그대로 보이는 ‘누드 사철 제본'으로 만들어졌다.

출판가에 ‘누드 사철 제본'이 유행이다. 지난해 10월부터 10여종의 책들이 등을 덮지 않고 노출한 채로 나왔다. 2016년 올리버 색스의 <고맙습니다>(스페셜 에디션, 알마)와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검은숲) 등 예전부터 간간이 누드 사철 제본으로 나온 책들이 있었지만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책들이 나온 적은 없었다.

“개인적인 의견으론, 본격적으로 여러 출판사에서 누드 사철 제본을 하게 된 것은 지난해 2월에 나온 <사랑받고 있어>(문학동네)부터였던 것 같다. 이 작업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출판사들에서 많은 문의가 들어왔다.” 최근에 나온 누드 사철 제본을 대부분 진행한 출판인쇄업체 영신사의 문정훈 영업팀장의 말이다. “이어 지난해 11월에 위즈덤하우스에서 낸 마스다 무네아키의 <취향을 설계하는 곳, 츠타야>가 2만부 가까이 팔리면서 상당히 인기를 끌었는데, 이 책이 다시 한 번 누드 사철 제본을 많이 알려 유행을 견인한 것 같다.”

‘누드 사철 제본'은 무선제본과 양장제본(견장정)의 중간쯤에서 멈춘 듯한 형태를 띠고 있다. 제작 비용도 둘의 중간 수준이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책인 페이퍼백 책을 만들 때 무선제본(일명 떡제본)을 하는데, 무선제본은 여러 개의 종이묶음을 실로 꿰매는 ‘사철' 작업을 하지 않고 접착제로 책 표지와 책 본문을 붙인다. 양장제본은 사철 작업을 한 뒤에 두꺼운 표지를 실이나 접착제로 입힌다. 누드 사철 제본은 사철 작업을 한 뒤에 책등을 표지로 덮지 않고 접착제를 바른 뒤 작업을 끝내 철이 된 실이 보이게 제본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누드 사철 제본은 책등에 제목을 쓸 수 없어 서점에 꽂아두면 독자들이 어떤 책인지 바로 알아볼 수 없다는 단점 때문에 좀처럼 시도하지 못했는데, 이를 제목을 쓴 띠지를 두르는 방법으로 보완했다. 책등이 없기 때문에 180도로 책을 완전히 펼쳐도 무리가 없어 메모 등을 하기에 좋다는 점도 장점이다.

출판사들이 누드 사철 제본 방식을 택한 것은 단지 유행을 따라서가 아닌 나름의 이유가 있다. 최근 9년 만에 개정판이 나온 김이경 작가의 <살아 있는 도서관>(서해문집)은 책을 소재로 한 소설집이라는 점을 제본을 통해 부각하려 했다. 책에는 양피지, 파피루스 같은 고대의 제본 방법부터 노예나 사형수의 피부를 가지고 만든 ‘인피' 장정까지 제본의 역사를 다룬 대목이 있어 책 내용과 표지가 잘 어울린다. 책의 속살을 드러낸 제본이 ‘책이라는 매체 자체’에 주목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을 살린 것이다.

지난 1, 3월 출간된 중국의 청춘소설가 칭산의 <칠월과 안생>, <안녕, 웨이안>도 표지에 들어간 자수 그림의 분위기에 맞춰 제본을 선택했다. 임선영 한겨레출판 문학팀장은 “10대 여고생들이 한땀한땀 새긴 자수 그림과 누드 사철 제본이 잘 어울린다고 봤다”면서 “땡스북스 같은 인기 동네서점에서 디자인이 예쁜 책들이 잘 팔리고, 이것이 다른 서점에도 영향을 미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보니 점점 더 표지에 신경을 쓰게 된다”라고 말했다.

더 근본적으로 출판사들이 누드 사철 제본을 선택하는 이유는 전자출판이 확산되고 스마트폰을 통한 문자 소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독자들에게 ‘책만이 줄 수 있는 경험’을 주기 위해서다. 디지털 시대에 엘피(LP) 음반이나 필름카메라 같은 아날로그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와도 다르지 않다. 알마 출판사가 내고 있는 범죄 논픽션 시리즈인 ‘알마 시그눔’ 책들이 오른편 하단 모서리가 절단되어 있는 것도 종이책이라는 물성을 십분 활용한 디자인이다. 김영수 문학동네 편집자는 “전자책 출판이 늘고 종이책 출판 시장이 위축되면서, 책을 소장하고 싶도록 만드는 게 중요해지고 있다. 그래서 출판업계에선 ‘책의 물성’을 부각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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