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의 새로운 세대 주자로 자주 호명되는 이준석(33) 바른미래당 노원병 당협위원장과 손아람(38) 작가. 두 사람이 지난 1월 말 보수와 진보 사이에 간극이 큰 여러 문제를 가지고 여러차례 대담을 나눈 뒤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라는 제목의 책으로 묶어냈다. 이 책은 21세기북스 출판사가 이해 득실과 진영 대립으로 생산적인 논의가 중단된 의제에 명징하게 소신을 밝혀 논의를 촉발시키겠다는 취지로 기획한 ‘따로 또 같이’ 총서의 첫번째 편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 평가, 보수와 진보의 차이 등의 주제들과 함께 책작업을 위한 두 사람의 대담이 마무리된 뒤 본격적으로 일어난 미투 운동과 평창올림픽 논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달 28일 한겨레에서 만나서 나눈 두 사람과 대담은 한겨레티비(http://www.hanitv.com)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위원장이 오는 6월에 안철수 바른미래당 대표의 국회의원직 사퇴로 재보선 선거가 치뤄지는 서울 노원병 지역구에 출마한다는 걸 손 작가는 출판사 대담이 결정된 이후에 들었다더라.
손아람(이하 손) 약간 뒷통수 맞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웃음). 당선되길 바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유한국당 앞에 꼭 장벽을 세워주시길.
이준석(이하 이) 제가 선거에 나갈 예정이다 보니까 광고를 못 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책 판매엔 도움이 안 된다. 그럼에도 받아들인 건, 생각을 정리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영 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자존심이 세고, 논리적 정합성에 강박관념이 있는 분들이 주요 독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맛을 느껴보지 못한 분들은 한 번 느껴보실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이런 시도 자체가 널리 퍼졌으면 한다.
손 며칠 밤낮으로 모든 주제를 펼쳐놓고 대화를 하며 상대방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오지 않는다. 이기기 위한 대화가 아니라 생각을 탐색하는 대화가 가능했다는데 만족한다. 바둑알을 집어던지는 대화가 아니고 바둑을 두는 대화 같았다.
- 손 작가는 최근에 교육방송 <까칠남녀>에서 은하선씨를 하차시킨데 반발해 출연 보이콧을 하셨는데.
손 반동성애 운동하는 기독교인들이 시위를 하는 건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잡음 정도라고 생각했다. 출연자들이 뜻을 모아 보이콧을 하면 시위대 정돈 이길 줄 알았다. 하지만 방송사에서 프로그램을 던져서 너무 의외였다. 한국사회에서 동성애 이슈가 얼마나 치우쳐져 있는지 드러내는 것 같다.
이 저도 의아했다. 방송에서 정치적 발언을 세게 했을 때 일부 시청자의 불쾌감이 과하게 표출돼 하차하는 경우는 있었는데, 발언이 아닌 사회적 이슈로 논란이 돼서 하차하는 경우는 은하선이 홍석천 이후로 처음이 아닌가 싶다.
-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여러 일들이 있었는데 각자 주목한 지점이 있었을 것 같다.
손 스피드스케이팅의 김보름, 노선영 선수 갈등으로 말이 많았다. 올림픽마다 반복된 풍경이다. 팀 대한민국을 위한 최선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선수들의 파벌과 개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제가 특별하게 본 것은 스피드스케이팅 매스스타트 경기에서 이승훈 선수와 정재원 선수의 탱크 논란이다. ‘국가의 최선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켰다’는 걸로 논란이 됐다. 중계를 보면, 정 선수가 끌고나가다가 이 선수가 제치고 나간 순간 허리를 펴고 레이스를 포기한다. 일종의 시위라고 봤다. 인터뷰에서도 어린 선수의 내키지 않는 표정이 국민에게 읽혔다. ‘언제까지 국가를 위한 최선이라는 명목으로 개인을 희생해야 하는가’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없다. 유의미한 논란이다.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도 같다. 개인이 희생되는 걸로 보이는 국가의 단일팀 구성에 불편해하는 목소리가 많이 나왔다.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의 흐름을 명백히 보여줬다.
이 정재원 선수도 그렇게 한 번 접어주면 나중에 이득을 볼 거라는 생각으로 참고 가는 상황이었을텐데 그게 젊은 세대에게는 가슴에 불을 지핀 거다. ‘나도 언젠가는 기득권이 될 거다’라는 희망에 기대지 못하니, 기득권과 비기득권 사이의 불합리함을 떨쳐내자는 게 있다.
