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
밴디 리 엮음, 정지인·이은진 옮김/심심·2만2000원
“경애하는 오마바 대통령께,
우리는 새 대통령 당선자의 정신 상태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
그의 허풍, 충동성, 모욕이나 비판에 대한 과민반응, 공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명백한 장애 등 널리 알려진 정신적 불안정 증후군을 볼 때, 우리는 그가 막중한 책임을 지는 공직에 적합한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그가 그런 중책을 맡기 앞서 공정한 검사팀으로부터 전면적인 의학적, 신경정신병학적 평가를 받을 것을 강력하게 권고합니다.”
2016년 11월 미국 대선이 치러진 3주 뒤, 하버드대 의학대학원의 주디스 허먼 교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동료 정신의학자 2명이 공동서명한 이 편지는 미국정신의학회(APA)가 규정한 ‘자기애성 인격장애(NPD)’ 판정의 기준과 질환의 특성을 설명한 뒤,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가진 대통령 겸 (미군)최고사령관은 모든 미국인과 세계에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도널드 트럼프 현 미국 대통령 이야기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 임상심리학자, 저널리스트 등 27명이 각기 트럼프 대통령의 정신분석과 의학적 평가, 경험담 등을 담은 글들을 엮은 책이다. 지난해 10월 미국에서 출간되기 전부터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모았고, 다섯달 만에 한국에도 번역본이 나왔다. 오바마에게 편지를 보냈던 주디스 허먼의 동료이자 친구인 밴디 리 예일대 의학대학원 정신의학부 교수가 서문을 쓰고 책을 엮었다. 밴디 리는 한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계 미국인(한국명 이반디)으로, ‘폭력’ 연구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다.
지난해 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 뒤 뉴욕 트럼프타워에서 한 첫 기자회견에서 취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고 있다. 뉴욕/UPI 연합뉴스
정신의학 전문가들이 현직 대통령의 정신 건강을 깨알같이 분석해 ‘공직 부적합’ 판정을 공표하고, 전세계에 ‘위험 경고’까지 내리는 상황은 전례 없는 일이다. 미국정신의학회(APA) 의료윤리원칙에도 어긋난다. 원칙 제7절 3항(일명 ‘골드워터 규칙’)은 “의사가 공인의 정신과적 문제에 관한 일반적 내용을 말할 순 있으나, 직접 검사를 수행하지 않았고 합당한 허가를 받지 않은 한 전문적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비윤리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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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책임편집자 밴디 리를 비롯한 지은이들은 “위급한 상황일 때, 의사는 골드워터 규칙을 어겨야 한다. 우리는 지금이 그런 위급한 상황이라고 생각한다”고 단언한다. “모든 사람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지닌 사람이 명백하게 위험한 정신장애 징후를 보일 때 경종을 울려 대중에게 알리는 일을 수행하지 않는 것 역시 의사들을 향한 공공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란 믿음에서다.
분석 결과는 상상 이상으로 참담하고 충격적이다. “극단적 현재 쾌락주의, 병적인 나르시시즘, 신뢰 부족, 소시오패스(반사회성 인격장애), 악하거나 미쳤거나, 편집증적 망상장애, 치매, 정신적 무능력자(추정)….” 이런 유형의 인물이 지구촌 수십억 인구의 생사를 좌우할 수도 있는 세계 최강대국의 최고 권력자라면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다. 문제는 이게 꿈이나 흑색선전이 아니라 27명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라는 것.
트럼프는 미국 핵과학자회가 매년 인류 위기 정도를 평가해 발표하는 ‘운명의 날’ 시각을 재임 1년 만에 두 번이나 앞당기는 기록을 세웠다. 지난해 초 대통령 취임 일주일 만에 운명의 날 시계(Doomsday Clock)의 분침은 ‘자정 2분30초 전’으로 조정됐다. 1953년 미·소 양국이 수소폭탄 실험을 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할 당시 ‘자정 2분전’ 이후 64년만에 종말에 가장 근접했다. 올해 초에는 북한 핵개발과 트럼프의 초강경 대응이 맞물리면서 다시 30초가 앞당겨지며 운명의 날 시계를 역대 최대 위기 수준으로 되돌려놨다. 북한을 겨냥해 “내 핵버튼이 훨씬 크고 강력하며 실제로 작동한다”거나 “나의 가장 큰 두 가지 자산은 정신적 안정과 정말로 똑똑하다는 것 (…) 나는 매우 안정된 천재!”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린 지 얼마 안돼서다.
