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1차분 출간
10년의 기획, 국내 전문가 총집합
문학, 꿈, 실명 등 평생의 주제 다뤄
난해한 그의 소설 이해할 단서 제공
10년의 기획, 국내 전문가 총집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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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김용호 황수현 엄지영 옮김/민음사·1만9000원 「영원성의 역사」
박병규 박정원 최이슬기 이경민 옮김/민음사·1만9000원 「말하는 보르헤스」
송병선 옮김/민음사·1만8000원 ‘저자의 죽음’과 ‘상호 텍스트성’이란 화두로 20세기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이끈 세계주의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웃음을 사악하게 여긴 끝에 살인까지 저지른 광인 ‘호르헤 드 부르고스’ 수도사. 픽션과 논픽션, 동양과 서양, 무한과 유한, 수학과 신화라는 수많은 두 갈래 길을 횡단했던 작가.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의 훈장을 받아 노벨문학상에서 멀어져버렸다는 뒷이야기가 나오는 반공주의자. 이런 다양한 면모를 한 몸에 체현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사진)의 논픽션 전집이 나왔다. 민음사는 최근 전체 7권 중 1차분 3권을 출간했다. 픽션 전집이 나온 지 20여년 만이다. 그동안 그의 소설은 소설의 허구성 그 자체를 실험하는 ‘메타픽션’으로서 환상과 경이로움과 난해함을 독자들에게 선사했다.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는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말보다 그 점을 잘 설명한 말은 없을 것이다. 이제 논픽션 전집은 그의 문학의 뿌리를 발견하고 그가 선 지평을 해명해주는 기반이 되어줄 것으로 보인다. 논픽션 전집 첫 권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에 수록된 <내 희망의 크기>는 보르헤스가 27살에 낸 첫 책이나 한동안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책이다. 마치 <장미의 이름>에서 호르헤 수사가 웃음을 논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을 감추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보르헤스가 이 책의 ‘친부’임을 부인한 덕분에 오히려 이 책이 더 유명해지자, 그는 결국 70살이 넘어서야 다시 출간에 동의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주의자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것으로 알려진 보르헤스가 젊은 시절 열정적인 민족주의자이자 크리오요(남미 식민지 태생의 유럽인 또는 혼혈인)주의자였다는 사실은 웃음 짓게 한다. “우리 아르헨티나에서는 여태까지 단 한 명의 신비주의자나 철학자도 탄생하지 못했다. 삶을 진정으로 깨닫거나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 하나의 도시 이상으로 성장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제 국가로서 그 위대함에 걸맞은 시와 음악, 미술, 종교 및 형이상학까지 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백두리 작가가 보르헤스의 작품을 주제로 그린 아트워크. 논픽션 전집 2권의 표지로 사용됐다. 민음사 제공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민음사 제공
20년 된 보르헤스 픽션 전집, 재번역하지 않는 이유
“단편집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 보르헤스와 강연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보르헤스, 이 두 보르헤스가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보르헤스를 알게 될 것이다”(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은 민음사에서 8년 전인 2010년 번역 계약을 맺었고, 지난 1~2년에 걸쳐 여러 번역자가 분담해 번역해 냈다. 출판사 담당 편집자는 “4권은 올해 초여름, 5~7권은 10월에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3권을 번역한 송 교수는 “특히 4권 <또 다른 심문들>이 제일 중요한데 어려운 책이라 1차분으로 같이 나오지 못했다. <픽션들>처럼 에세이와 픽션의 경계가 왔다 갔다 하는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송 교수는 “보르헤스가 군데군데 농담과 거짓말을 하는데 그 거짓말을 진지하게 읽으면 속아버려, 미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위대한 사상가라는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가볍게 읽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1994년~1997년 민음사에서 발간됐던 보르헤스 픽션 전집(전 5권) 이후로 번역을 새롭게 한 전집이 나올 계획은 현재로선 없다고 민음사 쪽은 밝혔다. 이 전집은 20년 전에 나와 판형이 오래됐고, 보르헤스가 뭘 속이고 있는지 알려주는 ‘지나치게 친절한’ 각주로 독자들의 재번역 요구가 있어왔다. 번역자인 송병선 교수가 2011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픽션들>과 <알렙>을 번역해 내 독특하게도 한 출판사에서 두 가지 판본을 보유한 책이 됐다. 송 교수는 “황병하 본의 번역이 좋다. 나머지는 구태여 다시 손을 안 대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번역자 황병하 전 광주여대 창작문학과 교수에 대한 예우이기도 하다. 그는 전집을 전부 번역한 직후인 1998년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2010년 계약 당시 민음사 대표이사였던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스페인어 전공자들이 보르헤스를 발굴한 황병하 교수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픽션 전집 번역 작업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의 작업을 남겨둬서 그를 기억하자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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