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동아시아인가-상황 속의 정치와 역사
쑨거 지음, 김민정 옮김/글항아리·3만2000원
동아시아 담론은 2000년대에 떠들썩하게 주목받았지만 언젠가부터 그 활력이 눈에 띄게 사그라들었다. 애초 ‘동아시아’라는 범주 자체가 모호한 데다, 그것을 담론의 근거로 삼기 위해선 기존 서구의 ‘보편’ 이론과 동아시아의 ‘특수’ 경험을 꿰어내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어떤 학자들은 동아시아를 사유의 근거로 삼아 분투하길 그치지 않는다. 그 어려움들을 넘어서는 것이야말로 기존의 강제된 사유의 틀을 깨는 돌파구이기 때문이다.
쑨거(63) 중국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은 그 대표적인 학자다.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왜 동아시아인가>는 2000~2011년 약 10년 동안 발표한 그의 글들을 묶은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타이완의 비판적 지식공동체 ‘타이서’, 미군 기지가 있는 일본 오키나와의 역사, 중국에서 발생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 황석영의 소설 <객지> 등 이른바 ‘동아시아’의 다기다양한 특수한 경험들을 횡단하며 자신의 고유한 동아시아 담론을 갈고 닦는다.
지난 2013년 방한 당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쑨거 중국 사회과학원 문화연구소 연구원.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먼저 ‘이론(理論)의 즉물(卽物)’이란 제목의 서문은 딱딱하고 추상적이지만, 지은이가 제시하는 동아시아 담론의 기본적 구조와 그것의 사상사적 위치를 보여주는 핵심 대목이다. 지은이가 마주한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단순하게 풀이하면, 서구의 ‘보편적’ 이론으로 비서구 세계의 ‘개별적’ 경험을 담아낼 수 없는 ‘인식론적 오류’다. 그는 ‘동질성의 추상’에 기반한 서구의 이론 모델이 다원화된 세계를 제대로 담아낼 수 없게 됐으며, 특히 비서구 세계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구체적 경험들을 이론화하는 데 더욱 큰 어려움에 빠졌다고 본다. 때문에 “이론을 서술하고 구축하면서 그것의 경험성과 개별성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지은이가 말하는 ‘이론의 즉물’이다. 청나라 사상가 이탁오 등의 사유를 빌린 지은이는 “차이의 보편성이야말로 보편성의 진실한 형태”라고 지적한다. 추상적인 보편성은 오직 개별적인 존재를 거쳐야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데, 그렇게 형언할 수 있는 보편성은 반드시 다양하고 이질적이란 풀이다.
분단체제론, 제3세계론 등 서구 담론에 포획되지 않는 자생적인 사유를 펴온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런 인식론은 지은이가 다케우치 요시미(1910~1977), 미조구치 유조(1932~2010) 등이 이어온 사상사적 계보 위에 서서, 또 동아시아의 여러 다양한 사상가들과 교류하며 발전시켜나가고 있는 ‘방법으로서의 동아시아’ 담론의 기초를 이룬다. 다케우치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 형성의 과정”이라는 의미로 ‘방법’이란 말을 썼다. 지은이도 동아시아가 단일하고 자족적인 범주, 곧 ‘실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동아시아에 매달리는 이유는, 그것을 ‘방법’으로 삼아 각자가 맞닥뜨린 개별적 경험들을 새롭게 보편화하는 것만이 서구 중심 이론이 강제해온 이분법적 ‘냉전 이데올로기’를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동아시아를 단순히 지리적 상상의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지식의 범주로서 간주하는 것이 나름의 합리성과 대체불가능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관련 저작이 중국어권에서 출간되는 등 한국 지식인 가운데 동아시아 담론을 가장 활발하게 펼쳐왔다는 평가를 받는 백영서 연세대 교수.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이론의 즉물’은 추상적 보편성을 거부하기 때문에, 대신 동태적인 긴장관계 위에 놓인 개별적이고 이질적인 경험들과 그것들이 서로 맺고 있는 연관성을 천착한다. “개별성은 동일한 구조 속의 상이한 위상을 통해 상호 연관”되기 때문에, 상호 소통 속에서 그 연관성을 들여다보는 것이 이 새로운 인식론의 기본인 셈. 때문에 지은이는 지난 10년 동안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지역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개별적이고 이질적인 경험들을 횡단하는 데 주력해왔다. 예컨대 타이완의 지식공동체에서 ‘대륙 중국인’과 구분되는 정체성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일본 오키나와 민중들로부터 ‘중심-주변’의 관계 자체를 거부하는 생각을 읽으며, 중국의 ‘사스’ 사태에서 서구 이론의 틀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종합사회’로서 중국의 위치를 짚어낸다.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란 개념을 제기했던 일본의 정치사상가 다케우치 요시미. <한겨레> 자료사진.
특히 지은이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백영서 연세대 교수 등 한국 사상가들로부터 중요한 것들을 배웠다고 말한다. 애초 이 책 자체가 중국에서 백영서의 <사상으로서의 동아시아-한반도 시각의 역사적 실천>과 하나의 시리즈로 출간된 것이다. 백낙청은 피동적으로 주어진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민중이 주도해 근대민족국가 체제를 넘어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백영서는 한반도의 탈중심적·주변적 위치가 되레 동아시아 지역의 수평적 사고와 연대를 발전시키는 요람이 될 가능성을 타진한다. “실제의 현실에서 출발해 원리적 탐색을 진행”하는 이들의 작업은, 지은이가 말하는 ‘이론의 즉물’과도 들어맞는다. 지은이는 “이들은 한국의 ‘주변’적 위치를 이론적 상상력을 지닌 시야로 설정해냈고, 이는 우리가 자신의 역사를 마주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을 제공했다”고 평가한다.
지은이는 “불평등과 차별로 가득 찬 현대 세계에서 진정으로 소통의 어려움을 조성하는 것은 이해의 장벽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하는 성의 문제”라고 말하는데, 이 책에 담긴 10년 동안 그가 벌여온 소통의 발자취는 ‘성의’의 차원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