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의 고금유사
변승업은 아내 영천(永川) 이씨의 장례에 옻칠을 두텁게 한 특별한 외관(外棺)을 썼다. 그것은 왕의 장례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 역관으로서는 참람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소문은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당연히 왕에게 보고해 변승업을 처벌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아무 일이 없었다. 무엇보다 관료의 비위 사실을 탄핵하는 것을 자기 업무로 삼고 있던 대간(臺諫)들, 곧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료들이 침묵했던 것이다.
조선의 대간들이 어떤 사람인가? 탄핵할 대상을 찾고 그들의 비위를 상소로, 차자(箚子)로 써서 올리는 것이 일과인 사람들이다. 증거 위에 논리를 세우고, 거부할 수 없는 거룩한 성인의 말씀을 들먹이면서 상대방을 사지로 몰아넣는다. 집요한 것은 물론이다. 왕이 들어주지 않으면, 들어줄 때까지 수십 차례 동일한 상소와 차자를 반복해서 올린다. 더욱이 변승업이 살았던 숙종조는 당쟁이 절정을 이룬 시기다. 그 권력투쟁의 최일선에서 상대 당파를 향해 날이면 날마다 서슬 푸른 창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곧 대간들이었다.
역관이 제 아내를 왕의 예로 장사지낸 참람한 사건은 명분과 원칙에 목숨을 걸었던 이 시기 대간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좋은 먹잇감이었다. 하지만 <실록>에도 <승정원일기>에도 이 사건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혹 대간이 고의로 빠뜨리거나 혹 잘못 처리한 사건이라면, <실록>은 사평(史評)에서 한 마디 남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변승업의 참람한 짓거리에는 그조차 없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그 장례에 대해서는 정재륜(鄭載崙, 효종의 사위)의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이란 책에 두어 줄 자료가 남아 있을 뿐이다.
변승업은 어떻게 이토록 완벽하게 빠져나갈 수 있었던가? 정재륜은 그의 집안이 ‘수십만 금’의 재산이 있어서 곳곳에 돈을 뿌린 결과 문제 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말한다. 변승업을 살린 것은 ‘돈’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수십만 금’이란 표현이다. 이것은 은(銀) ‘수십만 냥’을 말한다. 조선 후기 1년에 한 차례 북경으로 들어가는 사신단이 가지고 가는 무역자금은 보통 십만 냥 정도였다. 그러니까 변승업은 조선의 대중국 무역량의 몇배나 되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숙종조의 역관들은 북경에서 생사(生絲, 비단실)를 사서 일본으로 수출해 막대한 이익을 남겼는데, 변승업은 바로 이 중개무역을 지배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일본은 생사 대금을 은으로 지불했으니 변승업은 일본에서 쏟아져 들어온 막대한 은을 근거로 거대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내의 장례를 왕의 예로 치렀던 변승업의 행동 이면에는 거창한 돈의 힘으로 왕의 자리를 바라는 은밀한 욕망이 얼핏 보인다. 하지만 그의 욕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아마도 변승업이 품었던 그 욕망은 오늘날 실현되고 있을 것이다.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이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것을 보고 나는 돈으로 대간들을 침묵시켰던 변승업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나라는 왕정국가가 아니고 민주공화국이다. 법을 초월한 왕 따위는 필요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사회다. 아니 그런가!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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