- 이 위원장은 북한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의 방남에 반대하는 청와대 청원을 지지하기도 하셨는데.
이 세월호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가 세운 원칙이 피해자를 최우선으로 배려하자는 거다. 김영철이 내려올 때 그 원칙이 흔들렸다. 북한이 김영철을 내려보내겠다고 했을 때, 통일부가 가장 먼저 연락했어야 할 사람은 천안함 유족이었다. 일 터진 다음에 대승적으로 이해해달라고 말하는 것은 폭거다.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유족이나 위안부 할머니들에 취한 자세와 똑같다. 정권이 생각하는 목표는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세심함을 보여야 한다. 천안함 유족에게 먼저 이야기해서 양해를 받았다면 자유한국당이 통일대교에 엎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 위험한 것이 천안함을 진영의 문제로 만들었다. 온라인에서는 유족을 천안함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문 대통령도 천안함을 폭침이라고 말했는데, ‘천안함을 재조사해야 한다’, ‘천안함은 패전이니까 숨진 병사들은 국가 유공자가 아니라 경계에 실패한 죄인이다’ 이런 말이 나온다. 워낙 북한이 오기 3일 전에 명단을 통보해주다 보니 정부가 해야 할 것을 못한 것으로 논쟁의 선을 그어야 한다. 천안함의 본질을 건드려 진영 대립이 격화되는 것은 위험하다.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의 저자 이준석 바른미래당 서울 노원병(상계동) 당협위원장, 손아람 작가가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TV> 스튜디오에서 대담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손아람 작가의 ‘#미투’
“정치적 공작 이용될 수 있다며
가해자부터 걱정… 후진 상상력”
- 지난 1월말에 사흘간 하루 적어도 8시간 이상 대담을 한 내용을 묶어서 책을 내셨는데, 대담을 한 마지막 날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폭력 폭로가 있다. 그후로 딱 한달이 지났다. 미투 운동 어떻게 봤나.
이 그날은 서 검사 이슈가 이렇게 들불처럼 번질지 몰랐다. 서 검사 때는 검찰이란 특수조직이 문제가 있는 걸로 처음엔 받아들였는데, 문화계로 번지면서 제가 가진 문화계 경험과 결합이 되니까 이것도 보편적인 문제가 되겠다 싶었다. 저도 현장을 목격한 경우는 적지만 이야기는 꾸준히 들었다. 제가 문단을 몰라서 그런지 고은 시인 건은 충격이었다.
손 미투 폭로가 터지는 분야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건강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위계 권력 구조가 느슨하고, 인적 교환이 활발히 이뤄지고, 용기와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는 영역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문단 성폭력이 오래전부터 제일 먼저 이야기되지 않았나. 성폭력 공론화가 가장 많이 되는 곳이 페미니스트 그룹이다. 진보적 시민단체와 운동권도 빈도가 높다. 잘 안 터진 분야가 방송인데 위계질서가 강하고 개인이 감수해야 할 위험이 크다. 정치권도 안 나오고 있다. 마지막까지 한건도 안 나올 곳은 자유한국당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의 수직적인 조직문화와 구성원들이 가진 성차별 감수성으로 볼 때 폭로는 안 나올 거다.
어떤 사람들은 미투를 두고 진보를 무너뜨리기 위한 공작이라는 표현을 썼다. 희생 당할 수 있는 남성 가해자부터 걱정하는 그 상상력 자체가 얼마나 후진가. 폭로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서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은 수많은 여성들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희생될 남성 가해자를 걱정하는 걸 보면 이런 가설 밖에 나오지 않는다. 확신범이다. ‘나도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밖에 안 되는 거다.
이 검찰에는 조사단이라도 있지만, 일반인들은 미투에도 몸을 싣기 힘든 사람이 많다. 미투도 센 놈에게만 걸었을 때 사회적 반향이 인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놈들에게 당한 사람도 많은데 기사로 안 받아주면 끝이니까. 미투가 보호하지 못하는 약자, 작은 회사 사장에게 피해입는 직원 같은 경우는 미투 운동에 참여하기도 힘들고 자구책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사장을 처벌받게 했는데 직장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움직이지 못한다.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 저는 이 문제에 사법기관이 많이 들어가게 될 거라 생각한다.