영국 화가 존 윌리엄스의 1903년작 ‘에코와 나르키소스’.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시스(오른쪽)은 연못에 비친 자신의 외모에 반해 숲의 요정 에코의 구애에도 아랑곳없이 연못만 들여다보다가 물에 빠져 죽는다. 지독한 자아도취, 자기애적 정신 이상을 일컫는 ‘나르시시즘’이 여기서 유래했다. 위키피디아
임상심리학자 마이클 탠지는 트럼프를 “여우처럼 미친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완전히 미친” 망상장애가 있다고 본다. 대표적 징후가 지난해 3월 트위터에 “끔찍하다! 오바마가 (대선) 승리 직전에 트럼프 타워에서 내 전화를 도청했다는 걸 방금 알았다. 이건 매카시즘이다”라고 주장한 일이다.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탠지가 소개한 망상장애의 일반적 징후 몇가지는 이렇다. 명백한 반대 증거가 있는데도 믿음을 꺾지 않는다, 기괴한 주장은 비유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를 의미한다, 나 혼자만이 선택된 존재로 특별하며 모든 면에서 최고 중 최고다, 망상에 의문을 제기하면 정신적 충격과 본능적 거부반응이 유발된다, 자기에 관한 언급이 매우 많으며 사소한 사건들에 집착한다…. 트럼프의 평소 언행과 놀랍도록 닮았다. 탠지가 진짜로 우려하는 것은 “트럼프는 자신의 근본적 인성구조에 꼭 들어맞는 지도자들에게 끌린다”는 점이다. 오바마의 롤 모델은 케네디, 킹 목사, 만델라였다. 반면 “트럼프에게 롤 모델은 후세인과 김정은, 아사드와 푸틴이었다. 그들은 엄격하게 통제된 사회를 운영할 줄 아는 자들이다!”
필립 짐바르도(심리학자)와 로즈메리 소드(심리치료 전문가)는 “트럼프에게서 극단적 현재 쾌락주의, 나르시시즘, 남을 괴롭히는 행동 등 3개의 원으로 이뤄진 벤다이어그램을 발견했다”며 “이 셋의 교집합으로 만들어지는 충동적이고 미성숙하며 무능한 인물은 최고권력의 지위를 차지했을 때 쉽게 폭군의 역할로 빠져들고 ‘통치 테이블’의 자리들을 가족들로 채운다”고 지적했다. 정신분석의 ‘시간관 이론’에서 과거(긍정, 부정), 현재(쾌락주의, 숙명론), 미래(긍정, 부정) 등 6가지 중 어느 하나에 지나치게 쏠리면 사고가 흐려지고 일상적 결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데, 트럼프는 “눈앞의 순간만을 살면서 쾌락과 신기함, 감각을 추구하고 고통을 회피”하는 유형의 극단이란 것이다. 이런 인물은 “미래나 자기 행동의 결과는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1987년 트럼프의 첫 자서전 <거래의 기술>의 공저자 토니 슈워츠도 1년 동안 그를 지켜본 기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싸움닭’ 기질의 형성 배경을 추론한다. “트럼프는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다 42살에 세상을 떠난 형이 아버지(무자비하게 요구가 많고 까다로우며 투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에게 압도당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트럼프의 세계관은 철저히 아버지에 대한 자기방어의 관점에서 형성됐다”는 주장이다.
2016년11월8일 제45대 미국 대통령에당선된 도널드 트럼프가 다음날 뉴욕 맨해튼의 힐튼미드타운호텔에서 당선 수락 연설을하던 중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있다. 뉴욕/AP 연합뉴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유세 중 지지자들에게 섬뜩한 ‘농담’을 던졌다. “힐러리는 수정헌법 제2조(총기 소유·휴대 권리)를 폐지하려 한다. 그가 연방 대법관들을 임명하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도 수정헌법 2조 지지자들은 할 수 있는 게 있을 텐데….” 유력한 경쟁후보의 암살을 부추기는 것으로 해석되면서 파문이 일었다. 정신건강 상담사인 다이앤 주엑은 “트럼프의 해당 발언은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특징인 공감능력 결핍과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는 의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뻔뻔한 거짓말, 합리적 이해관계에 반하는 충동적이고 강박적인 의사 결정, 미성숙한 대인관계 능력으로 나타나는 자기애적 특성은 (…) 지도력 공백을 만들고 있으나, 자신의 실제 언행과 그 영향력을 평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도 했다.
