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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작가는 어떻게 발견되는가

등록 2018-03-08 19:46수정 2018-03-08 20:03

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회색 인간
김동식 지음/요다(2017)

매달 장르 소설에 대한 칼럼을 쓰면서 어떤 책을 고를지 고심하지만, 과정은 거의 변함이 없다. 한 달간 읽은 소설 중 이야깃거리가 있다 싶은 작품을 메모해두고,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서 신간 도서 목록을 훑으며 관심이 가는 소설을 다시 골라서 읽어본다. 그렇기에 이미 좋아하던 작가나 화려한 경력과 함께 광고되는 책이 아니고서는 새로운 작가를 발견하는 일은 꼼꼼히 신경 쓴다고 해도 쉽지 않다.

김동식의 <회색 인간>도 자칫 놓칠 뻔한 작품이었다. 최근 본 기사에서 작가가 주물 공장에서 일하며 일반의 출판 경로가 아니라 인터넷 게시판에 꾸준히 작품을 선보여서 출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뒷이야기가 호기심을 돋우지 않았으면 책에 눈길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의 이력을 제쳐두고라도, <회색 인간>은 부드러운 에스에프(SF)적 설정 위에 판타지와 호러 요소를 가미한 단편 모음이다.

가령, ‘공 박사의 좀비 바이러스’는 이런 내용이다. 미친 과학자 계열의 공 박사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세포의 노화를 막는 불로불사에 관한 연구를 했으나, 지원이 끊기고 조롱을 받았다. 그는 자기를 버린 세상에 복수하고자 에스(S)시라는 중소 도시에 좀비 바이러스를 터뜨린다. 그런데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어떤 병에 걸려도 금방 재생되는 힘이 생긴다. 그러자 다른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앞다투어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려 한다. 인류 모두가 좀비가 되었을 때, 공 박사는 두 번째 복수를 내린다.

작가 본인이 평생 읽은 책이 열 권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의 작품은 우연하게도 프레드릭 브라운과 호시 신이치 계열의 쇼트 쇼트 소설이다. 쇼트 쇼트는 플래시 픽션이라고도 하는 5페이지 안팎의 짧은 소설로, <회색 인간> 또한 원고지 30매 정도의 단편 24편으로 이루어졌다. 작가가 반복적으로 쓰는 주제들도 신과 인간의 존재 조건에 대한 물음, 사회 구조가 개인에게 가하는 통제와 그에 대한 반발이라는 점에서 이들 작가와 유사하다. 반전을 통해 정곡을 찌르는 결말, 우화적 배경, 작품 전체에 흐르는 풍자적 유머라는 단편의 장점을 극대화한 작품이라는 구성적 공통점도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김동식 작가를 굳이 문학사의 어떤 계열에 끼워 맞출 필요는 없다. 소설 내용 자체가 발표된 매체인 인터넷 게시판의 속성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기발하지만 익숙한 설정, 구체성이 없는 전형적 인물, 빨리 스크롤할 수 있게 묘사를 줄이고 상황을 직접 던지는 속도감 있는 전개, 인터넷 토론의 핵심인 도덕적 충돌들이 변주되는 식이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사람들”, “인류”이고,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집체로서의 대중이 소설의 주요 캐릭터가 된다는 면에서는 에스에프 드라마 시리즈 <블랙미러>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회색 인간>은 소설적 완성도와는 별개의 문제로 서평과 편집, 기획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전통적 의미의 소설이 사양길에 들었다고들 하지만, 이야기는 모든 곳에 있고 쓰는 사람들도 어디에나 있다. 관건은 이제 작가를 어떻게 발견하는가 하는 질문이 아닐지. 이는 소설이라는 오래되고 새로운 장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박현주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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