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지 지음, 안솔 그림/가르스연구소·1만5000원 “살당보민 살아진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 정신지씨는 제주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마친 뒤 스무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12년 동안 현지 대학과 대학원에서 지역연구학을 배웠다. 실연을 당하고, 박사 과정을 중도 하차한 뒤 제주로 돌아온 그를 위로한 것은 고향 할망(할머니)들의 말이었다. 그는 인류학자의 경력을 살려 2012년 봄부터 5년 동안 매주 한 명꼴로 제주 할망들을 만났다. 할망들은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는 그를 만나면 “여기서 뭐 하냐?” “뭘 훔치러 왔냐?” “난 예수 안 믿는다”라며 말하지만, 금세 마음을 열고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삶들이 <할망은 희망>에 담겼다. 제주 할망과 하르방(할아버지)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누구도 예외일 수 없었던 ‘제주 4·3 사건’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1929년생인, 만날 당시 84살의 동갑내기 부부. 19살 때 4·3 사건이 터졌다. 주민 소개령이 내려져 할망이 해안으로 궤짝을 메고 내려갈 때 한 순경이 다른 이에게 “쏴부러”라고 하자, 옆에 있던 다른 순경이 “여자난 한 번 봐주랜”(여자니까 한 번 봐줘)이라고 말해 목숨을 건졌다. 삼대독자인 하르방은 첫 부인이 딸을 낳고 불임이 되자 둘째 부인으로 29살이던 할망을 들였다. 그 할망은 아들 셋을 낳았고, 첫아들은 첫째 부인 호적에 올렸다. 두 아내는 한 번도 싸우지 않고 자매처럼 살며 아이들을 키우다가, 첫째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떴다. 치매에 걸려 기억이 오락가락하던 하르방 이야기도 처연하다. 농민운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한 그는 혀를 깨물어 죽으려던 그 순간 들려온 “살아남아 증인이 되라”는 말에 삶을 택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이렇게 가끔 내 이야기를 들으러 와 줘”라고 말한 노인은 결국 언젠가부터 그를 다시는 알아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지은이는 이들을 찾아 자꾸 이야기를 듣게 되는 이유를 이렇게 담담하게 말한다. “지금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지금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오늘의 내가 필요로 하는 삶의 기술을 나는 오늘의 할망에게 배우고 싶을 뿐이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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