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의 비밀-예술가가 세상에 내놓은 얼굴
로라 커밍 지음, 김진실 옮김/아트북스·3만원
두툼한 외투에 검정 털모자를 쓴 사내가 귀를 붕대로 싸맨 채 정면을 바라본다. 분노와 우수가 뒤섞인 강렬한 눈빛. 빈센트 반 고흐가 좋아하면서도 티격태격했던 친구 고갱이 떠나버리자 홧김에 자신의 귀를 자른 뒤 그린 자화상(1889년)이다. 고흐는 36점이나 되는 자화상에 털끝만큼의 자기 연민도 넣지 않았다. 400년 전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는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그림에서 참수당해 처참한 몰골의 골리앗 머리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다. 반면 17세기 화가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은 대체로 차분하고 점잖은 분위기의 정통 인물화 같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1859년)
영국 미술평론가 로라 커밍이 쓴 <자화상의 비밀>은 15세기 반에이크부터 뒤러, 벨라스케스, 뭉크, 앤디 워홀과 신디 셔먼 등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시대까지 600년 동안 그려져 온 자화상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간다. 모두 115점에 이르는 풍부한 컬러 도판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책이 출간된 2009년 <가디언>, <인디펜던트> 등 영국의 10개 언론사가 ‘올해의 책’으로 선정할 만큼 호평을 받았다.
초상화는 대상의 사실적 재현에 충실하며, 종종 화려하게 치장된다. “군주, 철학자, 귀족이나 교황이 그림으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이는 없다.” 반면 자화상은 자기 모습의 단순한 재현을 넘어서는 의도가 담긴다. 표현 양식도 훨씬 자유분방하다. “이런 종류의 진실은 예술이 아니고선 드러낼 수 없는 내부로부터의 충동이며, 그것은 언제나 모든 자화상에 그 한 자락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1816년). 골리앗의 머리에 화가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리는 이유는 그림 실력 광고, 사랑 고백, 분노와 항의의 표출, 심지어 ‘자살 노트’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결국은 하나로 수렴된다. 내면에 가득 찬 뭔가를 세상에 얘기하려는 것이다. 책의 원제가 ‘세상을 향한 얼굴’인 까닭이다. “서로를 바라보기 위해 태어난 것, 그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사람들의 얼굴을 보려고 합승마차 타기를 즐겼다는 프랑스 인상주의 작가인 에드가르 드가(1834~1917)가 한 말이다.
조일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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