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소외의 음악-혹은 핑크 플로이드로 철학하기/조지 라이시 외 지음, 이경준 옮김/생각의힘·2만원
BTS 예술혁명-방탄소년단과 들뢰즈가 만나다/이지영 지음/파레시아·1만3000원
대중문화가 가장 찬란하게 꽃핀 시기라 평가받는 1990년대를 지나며, 철학은 영화, 대중음악, 텔레비전 등 우리와 가장 가까운 대중문화와 이전보다 훨씬 깊은 관계를 맺게 됐다. ‘대중문화로 철학하기’처럼 둘을 노골적으로 엮어놓은 말도 유행했다. 지금은 어떨까? 혹시라도 ‘대중문화로 철학하기’란 말에서 ‘쉬운’ 대중문화를 통해 ‘어려운’ 철학에 접근한다는 이미지를 떠올렸다면, 대중문화를 대하는 자세를 다시금 가다듬어 볼 필요가 있다. 거대한 바다가 되어버린 대중문화는, 이제 철학이 온 힘을 들여 그 실체와 의미를 규명해내야 할 대상으로 바뀌고 있다.
<광기와 소외의 음악>은, ‘핑크 플로이드로 철학하기’라는 부제대로, 역사상 가장 성공한 록 밴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밴드 ‘핑크 플로이드’에 관한 책이다. 책 내용보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책이 포함된 ‘대중문화와 철학’(Popular Culture and Philosophy)이란 기획 시리즈다. 미국 오픈코트 출판사에서 펴내는 이 시리즈는 다양한 배경의 필자들을 동원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부터 영화, 대중음악, 상품 등 온갖 대중문화를 철학과 연결하는 작업을 해왔다. 2000년에 미국의 인기 시트콤 <사인필드>를 다룬 <사인필드와 철학>을 첫 권으로 펴낸 이래, 현재까지 무려 116권을 출간해 왔을 정도로 전통과 인기를 자랑한다. 국내에서도 <매트릭스로 철학하기>(2003), <슈퍼 히어로 미국을 말하다>(2010), <라디오헤드로 철학하기>(2012) 등이 번역 출간된 바 있다. <광기와…>는 시리즈 가운데 30권으로, 2007년에 출간됐다.
핑크 플로이드는 1972년 이탈리아 고대 도시 폼페이의 원형극장에서 아무 관객도 없이 공연을 펼치고 이를 영상으로 담았다. ‘핑크 플로이드 라이브 앳 폼페이’(Pink Floyd Live at Pompeii) 영상 갈무리.
핑크 플로이드가 1975년 내놓은 음반 <위시 유 워 히어>의 표지 이미지. 정신적인 문제로 밴드에서 탈퇴한 전 멤버 시드 배럿을 기리는 음반이다.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하지 않을지언정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실험적인 음악과 심오한 가사, 음반 디자인부터 공연 컨셉트까지, 그들은 말 그대로 한 시대의 ‘프로그레시브(기존 대중음악에서 진일보한) 록’을 대변했다. 그들은 관객이 한 명도 없는 텅빈 원형극장에서 공연을 하고 이를 영상으로 남겼고, 그들의 컨셉트 음반이 아예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밴드의 역사도 신화처럼 기구했다. 초창기 사이키델릭한 경향을 이끌었던 시드 배럿(보컬·기타)은 정신적인 문제와 약물 중독으로 점차 밴드에서 멀어졌고, 로저 워터스(베이스)가 대신 주역을 맡으면서 밴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이 시기에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1973), <위시 유 워 히어>(1975), <애니멀스>(1977), <더 월>(1979) 같은 명반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워터스의 ‘독재’는 다른 멤버들과의 불화를 낳았고, 끝내 밴드를 탈퇴한 워터스는 남은 멤버들과 소송까지 벌이기도 했다.
<광기와…>의 필자들은 카뮈, 니체, 베냐민, 아도르노, 푸코, 부버 등 다양한 철학적 사유들을 넘나들며 핑크 플로이드에 대해 나름의 풀이를 내놓는다. 모두를 관통하는 열쇳말은 바로 ‘소외’다. 핑크 플로이드의 최전성기 음반들은 소외란 주제를 천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중심에는 워터스가 쓴 가사들이 있다. 실존 자체가 부조리라고 음울하게 읊조리는 워터스는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작가인 알베르 카뮈와 닮아 있다. “마침내 작업이 끝난 뒤엔 앉지 마, 이제 다른 구멍을 파야 할 시간”(‘브리드’)과 같은 가사는, 끝없이 언덕 위로 바위를 굴러 올려야 하는 카뮈의 부조리한 영웅 시시포스를 떠올리게 한다. “아무도 달려야 할 시점을 말해주지 않았지. 넌 출발 총성을 놓쳐버린 거야”(‘타임’), “괜찮아, 우리가 무슨 꿈을 꿔야 하는지 말해줬잖니”(웰컴 투 더 머신’) 등의 가사들도 타자와의 공감을 가로막는 부조리한 세계와 자본주의적 착취 시스템, 그 속에서 느끼는 소외를 노래한다. 이 같은 세상은 우리를 “벽 속의 수많은 벽돌 가운데 하나인 삶”(‘어나더 브릭 인 더 월’)으로 데려갈 뿐이다.