손 지하철에서 누가 나를 쓱 만진 것과는 달리, 권력과 위계에 의한 것을 참았을 때 수치심과 좌절감은 엄청나다. 거기서 분노가 나온다. 유명한 사람이 폭로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들을 망가뜨리고 싶어서가 아니고 그들이 권력이라 피해자들에게 그 정도의 상처를 줬기 때문이다.
이준석 당협위원장의 ‘#미투’
“힘없는 피해자 보호 시급한데
정권 공격 치환…건강하지 못해”
이 민감도가 떨어지는 발언을 해서 문제된 사람도 있었지만 보수 정당이 성문제에 관대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지방선거 공천이 다가오는데 그런 건 좋은 투서 소재가 된다. 보통 그쪽 관리를 잘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 오히려 출마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보수 정당이 아닌 정당에서 문제가 된 것이 곧 기사화가 될 거라고 들은 게 있다. 저는 ‘이윤택이 문 대통령 지지선언을 한 걸 가지고 문 대통령을 공격할 기회로 삼는 것은 잘못됐다’고 이야기했다가 보수 진영에서 욕을 많이 먹었다. 하지만 그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반대로 박근혜 정부에서 윤창중을 다 알고 청와대 대변인으로 뽑은 거 아니지 않나. 이 문제를 정치적 공격으로 치환하려는 집단이 없었으면 좋겠다. 건강하지 않다.
손 이 문제를 두고 미투 운동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진보와 보수 대연합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보이지 않나. 진보에서는 미투 운동이 공작에 쓰일 수 있다고 걱정하고, 보수에서는 실제로 공작에 쓰고.(일동 웃음)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의 저자 손아람 작가가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TV> 스튜디오에서 열린 공동저자 이준석 바른미래당 서울 노원병(상계동) 당협위원장의 대담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보수에선 가족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겨서 동성애나 페미니즘을 동의하지 못하는 경향이 강한 거 같다. 이 위원장은 젊은 세대 정치인이니까 보수 진영에서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할 건지가 궁금하다.
이 우리나라에서 생산 가능 인구가 준다. 그 대안이 출산율을 높이고, 여성의 경제 활동을 늘리는 거다. 전자는 불가능하다. 청년들이 힘들어서 애를 안 낳겠다는 데 뭘 더 독려할 수 있겠나. 여성이라서 손해보거나, 사회에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 그런데 작은 부처인 여가부에 여성정책을 일임시키다 보니 마이너한 정책이 나온다. 여성가족부가 큰 조직들 옆에 있기 때문에 힘을 못 쓴다. 여가부를 폐지하고 기능을 다른 부처에 나눠버리자. 대통령이 핵심 인사를 임명할 때 여성 정책에 감수성이 있는 사람을 앉혀서, 부처 내에서 감사 기관과 함께 젠더 감수성이 있는 장관이 결합되도록 하면 내부 개혁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손 저는 오히려 여가부가 너무 안전하게 접근한다는 생각이 든다. 시민사회에서 돌아가는 담론에 비해서 형편없이 보수적으로 한다. 그럴려면 왜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가부가 부처를 넘나들기 때문에 영향력을 가지는 것이지, 부처 안에 있는 조직은 유명무실해지기 딱 좋다고 본다.
- 비록 진보와 보수를 대표하는 젊은 세대라고 해서 나왔지만, 두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한 지점도 많은 것 같다. 어떤 점에서 비슷하다고 느꼈나?
이 대선 후보나 대통령을 중심으로 모인 수권정당에 속한 사람들과는 이야기하는데 한계가 있더라.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 철학보다는 내가 따르는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논리가 발동한다. (대담중에) 손 작가는 사람에 강한 애정을 드러내는 표현을 한 적이 없다. 문재인 정부 평가할 때도 전반적인 인상 평가를 하지 않더라. 사안별로 찬반을 표명한다는게 인상적이었다. 정치인의 정책이나 논리를 평가하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지점들이 있었다.
손 그건 제가 제도권 정당에 묶여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거 같다. 저는 이 위원장과 사고 성향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고 느꼈다. 정합성이 있는 설명이 있어야 받아들일 수 있고, 논리적 정합성을 방해하는 권력장의 간섭을 참기 어려워하는 사고 회로를 가진 사람들은 원래 좌파에 많다. 이 위원장이 그걸 가지고 있어서, 농담처럼 “좌파로 다시 시작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일동 웃음)
이 자유한국당에서 바른정당에 오겠다고 한 사람이 60명인데, 그중에 실제로 온 사람은 9명이다. 논리적 정합성에 정치인생을 건 사람들이다. 제가 보수 진영에서 그 역할을 하려고 노력했는데, 몇 번 결정적인 지점에서 움찔한 적이 있다. ‘박근혜가 선거에서 결국 이기더라’고 하니, 뭐가 맞는지 논리적 정합성을 찾지 못한 지점에서 저도 관성적으로 판단한 게 있다. 지금 와서 보면 아쉽다.
