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김동진 지음/위즈덤하우스·1만5000원
“고기 사줄게”라는 말에는 ‘최고로 대접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지금도 비싸서 자주 먹기 힘든 한우, 과연 언제부터 보편적으로 먹기 시작한 것일까.
김동진은 최근 한국의 생태환경사를 통해 사회경제사를 들여다보는 작업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역사저술가다. 그는 지난해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된 <조선의 생태환경사>에서 “조선 시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소고기였고, 1인당 섭취량이 20세기 말(1990년대 포함)에 한국인들이 섭취한 양보다 많았다”라고 주장해 반향을 일으켰다. 그가 이번에 낸 <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에서 조선 시대의 활발한 소고기 탐식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알다시피 소는 농업국가인 조선에서 매우 중요한 생산수단이었다. 이 때문에 소의 도살과 판매를 국가에서 규제했다. 우역(소전염병)이 돌면 급격하게 소의 숫자가 줄었기에, 강력한 우금령(소도살금지령)을 내려 다시 소의 숫자를 늘리는 일은 중요한 행정 행위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사람들은 소 없으면 농사 못 짓는다며 벌벌 떨지 않았다. 우역이 돌기 시작하면 ‘어차피 죽을 소 먹어치우자’며 최후의 만찬을 열었고, 우금령으로 소가 늘어나면 다시 또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단원 김홍도(1745~?)가 그린 <행려풍속도 8폭 병풍>(行旅風俗圖八幅屛風) 복제품 가운데 <설후야연>(雪後野宴). 겨울에 양반과 기생들이 화로를 피워놓고 모여 앉아 소고기를 구워 먹고 있는 풍경을 그렸다. 19세기 초에 나온 <동국세시기>도 ‘설하멱적’(雪下覓炙, 눈 아래에서 구해 찾는 소고기구이)이란 풍속을 소개하고 있다. 그림 원본은 프랑스 기메 국립 아시아 미술관에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조선은 17세기 후반부터 전국적으로 하루 1000마리의 소를 잡았다. 17세기 후반인 조선 숙종 2년(1676년)에 과거급제자 유익성은 상소에서 “하루에 죽이는 것이 1000여 마리로 내려가지 않는다”라고 썼고, 19세기 전반에 쓰인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영조 51년(1775년) 인천 유학 이한운은 한 해에 도살되는 소의 수를 39만 마리 정도로 봤고, 지은이는 소 증식률을 3분의 1 정도로 보면 당시 전국에서 120만 마리 정도의 소가 있었으리라 추정한다. 지난해 3, 4분기 국내 사육하는 한·육우가 309만 마리(통계청 가축동향 조사)라는 점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숫자다.
소고기를 ‘줄지어 걸어놓았다'는 뜻의 ‘현방'이 서울에만 20~25개 정도로 유지됐다. 현방은 나라에서 독점 판매권을 받았기에 이윤을 많이 남겼다. 그러자 허가 없이 소를 잡아 몰래 파는 곳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 세력가와 결탁해 그의 집에서 소를 잡는 이들도 있어, 심지어 정조 2년(1778년)엔 왕손인 은언군 이인이 이 일로 적발된 일도 있었다.
전쟁이나 고된 훈련에 참여한 군사들에게 좋은 먹을거리를 베푸는 것을 ‘호궤'라고 했는데, 역시 소고기가 빠질 수 없었다. 지은이는 <승정원일기> 등의 자료를 토대로 계산해, 숙종 2년(1676년)엔 한 사람당 많게는 적어도 400g, 영조 4년(1728년)엔 그보다 두 배인 1㎏의 소고기가 지급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요즘 고기 1인분(150~200g)으로 보면, 2~5명 정도가 먹는 분량을 한 사람이 먹은 것이다.
지식인들도 나서서 소고기 예찬을 늘어놨다. 이수광은 <지봉유설>(1614년)에서 “소고기는 가장 사람을 이롭게 한다”며 평소 소고기를 즐기고 80~90살 장수한 사람들의 이름을 줄줄 읊었다. 허균이 1611년 <도문대작>이란 글을 썼는데, 이 제목은 ‘푸줏간 문을 향해 입맛을 다신다’는 뜻이다. 그는 이 글에서 ‘<예경>에서 팔진미의 등급을 기록하고, 맹자가 생선과 곰발바닥을 왜 구분했겠느냐’며 선현들도 별미 먹기를 금지하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19세기 작자 미상의 <8첩 경직도>는 두첩씩 짝을 이뤄 사계절을 그리고 있는데, 그중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풍경이 나와 있다. 한국자수박물관 소장
먹는 법과 보관하는 법도 섬세하게 개발했다. 대부분 쟁기를 끌 수 없는 늙은 소를 먹었기에 질긴 고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다. 1670년께 정·종2품 관료의 아내인 정부인 안동 장씨가 쓴 <음식디미방>에선 “살구씨와 뽕잎을 함께 삶으라”는 요리법이 적혀 있다. 호두를 같이 넣어 상한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만드는 법이 나와 있는 책들도 있다. 육포, 훈연, 염장 등 여러 보존법과 ‘황탕’, ‘서여탕’, ‘맛질방문’(양볶음) 등 다양한 조리법을 읽다 보면 소고기 생각이 간절해진다.
자료 부족으로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대목들이 많아, 조선 시대 기층민들까지 보편적으로 먹을 정도였는지는 알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책을 읽고 나니 마치 조선 시대 사람들 틈에 껴서 한바탕 푸지게 소고기를 구워 먹은 것 같은 기분에 든든하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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