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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끝없이 두갈래로 갈라지는 길에 있는 보르헤스

등록 2018-03-15 19:42수정 2018-03-15 20:01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1차분 출간
10년의 기획, 국내 전문가 총집합
문학, 꿈, 실명 등 평생의 주제 다뤄
난해한 그의 소설 이해할 단서 제공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김용호 황수현 엄지영 옮김/민음사·1만9000원

「영원성의 역사」
박병규 박정원 최이슬기 이경민 옮김/민음사·1만9000원

「말하는 보르헤스」
송병선 옮김/민음사·1만8000원

‘저자의 죽음’과 ‘상호 텍스트성’이란 화두로 20세기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이끈 세계주의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웃음을 사악하게 여긴 끝에 살인까지 저지른 광인 ‘호르헤 드 부르고스’ 수도사. 픽션과 논픽션, 동양과 서양, 무한과 유한, 수학과 신화라는 수많은 두 갈래 길을 횡단했던 작가.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의 훈장을 받아 노벨문학상에서 멀어져버렸다는 뒷이야기가 나오는 반공주의자.

이런 다양한 면모를 한 몸에 체현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사진)의 논픽션 전집이 나왔다. 민음사는 최근 전체 7권 중 1차분 3권을 출간했다. 픽션 전집이 나온 지 20여년 만이다. 그동안 그의 소설은 소설의 허구성 그 자체를 실험하는 ‘메타픽션’으로서 환상과 경이로움과 난해함을 독자들에게 선사했다.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는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보다 그 점을 잘 설명한 말은 없을 것이다. 이제 논픽션 전집은 그의 문학의 뿌리를 발견하고 그가 선 지평을 해명해주는 기반이 되어줄 것으로 보인다.

논픽션 전집 첫 권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에 수록된 <내 희망의 크기>는 보르헤스가 27살에 낸 첫 책이나 한동안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책이다. 마치 <장미의 이름>에서 호르헤 수사가 웃음을 논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감추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보르헤스가 이 책의 ‘친부’임을 부인한 덕분에 오히려 이 책이 더 유명해지자, 그는 결국 70살이 넘어서야 다시 출간에 동의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것으로 알려진 보르헤스가 젊은 시절 열정적인 민족주의자이자 크리오요(남미 식민지 태생의 유럽인 또는 혼혈인)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웃음 짓게 한다. “우리 아르헨티나에서는 여태까지 단 한 명의 신비주의자나 철학자도 탄생하지 못했다. 삶을 진정으로 깨닫거나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 하나의 도시 이상으로 성장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제 국가로서 그 위대함에 걸맞은 시와 음악, 미술, 종교 및 형이상학까지 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백두리 작가가 보르헤스의 작품을 주제로 그린 아트워크. 논픽션 전집 2권의 표지로 사용됐다. 민음사 제공
백두리 작가가 보르헤스의 작품을 주제로 그린 아트워크. 논픽션 전집 2권의 표지로 사용됐다. 민음사 제공

논픽션 전집 2권 <영원성의 역사>는 점점 자신의 독특한 문학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30대의 보르헤스를 보여준다. 그는 세르반테스의 ‘식사 후에 축 늘어진 것 같은’ 푹 퍼진 문체로 쓰인 <돈키호테>가 왜 불멸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완벽한 글, 단어 하나만 고쳐도 글 전체가 무너지는 글이 가장 위태로운 글이다. 다른 언어로 번역하면 글의 부차적인 의미와 뉘앙스는 사라진다. (…) 반대로 불멸의 운명을 타고난 글은 오탈자, 오역, 오독, 몰이해의 불길을 통과하며, 갖은 시련에도 영혼을 방기하지 않는다.”(‘독자의 미신적인 윤리’ 중)

이처럼 이 에세이집에는 ‘문체는, 문학은 이래야 한다’는 기존의 신념에 저항하고 대담한 실험에 나서는 그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여럿 등장한다. 그 중 하나는 그가 자신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집 <픽션들>에 실려 있는 ‘알모타심으로의 접근’을 에세이집인 <영원성의 역사>에도 수록해뒀다는 것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알모타심으로의 접근>이라는 책을 마치 실존하는 것처럼 짐짓 독자들을 ‘속이는’ 이 짧은 작품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흐리는 그의 문학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다. 번역자 이경민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인문한국지원사업) 교수는 작품 해설에서 “이 작품을 기점으로 철학적 사유와 문학적 형식이 결합된 보르헤스 특유의 에세이적 소설이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논픽션 전집 3권 <말하는 보르헤스>는 80살에 이르러 대가의 반열에 올라서서 평생을 두고 자신을 매혹시켰던 주제들을 두고 벌인 강의를 담은 강연집이다. 말로 하는 강연의 특성상 글로 쓴 소설이나 에세이보다 쉽고, 난해하지 않아 입문서로 적합하다. 눈이 보이지 않았던 그는 이 강의들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내용을 외워서 했다고 한다. 보르헤스가 책, 시간, 문학, 꿈, 불교, 카발라(유대교의 신비주의 분파)를 두고 펼치는 강의를 들으면, 12년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에서 영미문학을 가르친 교수였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탐정소설에 관한 강의에선, 작가를 유일무이한 창조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독자를 새로운 해석의 창조자로 세운 ‘저자의 죽음’ 이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탐정소설의 창시자 에드거 앨런 포를 가리켜 “현대 문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문학 장르란, 작품 자체보다는 작품이 읽히는 방식에 의해 좌우될 거라고. (…) 책은 독자가 펼칠 때에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 탐정소설은 아주 특별한 유형의 독자를 탄생시켰습니다.” 만약 <돈키호테>를 탐정소설이라고 소개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매 구절 누가 범인인지 찾아내기 위한 의심을 품고 읽어내려갈 것이란 이야기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민음사 제공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민음사 제공