트럼프는 그러나 지지자들에겐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정신분석가 토머스 싱어는 “미국 국민의 상당수는 미국 안에서 좁아지는 자신들의 입지, 세계 무대에서 좁아지는 미국의 입지를 강화하고픈 절실한 욕구를 느끼는데, 트럼프의 나르시시즘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공격은 이런 욕구에 딱 들어맞는 듯하다”고 평가했다.
베티 텡(트라우마 치료사)은 트럼프는 “심리적·사회적·정치적 토네이도, (…) 우리 안정을 위협하는 존재”라며 “사실보다 감정을 자극하는 거짓을 훨씬 잘 퍼뜨리는 새로운 미디어들의 성향을 인지하고 인터넷 세상에서 빠져나와 자유롭게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권고한다.
책을 읽다보면, 지난해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촛불혁명 전까지 9년이나 우리 국민과 한반도 운명을 좌우했던 최고권력자와 주변 인물들이 머릿 속에 겹치고 ‘시민의 책무’ 같은 말이 떠오른다. 비슷한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인터뷰] 밴디 리 예일대 교수 “조부·어머니에게서 인도주의 배웠지요”
밴디 리 미국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 밴디 리 제공.
미국 정신의학 전문가 27명과 함께 ‘트럼프 정신분석’ 책을 낸 밴디 리(사진) 예일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의 사임 혹은 탄핵까지 염두에 두고 그에 대한 정신건강 분석을 공개했다고 밝혔다. 한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계 미국인(한국명 이반디)인 그는 내과 의사였던 할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인도주의 의료의 정신을 몸에 새겼다고 말했다. 다음은 전자우편으로 주고 받은 일문일답.
-트럼프가 세계 최강대국 지도자로서 매우 위험하다는 진단에 미국인들은 어느 정도나 동의한다고 보는가?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트럼프의 정신 상태를) 우려하는 전미 정신건강전문가 연합’(DangerousCase.org)의 결성에 참여한 정신건강 전문직업인들도 수천 명에 이른다.”
지난해 10월 밴디 리 미국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가 방송의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이 동료 정신의학자 27명과 함께 쓰고 엮은 책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의 출간 배경과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화면 갈무리
-미국정신의학회(APA)가 현직 대통령의 정신분석 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유례 없는 일이다. 이번 책을 트럼프 탄핵이나 사임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나?
“학회는 트럼프에 대한 어떠한 정신분석 결과도 발표한 적이 없다. 우리(책의 저자들)가 스스로 ‘매우 예외적인 상황에 대한 매우 예외적인 대응’으로 한 것이다. 우리는 미국 수정헌법 25조(대통령의 부재나 직무불능에 따른 직위 승계)에 근거해 대통령 탄핵이나 사임, 축출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 트럼프 정신건강 분석을 하고 있다. 지금 당장은 정치적으로나 (미국인의) 심리적으로 실현가능성은 낮다.”
-트럼프 같은 유형의 인물이 막중한 책임을 지는 공직에 선출되지 않기 위해 시민 유권자들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나?
=미국은 군인 및 민간인 공직자를 검증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대통령이나 대통령 후보를 평가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결점이 있다.
-한국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나는 인도주의적 의술의 목적과 가치를 믿으며 지키고 있다. 할아버지(이근영)는 한국의 내과 의사였다. 그 분을 직접 뵌 적은 없지만, 그는 인도주의자였고, 사회의식이 있었으며, 도움이 절실한 이들을 계속 돕기 위해 서울대 의과대학 학장직도 사양했다. 다른 의과대학들과는 매우 다르게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가르침을 구현하고 있는 예일대 의대에서 공부한 것은 행운이다. 어머니는 2016년 미국 대선이 있던 해에 세상을 뜨셨지만, 나는 의료의 인도주의적 목적을 실천하고 생명을 구하며 공공건강을 증진하는 데 기여하는 삶을 결심하는 데 도움을 준 어머니의 유업을 잇고 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