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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의학계의 계관시인’이 남기고 간 마지막 생각들

등록 2018-03-08 19:32수정 2018-03-08 19:34

의식의 강
올리버 색스 지음, 양병찬 옮김/알마·1만6500원

기묘한 행동을 보이는 뇌질환 환자들과 따뜻한 시선으로 교감하며 삶의 의미를 보여주는 글들을 썼던 신경과 의사 올리버 색스는 2015년 8월 말기암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올리버는 갑자기 원기를 회복했다. 책상에 앉아 마지막 저서가 될 책의 목차를 불러줬다. 그 일은 ‘죽어간다는 것’의 ‘끔찍한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반가운 기분전환거리였기 때문이리라.”(연인 빌 헤이스의 회고)

색스가 세상을 떠나기 2주 전 자신의 글 중에서 10편을 골라 묶은 마지막 에세이집 <의식의 강>이 번역을 거쳐 우리에게 왔다. 어린 시절 추억부터 평생 자신의 영웅이었던 다윈, 프로이트, 윌리엄 제임스를 통해 다시 읽는 과학과 심리학에 대한 통찰, 환자들의 사연을 통해 자연과 마음과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의미를 찾아가는 이야기들이다.

예순번째 생일이 다가오던 때 그는 갑자기 50여년 전인 1940~1941년 겨울 나치가 영국에 대한 대공습을 벌였던 때의 기억이 떠올라 글을 썼다. 소이탄이 집 뒤뜰에 떨어져 아버지와 형들이 양동이로 물을 퍼나르며 끄려 했지만 불길이 더욱 거세져 사방으로 불꽃이 튀던 기억이었다. 분명 자신이 직접 겪은 일로 생생히 기억했지만, 형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고 놀란다. 기억이란 고도의 주관적 방법으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서사임을 보여주면서, 색스는 기억과 타인과의 공감에 대한 새로운 통찰로 나아간다. “인간의 기억은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취약하며 불완전하지만 굉장히 유연하고 창의적이다. (…) 우리의 뇌는 ‘우리가 읽고 들은 것’과 ‘타인들이 말하고 생각하고 쓰고 그린 것’을 통합하여, 마치 1차 기억인 것처럼 강렬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덕분에 우리는 타인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고, 타인의 마음 속에 들어갈 수도 있으며, 예술, 과학, 종교가 포함된 문화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의식의 강>의 저자 올리버 색스. 한겨레 자료 사진
<의식의 강>의 저자 올리버 색스. 한겨레 자료 사진

소년 시절 여름 휴가지 해변 주변의 웅덩이에 사는 해양동물에 매료됐던 기억을 소환하면서, 색스는 식물, 곤충, 무척추 동물들에게도 인간과 같은 정신세계가 있을까, 묻는다. 곤충은 매우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100만개의 신경세포를 이용해 비범한 인지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문어는 뇌와 팔에 배분된 5억개의 신경세포를 통해 포유류와 유사한 학습계와 기억계를 보유하고 있다. “상이한 동물들을 갈라놓는 심오한 생물학적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든 동물은 나름 다양한 수준의 정신을 발달시키거나 보유하고 있다. 우리도 그런 동물들 중 하나일 뿐이다.”

시간은 객관적으로 흐르는 듯 보이지만, 사람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뇌에서 인지되는 시간은 다르다. 나이가 듦에 따라 한해가 달음질치듯 지나가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생명의 위협에 직면했던 이들은 그 순간을 슬로모션처럼 기억하기도 한다. 그는 일반인의 눈에는 낯설고 기괴해 보이는 투렛증후군과 파킨슨증 환자들이 일반인과 다른 감각과 속도로 시간의 흐름 속을 살아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 작은 변화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진화의 의미를 살피면서 “그러다 보니 삶은 더욱 소중하고 경이로운 현재진행형 모험처럼 느껴졌다. 우리 삶은 고정되거나 미리 정해져 있지 않으며, 변화와 새로운 경험에 늘 민감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나약하고 이해받지 못하는 존재들에 대한 애정, 딱딱해 보이는 과학과 문학, 마음 사이의 벽을 허물고 흐르는 생각과 시적 언어는 그를 더 그립게 한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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