1982년 핑크 플로이드는 영화 감독 앨런 파커와 함께 자신들의 실험적인 음반을 한 편의 영화 <핑크 플로이드 더 월(Pink Floyd: The Wall)>로 옮겼다. 영화의 한 장면이 담긴 포스터 갈무리.
1982년 핑크 플로이드는 영화 감독 앨런 파커와 함께 자신들의 실험적인 음반을 한 편의 영화 <핑크 플로이드 더 월(Pink Floyd: The Wall)>로 옮겼다. 영화 포스터 갈무리.
과거 핑크 플로이드 같은 록 밴드가 대중음악의 대표 주자였다면, 요새 그 정도의 파급력을 지닌 존재는 ‘아이돌’이다. 국내 저작 <비티에스(BTS) 예술혁명>은 가장 주목받는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이하 방탄)과 프랑스 현대철학자 질 들뢰즈를 만나게 한 책이다. 들뢰즈 영화철학을 공부한 지은이는 “방탄은 아이돌 그룹을 넘어 오늘날 사회 구조, 미디어, 예술형식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본적인 구조 변화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이것을 ‘방탄현상’이라 부르며, “세상을 바꾸는 출발점이고, 혁명적 생성”이라고까지 평가한다. 무엇 때문인가?
지은이는 방탄과 방탄의 팬들(‘아미’라고 불린다)의 ‘수평적인 상호 연대’가 기존의 ‘수직적인 위계 질서’를 해체하고 있는 것이 ‘방탄현상’의 핵심이라고 풀이한다. “아 노력 노력 타령 좀 그만둬/ 아 오그라들어 내 두 손발도”(‘뱁새’), “그냥 살아도 돼 우린 젊기에/ 그 말하는 넌 뭔 수저길래/ 수저수저거려 난 사람인데/ So what/ 니 멋대로 살어 어차피 니 거야/ 애쓰지 좀 말어 져도 괜찮아”(‘불타오르네’) 등 방탄의 가사에서 볼 수 있듯, 그들의 음악에는 일종의 ‘부친살해’, 곧 자신을 옥죄는 기존 사회의 위계질서를 해체하겠다는 메시지가 담겼다. 불평등한 사회 구조는 ‘말 잘 듣는 사람들’로부터 계속 이익을 챙기는데, 이것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또 중소기획사 소속인 방탄은, 기존의 위계적인 미디어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고 팬덤과의 수평적인 ‘연대’로 더 큰 지지를 끌어냈다. 세계로 확산된 팬덤은 ‘영어에 종속된 한국어’ 따위의 문화적·언어적 위계질서마저 해체했다.
지은이는 들뢰즈가 제시한 ‘리좀’(뿌리줄기) 개념으로 이를 풀이한다. 중심 줄기와 주변 줄기가 수직적·위계적으로 연결된 ‘수목적’(tree) 체계와 달리, 단일한 중심이 없는 ‘리좀적’ 체계는 어느 방향이든 서로 합쳐지고 갈라지며 뻗어 나가는 수평적인 체계다. ‘방탄현상’은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연결접속을 통해 상이한 차원들로 다양한 의미를 생성하고 있는 다양체”다. “우리의 규율은 없다 해도/ 사랑하는 법은 존재하니까”(‘베스트 오브 미’)라는 방탄의 가사처럼, “풀뿌리 팬덤의 자발적인 연대와 실천,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낸 변화는 들뢰즈적 의미에서 ‘혁명’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메시지다.
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핑크 플로이드의 <위시 유 워 히어> 음반 표지 이미지를 ‘오마주’하듯 재현했다. 유튜브 갈무리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며’를 모티브로 삼은 방탄소년단의 뮤직비디오 ‘봄날’의 한 장면.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방탄소년단의 ‘윙스 투어 파이널’ 콘서트 장면.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제공
‘수많은 벽돌 가운데 하나’가 되길 거부하고, 수직적 위계질서에서 벗어나 ‘리좀적’ 풀뿌리로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비티에스…>는 “표면적으로는 정치와 무관해 보이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우리에게 강요되는 수목적 위계 구조를 거스르고 리좀적으로 횡단하면서 삶의 다른 가능성을 찾으려는 실천적 시도”를 강조한다. <광기와…>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 사유함으로써 타자가 당신을 위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가치 있고, 무엇이 중요한지 결정하도록 놔두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로저 워터스는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의 근본적인 메시지가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힘든 작업에 몰입해도 괜찮다는 것, 스스로 사유해도 괜찮다는 것”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결국 철학의 궁극적인 주제는 어떻게 살 것이냐다. 늘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는 대중음악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보내고 있는 메시지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