손 바른미래당이 의미있는 탄생이었다고 보는 게, 힘과 논리, 두가지가 있다면 결국 힘이 당을 지배한다. 자유한국당은 너무나 많은 힘을 가진 조직이었다. 지금 바른미래당은 처음으로 자기 논리를 가진 실험을 하지 않으면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마치 좌파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 조직이다.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의 저자 이준석 바른미래당 서울 노원병(상계동) 당협위원장이 28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TV> 스튜디오에서 열린 공동저자 손아람 작가와의 대담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반대로 근본적인 가치관의 차이가 있다고 느낀 지점은?
손 절차적 정당성에 부여하는 가중치다. 이 위원장은 목표를 위한 절차가 얼마나 정당했는지를 많이 이야기하더라. 저는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논쟁이 목표를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미투에서도 폭로가 얼마나 깔끔하고 정당했냐 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고, 촛불집회에도 시위의 양태가 정당했냐 보다 시위가 왜 일어났냐가 중요하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이 있었더라도 그걸로 본질을 희석시켜서는 안된다. 그런 부분에서 많이 부딪혔다.
이 저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부분이었다고 본다. 전 대의민주주의가 위기니 강화하고 보완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 문 대통령이 직접민주주를 강화하기 위해 원전공론화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소수로 시민을 모아서 고급 정보를 투입하니 전문가 집단하고 별다르지 않은 결론을 내렸다. 모든 것을 모든 사람이 숙의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다수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세금 인상 같은 문제도 있다. 대신 미국처럼 선거를 2년에 한 번씩 자주 하거나, 국회의원 수를 보강해서 대의제를 강화해야 한다.
손 직접민주주의 논쟁은 허수아비 논쟁 같은 느낌이다. 우린 사실 직접민주주의를 경험한 적이 없다. 아무리 여론이 정치를 강하게 이끌고 가더라도, 우리 민주주의는 여전히 대의원제다. 대의원제를 폐지하려는 시도가 없는 한, 직접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게 의미가 있을까.
젊은 보수-진보 대표하는 두 사람
촛불집회 의미 등 이견 보였지만
“재벌개혁, 적극성 갖춰야” 공감도
- 두 분이 촛불집회의 요구가 무엇이었는지 그 해석을 다르게 한 점이 인상 깊었다. 정권 교체까지만인가 아니면 재벌이나 권력기관 개혁, 분배 문제도 포함하는 것인가.
손 문 대통령이 당선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고, 그 이상을 생각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정도 규모의 촛불집회를 가능하게 한 것은 당시 대통령의 실책으로만은 설명이 안 된다. 집회에서도 박근혜를 탄생시키고, 범죄를 가능케 한 검찰, 국정원, 재벌 등 대한민국 체제를 이루는 권력기관을 개혁하라는 요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촛불집회에서 결국 박근혜 탄핵이란 결과가 나올 수 있던 것은 한쪽 진영과 함께 다른 진영의 일부가 참여했기 때문이다. 보수 참여자들은 그런 급진적인 것까지 동의한 적 없다. 적폐청산의 동력은 정유라 사건처럼 명시적인 불합리한 것 때문에 불타오르는데, 지금 다시 적폐청산을 타오르게 하려면 새로운 어젠다가 필요하다.
손 모든 시민들이 집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의식적인 언어로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박근혜가 삼성으로부터 승마지원금, 재벌에게 재단출연금을 받은 걸 문제삼은 사람들이 ‘이제 박근혜가 벌 받았으니 다른 대통령이 들어서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고 보지 않는다. 탄핵은 어떤 대통령이 되더라도 돈이 정치를 쥐고 흔드는 재벌중심 체제는 더이상 안 된다는 흔적을 역사에 남겼다. 문재인 정권도 자신들이 어떻게 탄생한줄 알기에 어떤 정권도 할 수 없던 정책을 하는 거다.
