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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가 가보지 못한 길 갔던 이탈리아 현대사

등록 2018-02-22 19:39수정 2018-02-22 21:47

긴스버그의 역작 국내 첫 번역본 선봬
1943년 ‘끔찍한 위기의 나라’에서
GDP 세계 9위 ‘거대한 변형’까지
공산당 등 진보정당 흥망에 촛점

이탈리아 현대사-반파시즘 저항운동에서 이탈리아공산당의 몰락까지
폴 긴스버그 지음, 안준범 옮김/후마니타스·3만3000원

과거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국가들은 세계 지성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에드워드 기번과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제국에 방대한 대작을 바쳤고,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1860년)처럼 마키아벨리가 활동한 르네상스 시기 도시국가들은 수많은 저술을 낳았다. 하지만 더는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이 아니어서인지 현대 이탈리아에 대한 관심은 찾아보기 힘들고, 국내에서도 관련 책은 전무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대 이탈리아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이면서 국내총생산 9위(한국은 11위)에 인구 6천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연합군에 의해 해방이 된 우리나라와 비슷한 현대사의 경험을 가진 나라다. 세계제국이었던 로마보다는 우리와 비슷한 모습을 많이 가진 나라가 된 지금의 이탈리아에서 더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진보 정치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말이다.

현대 이탈리아 역사를 다룬 가장 권위 있는 책으로 알려진 <이탈리아 현대사>가 1990년 출간 이후 처음으로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지은이 폴 긴스버그는 영국 출신의 이탈리아 피렌체대학교 교수(유럽현대사)로 정당 정치 분야의 권위자다. 사법 체계와 대학 구조를 지켜내기 위해 ‘교수들의 반역’이란 이름의 단체를 조직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좌파 정치 운동가이기도 하다. 이런 이력에 걸맞게 그는 정치사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현대사를 서술해가면서 특히 이탈리아공산당과 사회당 등 진보정당의 공과를 짚는 데 공을 들인다.

긴스버그는 서문에서, 1943년의 이탈리아는 농업 비중이 압도적이고, 남부에선 가난이 지독하며, 북에선 독일이, 남에선 연합군이 침략하는 “끔찍한 위기의 나라”에서 45년 뒤 영국과 비등한 경제대국이며 가장 심층적인 사회혁명이 일어난 “거대한 변형”이 이 책의 핵심 주제라고 밝힌다.

1936년 10월25일 ‘추축동맹’을 맺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왼쪽)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오른쪽). 출처 위키미디어
1936년 10월25일 ‘추축동맹’을 맺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왼쪽)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오른쪽). 출처 위키미디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서 시작한다. 1943년 연합군이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섬에 상륙하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왕이 일으킨 궁정 혁명으로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실각하고 감옥에 갇힌다. 히틀러는 군대를 보내 로마를 포함한 중부 지역까지 점령하고, 정치적 동지였던 무솔리니를 구해내 괴뢰정권의 수장으로 앉힌다.

나치 치하에 있던 이탈리아 민중들은 10만명의 레지스탕스 빨치산을 조직해 저항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남부에 들어온 영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은 빨치산들을 돕지 않고 오히려 무장 해제를 시키는 일에만 골몰했다. 처칠 영국 총리는 한때 공산주의와 싸운 무솔리니를 존경했을 정도로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빨치산들이 해방 이후 세워질 국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들은 토리노와 제노바에서 봉기를 일으켜 독일 장군들을 항복시키고, 도망치던 무솔리니를 체포해 즉결 처형했다. 영국의 한 보고서는 “빨치산들의 승리가 없었더라면 연합군이 그토록 신속하게, 그토록 압도적으로, 그토록 적은 희생만으로 승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긴스버그는 “무솔리니 정권을 받아들이고 지지했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이탈리아인들을 경멸하고 신뢰하지 않던 시기에, 빨치산들은 이탈리아의 손상된 이미지를 구원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더욱이 그들은 오래 지속된 반파시즘 전통을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야 했던 이탈리아공산당은 혁명은 고사하고 농지개혁 등 중요한 변혁은 제대로 이루지도 못한 채 자본가-미국-기독민주당 세력에 끌려다니고 만다. ‘민주적 정부의 동맹에 근거해 파시즘과 싸우라’고 지시한 소련의 인민전선 전략과 연합국의 공산주의 경계, 공산당의 안일한 정세 판단이 맞물린 결과였다. 하지만 코민테른의 부비서로 이탈리아공산당을 창립한 팔미로 톨리아티가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 전략을 따라 파국으로 귀결됐을 모험주의나 봉기가 아닌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대중정당을 만든 점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 긴스버그의 생각이다. 긴스버그는 그런 전략이 “나라를 분단시켜버렸을 (…) 불가능한 혁명으로 이끌지 않았고 (…) 민족독립을 제때 성취할 수 있게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었지만, “노동과 자본의 관계와 사회 개혁의 문제에서 (…) 보수 세력들이 번번이 승리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책에는 한국에 잘 알려진 ‘자율주의’(아우토노미) 정치학자인 안토니오 네그리(책에선 토니 네그리)도 등장하는데, 이 자율주의 운동은 1970년대 후반 공산당이 정부 및 기민당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인권 문제마저 침묵하는 데 반발해 일어난 운동이었다.

이탈리아공산당은 1979년에 와서야 기민당과 단절했다. 하나 그때는 이미 자본가들의 힘이 막강해진 상황이었다. 1980년 자동차회사 피아트가 1만4천명의 노동자를 해고하는 데 반발해 일어난 노동자 투쟁은 패배로 끝나버렸다. 이는 이후 노동자-기업 관계의 분수령을 이뤘다. 지은이가 “노동자들이 품었던 희망에 부치는 묘비명”이라고 평가한 노조 대의원 조반니 팔코네의 연설은 지금 한국의 상황에도 울림을 준다. “언제나 여기서 일을 벌였던 건 소수의 노동자들이었어요. (…) 만약 다수가 능동적으로 참여하고자 했다면, 그들 모두가 산 카를로 광장으로 왔다면, 그들 모두가 함께 피케팅에 나섰다면, 동지 여러분 우리는 단지 해고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더 큰 일들을 해냈을 겁니다.”

이탈리아공산당은 소련이 몰락하자 1991년 좌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꾼다. 책에서는 “미디어 제국을 거느린 기업가”로만 한 번 언급되는 극우정치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81)는 1994년부터 세 차례 9년간 집권한다. 다음달 총선을 앞둔 지금도 그가 이끄는 ‘전진 이탈리아’당이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는 상황이다. 이탈리아의 진보정당이 과거 파시즘과 대항했던 빨치산들의 유산을 되살려 다시 부활할 수 있을까? 오랜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문제일 듯하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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