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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독립 국가’ 아닌 ‘민주주의’ 요구하는 쿠르드 사상가

등록 2018-04-12 19:50수정 2018-04-12 19:57

19년째 독방에 감금된 압둘라 외잘란
‘나라 없는 민족’ 쿠르드 대표 사상가
터키 정부는 ‘분리주의자’ 딱지 붙이나
그가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와 공존

압둘라 외잘란의 정치 사상-쿠르드의 여성 혁명과 민주적 연합체주의
압둘라 외잘란 지음, 정호영 옮김/훗·2만5000원

과연 ‘우리나라’를 만드는 것이 ‘나라 없는 민족’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과제일까? 여기 세계 최대의 ‘나라 없는 민족’이 있다. ‘산악 부족’이란 뜻의 수메르어에서 유래한 말인 ‘쿠르드’로 불리는 이들은, 중동의 핵심 지역인 페르시아, 아제르바이잔, 아랍, 아나톨리아에 걸쳐 오랫동안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쿠르디스탄’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중동 토착의 패권적 세력들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들의 경합과 전쟁, 그 결과로 탄생한 근대 국민국가들 속에서 쿠르드는 “전 세계에서 국민국가가 없으면서 가장 그 수가 많은 인민”이 됐다. 쿠르드와 그들이 걸쳐 있는 터키, 이라크, 이란, 시리아 등 중동의 각 국민국가들과의 관계는 이른바 ‘중동 문제’의 핵심으로 꼽힌다.

압둘라 외잘란(69)은 쿠르드의 정치 지도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1978년 터키에서 ‘쿠르드노동자당’(PKK)을 만들어 쿠르드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벌였고, 1999년 터키 정부에 붙들려 19년째 임랄리섬 감옥의 독방에 갇혀 있다. 변호사조차 제대로 만나볼 수 없는 삼엄한 감금 상태에서 그는 10여권의 책을 써냈는데, 여기 담긴 정치 사상은 세계 20개 언어로 번역되는 등 쿠르드 사람들뿐 아니라 전 세계 사상계의 관심을 끌었다. 최근 국내 출간된 <압둘라 외잘란의 정치 사상>은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국제단체 ‘인터내셔널 이니셔티브 압둘라 외잘란 석방-쿠르디스탄의 평화’(‘이니셔티브’)가 그가 쓴 여러 글들을 하나로 묶은 책이다. 국내 중동·이슬람 전문 출판사 ‘훗’이 ‘이니셔티브’와의 연대 사업 차원에서 우리말로 번역 출간했다.

2015년 쿠르드노동자당(PKK)과 신자르저항부대(YBS) 소속 여성 전사들이 압둘라 외잘란의 초상을 들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2015년 쿠르드노동자당(PKK)과 신자르저항부대(YBS) 소속 여성 전사들이 압둘라 외잘란의 초상을 들고 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쿠르드의 역사와 외잘란의 현재 상황을 보면, 그들의 목표가 당연히 ‘독립국가 건설’일 것이라 지레 속단하기 쉽다. 그러나 뜻밖에도 외잘란은 쿠르드의 독립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와 쿠르드노동자당은 초창기에 ‘분리 국가’를 목표로 삼은 적 있으나, 이미 1995년에 이를 강령에서 지워버렸다. “외잘란은 폭력을 통해 쿠르드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는 분리주의 테러리스트”라는 오해를 확산시켜온 것은 터키 정부와 주류 국제사회다. 터키 정부는 쿠르드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억압적인 동화 정책을 앞세워 쿠르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왔고, 주류 국제사회는 중동에서 이익을 뽑아먹으려 전쟁을 부추기고 서로 다퉈왔다고 이 책은 지적한다. 실제로 외잘란의 주장을 직접 읽어보면, 그는 ‘독립국가’가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터키·이라크·이란·시리아 등 기존 국민국가의 틀을 인정할 테니, 그 국가들을 쿠르드를 포함한 모든 사람과 문화,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적인 국가로 만들라는 것이 외잘란 주장의 핵심이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요구지만, 외잘란은 ‘민주적 민족’, ‘민주적 연합체주의’ 등 나름의 개념들을 제시하며 이를 하나의 일관된 정치 사상으로 꿰어보인다. 그 밑바닥에는 가장 모순적이고 절박한 현실로부터 길어올린 근대 자본주의와 국민국가 체계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있다. 그는 과거의 낡은 봉건 질서가 근대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국민국가라는 새로운 권력 독점 단위를 낳았다고 보고, 이 자장 안에 놓인 쿠르드 문제 역시 근본적인 해법은 ‘자본주의 근대성’을 넘어서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쿠르드가 국가를 가지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 근대성을 넘어서는 대안적 사회라는 개념을 실현하는 데 이익이 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압둘라 외잘란의 초상. 훗 제공
압둘라 외잘란의 초상. 훗 제공

다만 외잘란은 “국가를 전적으로 거부하거나 완전히 인정하는 것은 시민사회의 민주적인 노력에 유용하지 않다”고 말한다. ‘국가’를 극복하는 것은 장기적 과정이며, 국가에 맞서 ‘자기방어’에 나설 수 있는 시민 사회와 이들을 떠받치는 원리로서 민주주의가 그것의 단일한 지향점이 된다. 한마디로, 그의 ‘민주적 연합체주의’는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다양한 공동체(민주적 연합체)들과 국민국가의 ‘공존’을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라 없는 민족’이란 현실에서 출발한 그의 사유는 이미 쿠르드와 터키, 중동 등 특정한 지리역사적 영역을 넘어서 민족과 국가, 민주주의에 대한 사고의 대전환을 요구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는 2013년 쿠르드에게 자치를 허용한 ‘로자바 사회 협약’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여성 착취’를 봉건 시대부터 근대 자본주의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지배 체제의 핵심이라 지적하는 등 ‘여성 해방’ 이론(‘지니올로지’)이 그 사유의 뿌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물론 현실은 간단치 않다. 2011년 발발해 시리아 정부군과 반군, ‘다에시’(이슬람국가·IS), 쿠르드 민병대, 이들과 엮인 외부의 배후세력 등이 엎치락뒤치락 8년을 이어온 시리아 내전은 이 지역의 복잡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올해 초 터키는 ‘쿠르드의 분리 독립을 막는다’는 명분을 앞세워 쿠르드인들이 주로 사는 시리아 북부의 아프린 지역을 침공해, 전쟁을 또다른 양상으로 끌고갔다. 그러데 정작 외잘란이 요구하는 것은 ‘분리 독립’이 아니라 ‘민주주의’다. 이 간극은, 우리가 어느 한쪽에서만 나오는 큰 목소리에 치우치지 않고 복잡한 현실을 더 냉정하고 다각적으로 판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해준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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