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 ‘번역청 설립’ 어떻게
학술 출판을 오랫동안 해왔던 이승우 도서출판 길의 기획실장(왼쪽)과 청와대에 ‘번역청 설립’ 국민청원을 냈던 박상익 우석대 교수가 6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에서 우리나라 번역 및 출판 실태와 문제점,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박상인 우석대 교수는 <번역은 반역인가>(2006), <번역청을 설립하라>(2018) 같은 저작을 펴내는 등 오랫동안 번역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올해 초에는 같은 제목의 책 출간과 연계하여 ‘번역청을 설립하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내어 큰 관심을 모았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우리는 유럽의 16~17세기 수준
학술 고전 번역 1차 과제 삼아
사상사 큰줄기 잡을 고전 선별해야” 박 번역청 설립 제안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뜻은, ‘번역청’이든 ‘번역위원회’든 그 형태가 어떻든 간에 국가 재정으로 국민의 지식접근권, 행복추구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중세 유럽을 보면, 라틴어를 학술의 보편 언어로 쓰다가 16~17세기 들어 자국어 사용이 본격화된다. 라틴어를 자기 말로 옮기지 않으면 이전 세대의 텍스트를 읽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라틴어 번역을 시작했고, 점차 외국의 명저 번역까지 하게 됐다. 이 과정을 국가가 대대적으로 주도했다. 이것을 500년 동안 축적해온 것이 서양 학술의 역사다. 비록 물리적 시간은 같지만, 학술에 관한 한 현재 한국의 역사적 시간은 유럽의 16~17세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문자를 본격적으로 쓴 역사는 100년도 안 됐다. 때문에 서양이 전에 했던 작업, 곧 번역을 지금이라도 소급해서 해줘야 할 필요성이 크다. 이 마키아벨리의 고전 <군주론>은 저자 사후 500년 동안 판본이 제대로 확정되지 않고 있다가, 이탈리아 정부가 지원에 나서서 지난 2006년 ‘국가 판본’(마르텔리판)이 나왔다. 당시 살레르노 출판사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깊이 참여했고, 어마어마한 주석이 달린 책을 만들어냈다. 이것이야말로 국가가 학술·출판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거기서 출판은 왜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이에 견줘 우리에겐 ‘모든 걸 다 동원해서 표준 정본을 만들어낸다’는 인식 자체가 부족하다. 출판계, 학계, 관료 모두가 그렇다. 세 분야에서 ‘인식의 전환’이 시급하다. 출판인으로서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출판의 구실이다.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지식인 에라스무스는 전설적 출판인 알두스 마누티우스의 공방에 와서 자기 책의 활자를 하나씩 일일이 확인했다고 한다. 아무리 좋은 결과물도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으면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 박 거칠게 말해, 글씨만 박아넣으면 책이 되는 줄 아는 교수들이 많다. 공부의 결과물로서 책의 의미와 그 기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학자의 연구 결과는 출판물로 활자화되어야 사회로 흘러가서 일반 독서 대중에게 영향을 일으키고 지식을 축적하는 효과를 낸다. 존 밀턴(1608~1674)은 <아레오파기티카>에서 “좋은 책은 위대한 영혼의 고귀한 생혈이다. 책은 한 생명이 죽은 뒤에도 그 영혼을 불멸의 보물로 고이 간직한다”고도 했다. 그러나 우리 학계는 저술과 번역, 그리고 그것을 담는 출판에 여전히 무관심하다. 논문만 쓰면 임용, 재임용 등 자급자족이 완결되는 대학 사회의 구조에 그 이유가 있다. 대다수 대학이 학술 결과물로 책보다는 논문을 요구하고, 더우기 번역은 제대로 평가조차 하지 않는다. 이 실제로 번역을 해보자고 제안하면, 대부분의 학자들이 논문을 비롯한 학교 일들에 치어 하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면 끝내 우리말로 번역되지 못한 텍스트만이 결과로 남는다. 저술과 번역을 논문 못지 않은 교수 평가 항목으로 넣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박 학교, 연구소마다 편차가 크다. 교육부에서 일률적으로 방침을 정해 모든 대학이 그렇게 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단행본 1권의 학술적 성취는 논문 3~4편에 필적한다고 본다. 우리 학계는 왜 이렇게 번역을 하찮게 여길까? 자국 문화와 자국어에 대한 긍지, 포부, 비전 같은 게 원천적으로 부족한 것이 아닐까? 17세기를 살았던 밀턴의 저작에선 그가 유럽 여행을 다녀온 뒤 앞으로 라틴어가 아니라 영어로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는 대목이 나온다.
20년 넘도록 학술 출판 분야에 매진해왔던 도서출판 길의 이승우 기획실장은 기획 역량을 지닌 ‘컨트롤 타워’를 국가 차원에서 마련하는 것이 ‘번역청 설립’ 논의의 고갱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기획 단계에서부터 출판이 참여해야 한다고 짚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출판사 홀로 번역·출판 꿈도 못 꿔…
국가가 학계·출판계 아울러
기획·집행력 지닌 컨트롤 타워 돼야” 이 출판계에서 번역 작업을 대우해주는 방법은 인세 정도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출판 시장이 시장화, 상업화되고 학술출판 영역이 급격히 위축되다보니, 학술 번역이 갈수록 설 땅이 없어지고 있다. 1년에 신간을 20종 낸다 쳐도, 학술책 1000부 찍는 출판사가 존립하기 어렵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같은 고전을 일개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때문에 국가가 학술 번역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단지 지원만 늘리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번역하고 출판할 것인가 하는 가치 기준을 세우는 것이 절실하다. 출판 역량이 결합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학자들은 대체로 자기 분야만을 잘 알지만, 출판인들은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따진다. 학계와 출판계를 모두 아우르며 일관된 가치 기준을 세우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곧 기획 역량을 지닌 ‘컨트롤 타워’가 ‘번역청 설립’ 제안의 고갱이라고 본다. 박 번역청 같은 것이 설립된다면, 학술 고전에 대한 번역을 1차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상사의 큰 줄기를 잡을 수 있는 고전들을 선별하고, 우선 순위를 정해서 기초적인 번역을 해나가야 한다. 방대한 공무원 조직을 새로 만드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 출판계, 대학, 번역계 역량을 모을 최소한의 실무 역량만 있으면 된다. 우리 한문 고전을 번역하는 고전번역원이 시간적 단절을 연결시키는 구실을 한다면, 번역청은 정신적으로 고립된 섬나라 같은 이 나라의 공간적 단절을 연결시키는 구실을 할 것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처럼 우리가 서 있는 땅에 대한 인식, 곧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문학은 16~17세기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 국가에서 예산을 받아와서 집행하는 것은 행정조직이 되겠지만, 번역을 직접 실행하는 것은 학계와 출판계다. 이번에 교육부와 연구재단이 번역 지원을 강화하겠다고 나선 것은 크게 환영할 일이다. 다만 기획의 필요성이나 출판과의 결합이 빠져 있는 등 전체적인 방향에 대해선 우려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예산을 늘리고 사업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번역 및 학술 지원에 대한 크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본다. 사회·정리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