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한중일 세계사 1권-서세동점의 시작
굽시니스트 글·그림/위즈덤하우스·1만4800원
시사, 역사만화와 <에반게리온> 같은 일본만화, 교복과 제복 집착 같은 일본 서브컬처(비주류 하위문화), 환단고기나 성서 같은 종교적 내러티브를 잇는다? 거기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드립’(농담이나 개그를 치는 일)까지 듬뿍 쳐서?
‘굽시니스트’, 본명 김선웅(37) 작가는 시사만화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는 대표주자다. 서브컬처에 웬만큼 빠삭하지 않은 사람은 작가가 만화에 집어넣는 농담이나 의상 설정 등을 다 이해하지 못할 정도다. 그가 아니면 누가 시사만화에서 문재인 대통령(민주당 대표 시절)에게 여고생 교복을,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여성 만화 캐릭터 코스튬을 입히겠나. 그래서 특히 젊은 세대 독자들은 그를 ‘굽본좌’라며 추앙한다. 그의 만화는 매우 이질적인 분야를 성공적으로 연결하는 데서 오는 쾌감을 듬뿍 안겨준다. 28일 경기도 고양시 자택에서 <한겨레>와 만난 그는 “시대가 파편화되어 있다. 모든 사람에게 읽힐 수 있는 이야기란 존재할 수가 없다. 몇몇 무리와만 통하면서 좁고 깊게 가는 시대”라며 “웃음의 허들이 낮은 분들 덕분에 먹고산다”고 말했다.
<본격 한중일 세계사>를 그린 ‘굽시니스트’ 김선웅 작가는 각 나라를 상징하는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각국 간의 관계를 코믹하고도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는 중국은 판다, 한국은 호랑이, 일본은 고양이로 그린다. 일러스트 김선웅.
어려서부터 만화 그리기를 즐겼던 그는 대학에선 포르투갈어를 전공하면서 만화동아리 활동을 했다. 교사가 되려고 대학원 역사교육과에 진학했지만, ‘만화’ ‘역사’ ‘밀리터리’ 등 여러 분야의 덕후(한 분야에 집중하는 사람)인 그가 세상사에 관심을 끊고 고시 준비에 몰두하기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2005년께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에 ‘굽시니스트’라는 필명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해 2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만화를 출판하기도 했다. “10년 전에 굽신굽신(‘굽실굽실’이 표준어)이란 말이 유행이라서 아무 생각 없이 만들었던 닉네임이다.” 진보 성향 주간지 <시사인> 기자의 눈에 띄어 2009년부터 여기에 당시로선 새로운 두쪽짜리 단편 시사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 9년간 한번도 빠지지 않고 꾸준하게 연재를 이어왔다. “역사와 시사 덕후 부류에선 괜찮은 삶을 사는 중이다.”
그가 이달 <본격 한중일 세계사> 1권을 출간하면서 그의 주종목 중 하나인 역사 만화로 돌아왔다. 그가 데뷔작인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을 낸 뒤에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아시아-태평양전쟁(1941~45)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는 원성이었다. 그래서 ‘언젠간 이 시기를 다루겠다’고 독자들에게 약속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그 약속을 지키게 됐다. 전체 15~17권 분량에 1840년대부터 1950년까지 100년에 달하는 시기를 다루는, 연재 기간은 최소 5~6년이 걸릴 대형 기획의 닻을 올린 것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제대로 다루려면 중-일전쟁을 이야기해야 하고, 일제강점기가 빠질 수 없고, 그러다 보니 19세기 동아시아 근대사부터 다루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때를 먼저 이야기한 뒤 후반부에 아시아-태평양전쟁을 5권 분량 정도로 다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압도적으로 조선사를 좋아한다. 그래서 너무 많은 저자가 있다.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은 100만부나 팔렸고, 설민석의 인기도 압도적이다. 한마디로 레드오션이다. 그렇다고 고려시대를 할 수도 없고, 19~20세기 근현대사가 그나마 가능한데, 이 시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재미있게 보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 무게를 덜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말 끝에 그가 “설민석을 이겨야 하는데…”라며 중얼거렸지만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굽시니스트 김선웅 작가가 ‘왜 한국사만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 역사까지 봐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답하는 대목. 김선웅 제공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치고 들어오는 그의 ‘드립’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하다. 하지만 수많은 피가 흐른 전쟁과 침략으로 점철된 역사를 이렇게 키득거리며 보는 것이 맞는지 살짝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위즈덤하우스에서 운영하는 웹툰 플랫폼 <저스툰>에 먼저 공개된 청나라 시대의 ‘태평천국의 난’만 해도 약 2천만명이 죽은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작품에서 그런 점을 부각하지는 않는다. “수천만명이 죽은 일은 당연히 비극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왜 그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인과관계를 풀어내는 이야기를 읽는 건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유럽에서도 가장 많이 파고드는 시기는 나폴레옹 시대와 양차 세계대전이고, 일본에선 전국시대다. 전쟁과 같은 비극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것은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인간은 태초부터 ‘이야기’에 끌릴 수밖에 없는 존재다.”
28일 경기도 고양시 자택에서 만난 ‘굽시니스트’ 김선웅 작가. 그는 “역사책과 인터넷에 있는 역사전문가들의 글처럼 일반적인 역사 애호가의 손에 닿을 수 있는 자료들을 주로 참고한다”면서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한길사)와 이와나미쇼텐에서 낸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어문학사)를 추천했다. 아래 일러스트는 김선웅 작가가 각각 중국과 한국, 일본을 상징하고자 내세운 동물 캐릭터 판다, 호랑이, 고양이(왼쪽부터).
그가 시사만화를 연재해온 9년 중 8년은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재임기였다. 국민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그에겐 풍자와 유희의 소재가 끊이지 않았던 시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민주진보 진영에서 지지하는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인 지금은 어떨까. “공수교대라고들 한다. 진영 논리에 기반을 둔 말이긴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나.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다. 좀 더 교양적인 측면을 다루어야 하지 않겠나 싶다.” 최신의 시사, 정치 이슈를 곧바로 소화해 만화를 그리는 그지만 아직 ‘미투(me too) 운동’으로 사임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나 정계은퇴를 선언한 정봉주 전 의원 사건을 다루지는 않았다. “주간지 안에서도 여러 이슈를 다루는 것처럼 모두가 한번에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평창올림픽,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처럼 굵직한 이슈가 있어서 다루질 못했다”고 설명했다.
오랜 기간 연재를 할 <본격 한중일 세계사> 이후도 생각하고 있을까. “매주 2편씩 마감하는 생활을 5년 동안 해야 하는 상황이라 다음 계획을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다. 언젠간 서양미술사를 만화로 그리고 싶긴 한데, 그건 너무 방대해서 인생의 황혼기나 되어서야 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나 그렇지만, 역사는 어디로 도망가지 않으니까.”
글·사진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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