이 촛불집회라는 힘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치밀한 전술이 필요하다. 노무현 정부에도 삼성 장학생이란 소리를 들었던 담당자들이 있었듯이, 재벌은 노무현 정부도 동화시킬 힘이 있고, 이 정부도 동화시키고 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처음 이야기와는 달리 프랜차이즈업체 정도를 잡고 있다. 이 업체들은 재벌 순위에 못 들어가는 회사들이다. 재벌 개혁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나온 것도 아니다. 노태우 정권 때 김종인 전 의원이 경제 담당하면서 재벌에 비업무용 부동산을 매각하라고 힘으로 눌렀다. 이같은 전격성이 필요한데 그정도 적극성을 가진 관료가 이 정부에는 없는 거 같다.
손 이 대담 방송을 청와대에서 봐야 할 거 같다. 보수 정치인이 재벌 개혁이 미진하다고 한다. 너무 수치스럽지 않나.(웃음)
- 현재까지 문재인 정부를 어떻게 평가하나?
손 평가를 내리기엔 짧은 시간이다. 저는 여러 권력구조 개혁이 이 정부의 의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건 기회다. 12명의 대통령 중 한 명이 아니라 역사에서 조금 특별하게 남을 수 있는 대통령이 될 기회를 잡은 첫 대통령이다. 가끔 제가 문 대통령이라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적폐를 없애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앞으로 50년 동안 이런 기회가 또 올지 모른다.
이 재벌개혁을 두고 보수와 진보가 나뉘었는데, 미국에선 보수가 가장 중요하게 따지는게 공정경쟁이다. 카르텔을 금지하고, 반독점 규제가 세다. 미국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기획경제 정책은 자유주의 보수라고 보지 않는다. 재벌개혁을 두려워하는 보수는 순수한 보수가 아니다. 자율경쟁이라는 가치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보수만의 재벌 개혁안이 나와야 한다. 진보에서 이야기하는 재벌개혁안의 세부 사항은 반박하되, 큰 틀에선 같은 방향으로 가는 거다. 예를 들어 대형마트 규제는 겉핥기다. 상속이나 지배구조 같은 부분을 엄격하게 다뤄야 한다.
- 문재인 정부 이후 진보와 보수의 전망과 가야할 길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다.
이 보수를 떠받치는 세 개 다리가 안보, 경제, 교육이다. 2000년대 초까지만해도 ‘진보 교육감 뽑으면 망하는 거 아니냐’, ‘경제는 역시 보수가 잘한다’. ‘안보는 말할 것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이명박 박근혜 시기에 경제적으로 나은 모습 보이지 못했고, 보수가 말하는 자유경쟁을 통한 교육관에 수정이 필요하다, 안보도 경직성에 기반해서는 어렵다는 걸 느꼈다. 이 세 다리를 어떻게 다시 구축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지난 5년은 보수 사상가에겐 암흑기였다. 논리보다는 힘과 카리스마가 지배했다. 차라리 뉴라이트는 신자유주의로 가는 나름의 세계관이라도 있었다. 친박은 세계관이 없었다. 철학의 빈곤이었다. 중세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철학의 빈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보수의 과제다.
손 민주 진보에도 3개의 다리가 있다. 정치적 민주화가 있고, 경제에선 보수적 관점을 취해왔는데 처음으로 이번 정부는 진보로 옮겨왔다. 세번째는 인권. 문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발목을 잡은게 모두 성소수자, 페미니즘 같은 인권 문제다. 인권은 가장 우선적이고, 가장 마지막에 남을, 점점 더 커질 목소리다. 민주주의는 이미 도그마가 됐고, 경제에서 갑질이나 소득격차를 두곤 더이상 전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재벌이 벌어서 맘대로 쓰겠다는데 너희가 어쩔거냐’고 말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유일하게 인권 영역에서 논쟁이 벌어지는데, 여기에 전선이 그어지면 안 된다. 여기서 싸워서 뭔가를 해볼 수 있다고 믿는 정치 세력은 미래가 없다. 시대도, 문명도 읽지도 못 하는 거다. 인권을 가지고 겨루면, 한두번은 이기겠지만 서너번째엔 사라질 것이다.
이 외교안보에서 보수는 지난 9년간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많이 펼쳐봤다. 진보는 그전 10년에 펼쳐봤고, 이번에 다시 펼치고 있다. 양쪽 다 자신의 순수한 이념만으로는 성공시킬 수 없다는 인식을 가졌으면 좋겠다. 외교 안보에 있어서는 양쪽 다 가운데로 와야 한다. 대통령이 집권한 이상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권에선 생각하는 목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세심함을 보여야 한다.
진행·정리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