보르헤스가 들려주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33살에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예의 그 이야기꾼 면모를 드러낸다. 33살에 바빌로니아에서 죽었다는 정사와 달리, 알렉산드로스는 그 해 자기 군영에서 홀연히 빠져나와 먼 방황을 한다. 그는 타타르인 또는 중국인으로 이뤄진 군인들을 만나고 이들과 용병 생활을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전투에 참여하며 과거를 잊은 그가 급여를 받는 어느 날, 자신이 제왕이던 시절 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던 동전을 받는다. 그는 순간 과거의 기억을 모두 회복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이 책의 마지막 강의는 보르헤스의 실명에 관한 이야기다. 1955년 대립각을 세웠던 좌파 페론 정권이 붕괴하자 그는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해에 그는 시력을 잃는다. 그 도서관엔 90만권의 장서가 있었지만, 그에겐 책 표지와 등을 판독할 정도의 시력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비극적인 상황에서 그는 ‘축복의 시'를 쓴다. “책과 밤을 동시에 주신/ 하느님의 훌륭한 아이러니”라고. “작가, 아니 모든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이 유용한 수단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심지어는 수치와 장애와 불행을 포함한 모든 것은 점토로서, 즉 예술의 재료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받아들여 이용해야 합니다. (…) 실명은 하늘의 선물입니다.”

논픽션 전집을 읽다보면 문학을 평생 한껏 즐기고 사랑했던 보르헤스에게 전염된 것처럼 <신곡> <천일야화> 같은 책들을 읽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를 대문호로 추앙하고, 알쏭달쏭한 그의 작품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결기는 사실 그가 원한 모습이 아닐지 모른다. 움베르토 에코가 유머와 존경을 담아 자신의 문학적 영웅인 보르헤스에게 악역을 맡기는 것으로 먼저 몸소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20년 된 보르헤스 픽션 전집, 재번역하지 않는 이유

“단편집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 보르헤스와 강연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보르헤스, 이 두 보르헤스가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보르헤스를 알게 될 것이다”(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은 민음사에서 8년 전인 2010년 번역 계약을 맺었고, 지난 1~2년에 걸쳐 여러 번역자가 분담해 번역해 냈다. 출판사 담당 편집자는 “4권은 올해 초여름, 5~7권은 10월에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3권을 번역한 송 교수는 “특히 4권 <또 다른 심문들>이 제일 중요한데 어려운 책이라 1차분으로 같이 나오지 못했다. <픽션들>처럼 에세이와 픽션의 경계가 왔다 갔다 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송 교수는 “보르헤스가 군데군데 농담과 거짓말을 하는데 그 거짓말을 진지하게 읽으면 속아버려, 미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위대한 사상가라는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1994년~1997년 민음사에서 발간됐던 보르헤스 픽션 전집(전 5권) 이후로 번역을 새롭게 한 전집이 나올 계획은 현재로선 없다고 민음사 쪽은 밝혔다. 이 전집은 20년 전에 나와 판형이 오래됐고, 보르헤스가 뭘 속이고 있는지 알려주는 ‘지나치게 친절한’ 각주로 독자들의 재번역 요구가 있어왔다. 번역자인 송병선 교수가 2011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픽션들>과 <알렙>을 번역해 내 독특하게도 한 출판사에서 두 가지 판본을 보유한 책이 됐다. 송 교수는 “황병하 본의 번역이 좋다. 나머지는 구태여 다시 손을 안 대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번역자 황병하 전 광주여대 창작문학과 교수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다. 그는 전집을 전부 번역한 직후인 1998년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2010년 계약 당시 민음사 대표이사였던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스페인어 전공자들이 보르헤스를 발굴한 황병하 교수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픽션 전집 번역 작업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의 작업을 남겨둬서 그를 기억하자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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