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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깨알같은 자료들로 ‘해방 공간’을 새롭게 보다

등록 2018-04-12 19:50수정 2018-04-12 19:53

해방의 공간, 점령의 시간
정용욱 엮음/푸른역사·2만9500원

1945년 8월15일 일제의 패망으로 한국은 ‘해방’됐다. 이때부터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 시기를 흔히 ‘해방 공간’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미국·소련에 의한 새로운 ‘점령’의 시기이기도 했다. ‘해방의 공간’으로도, ‘점령의 시간’으로도 읽을 수 있는 이 한 단락은 한국 현대사의 ‘원형’을 이룬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기로 꼽힌다. <해방의 공간, 점령의 시간>은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 젊은 연구자들이 지난 10여년 동안 이 시기를 말해주는 다양한 자료들을 발굴하고 토론해온 결과물을 묶은 책이다. 미군정 자료 발굴 및 연구에 힘을 쏟아온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엮었다.

우선 ‘해방의 공간’이면서 ‘점령의 시간’이었던 이 시기의 성격적 규정을 시도한 첫번째 논문이 눈에 띈다. 미군의 남한 점령은 ‘헤이그 규약’을 근거로 삼았는데, 핵심 내용은 “피점령 지역은 점령국의 영토가 아니며 이 지역의 주권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인의 자치정부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점령 지역의 주권정부 부재’라는 모순이 발생했다. 결국 미군정은 ‘사실상의 정부’를 자임하는 데까지 나아갔는데, 미군정 산하 ‘법률심의국’의 자료들은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다양한 법률 해석을 생산해냈다. 이는 자의적으로 “통치 및 정책 결정의 주체”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 미군정의 지위와 성격을 잘 드러내어준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해 만든 좌우합작위원회의 1947년 해단식 사진. 좌우합작위원회는 해방 공간에서 조미공동회담을 여는 등 미군정과 줄다리기를 벌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해 만든 좌우합작위원회의 1947년 해단식 사진. 좌우합작위원회는 해방 공간에서 조미공동회담을 여는 등 미군정과 줄다리기를 벌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미군정 산하에서 미온적인 친일파 청산과 고질적인 식량 부족 문제는 1946년 민중의 불만이 터져나오는 ‘10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미군정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여운형·김규식이 주도한 ‘좌우합작위원회’를 끌어들여 ‘조미공동회담’을 열었고, 좌우합작위원회 역시 이를 계기로 경찰·친일파 문제를 해결하며 우익에게 넘어간 정치적 주도권을 가져오려 꾀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이후 급박하게 진행된 단독정부 수립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실로 이뤄지지 못했다.

1946년 7월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공판을 다룬 신문기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46년 7월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공판을 다룬 신문기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다른 지역과 달리 주한미군정의 공보기구는 ‘정보 수집’이라는 특수한 기능을 수행했으며, 이것이 ‘사실상의 정부’로서 미군정을 떠받쳤다는 지적도 인상적이다. ‘소련이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다’는 1945년 12월27일치 <동아일보>의 왜곡 보도에도 공보기구의 활동이 관련되어 있다는 의심이 제기된다. 공보기구의 활동 외에도, ‘통치 주체’로서 미군정이 지닌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서 이미 드러난 바 있다. ‘조선공산당이 인쇄소인 조선정판사에서 1200만원 상당의 위조지폐를 제조해 유통시켰다’고 정리되는 이 사건은, 조선공산당 활동을 불법화해 남한에서 ‘좌우’가 역전’되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석명서’를 분석한 논문은, 고문 및 짜맞추기 수사가 진행됐을 가능성과 함께 “미소공위 휴회의 파장과 남한 경제악화 문제, 그리고 조선공산당이라는 강력한 야당 타도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해던 미군정과 우익의 ‘정치적 의도’를 지적한다.

이밖에도 미군정이 시행한 여론조사, 우익 청년단 테러, 주한미대사관과의 외교 관계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실증적 연구들을 통해 ‘해방 공간’을 다각도로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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