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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용서는 죽이고 싶은 분노와 함께 시작됐다”

등록 2018-02-08 19:44수정 2018-02-08 19:52

끔찍한 범죄폭력 피해자 46명
영국 용서프로젝트 경험 공유
극한 고통서 자기 화해·치유로
“용서는 매순간 벌어지는 행위”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
마리나 칸타쿠지노 지음, 김희정 옮김/부키·1만3800원

마하트마 간디는 “나약한 자는 끝내 용서하지 못한다. 용서는 강한 자에게 주어진 특성이다”라고 설파했다. 예수는 “죄를 지은 자를 일곱번 용서하면 되겠느냐”는 제자의 물음에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용서가 어디 그렇게 쉬운가? 보통사람들에겐 하다못해 사랑의 배신자를 용서하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다. 가수 조용필은 ‘큐’(Q)에서 “너를 용서 않으니 내가 괴로워 안 되겠다,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이라고 노래했다. 하물며, 끔찍한 범죄를 겪은 피해자에게 온몸을 휘젓는 고통과 복수심은 죽음보다 모질고 끈질길 테다.

그럼에도 “폭력, 비극, 불의를 경험했지만 보복 대신 용서와 화해를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한때는 증오 또는 신념으로 폭력을 행사했거나 살인까지 저지른 가해자였지만 뒤늦게 피해자가 건네는 용서의 힘을 깨달은 이들도 있다. 영국의 여성 저널리스트가 쓴 <나는 너를 용서하기로 했다>는 바로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데 엮었다. 책에 등장하는 46명의 인물 모두가 제각각 ‘나’라는 화자가 되어 고통과 분노에서부터 원망과 자책, 연대와 위로, 용서와 치유까지의 힘든 경험을 담담히 털어놓는다. 이들은 지은이가 2004년 설립한 국제자선단체 용서 프로젝트(Forgiveness Project)의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을 통해 용서와 씨름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책은 ‘복수 대신 용서를 결심한 사람들’, ‘지옥 같은 고통 속에서 찾아온 낯선 평화’, ‘용서하는 나, 용서받는 나’, ‘사랑만큼 신비로운’ 등 4부로 짜였다.

1973년 어느 날, 영국 글로스터의 한 버스 정류장에서 대학생 루시가 실종됐다. 그로부터 20년 뒤, 언니 메리언 파팅턴은 동생이 연쇄살인범 부부에게 납치돼 성폭행과 가혹한 고문을 당한 뒤 살해됐으며 주검마저 토막토막 훼손됐다는 소식에 처절하게 무너졌다. “마음을 다잡으려 불교 수련원에도 다녔지만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수많은 감정에 시달리던 중 문득 ‘범인을 용서하려 노력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러자 상상도 못 한 또다른 고통이 밀려왔다. “용서의 마음은커녕 갑자기 사람을 죽이고 싶을 만큼 극심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밀어 올라 가슴 깊은 곳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휩쓸었다. 비명을 지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손톱으로 바닥을 긁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내게 용서는 사람을 죽이고 싶은 분노와 함께 시작됐다.”

메리언은 1995년 공범 로즈마리의 재판을 지켜봤다(주범인 남편은 수감중 자살했다). 로즈마리는 오빠에게 성적 학대를 받았고, 열일곱살 때 버스 정류장에서 납치돼 성폭행당한 경험이 있었다. 메리언에게 “그녀의 삶은 지독하게 잔혹한 방법만이 유일한 살길이라고 여기는 가난하고 메마른 영혼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메리언은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대부분 범죄자들이 어렸을 때 학대를 경험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때부터 “그녀를 악마화하는 대신 인간적 면을 보는 데 집중”하며, 그가 더는 괴로워하지 않길 바라게 되면서 비로소 용서의 마음도 싹을 틔웠다. 그럼에도 메리언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용서하기 위해 노력하고 준비하는 것뿐, 아직은 완전히 용서를 실현하기 어렵다”고 털어놓는다.

2004년 미국 여성 캐시 해링턴은 26살 딸을 가택 침입한 살인범에게 잃었다. “자식을 잃게 되면 세상은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황폐한 곳이 된다.” 1년 뒤에야 범인이 체포됐다. 캐시는 “또다른 생명을 죽이는 데 일조하고 싶지 않았지만, 딸을 죽인 살인자의 생명을 지켜주고 싶지도 않”은 복잡한 심사에 휘말렸다. 2007년 범인이 항소권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법정에서 그의 엄마가 다가오자 덜컥 겁이 났다. 그런데 “그녀는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나보다 더 겁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 우리는 그저 서로를 껴안았다. 나는 커다란 안도와 연민을 느꼈다.”

1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1994년 르완다 내전 대학살 당시 후투족에게 가족이 몰살당한 투치족 청년은 “복수하고 싶었지만 그(절친이었던 가해자)를 찾을 수 없자 대신 나를 죽이기 시작했다. 분노와 비통함, 복수심을 다스리는 데 9년이 걸렸다”고 말한다. 마약과 술을 끊고 신앙에 귀의해 수행하던 중 “아버지를 죽인 자를 용서해야만 한다”는 목소리를 듣는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지, 살인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어느 날 “이제 용서할 준비가 됐습니다” 하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완전한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19~20세기 호주의 악명 높은 백호주의와 원주민 부모-자녀 강제격리 정책의 산증인인 원주민 목사에게 “치유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우리가 받은 상처는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나 “내가 느끼는 이 비통함을 덜어내기 위해선 날마다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며 “용서라는 것은 매순간 벌어지는 행위”라고 강조한다.

반면 아일랜드계 미국인 티제이(TJ) 리든은 열네살 되던 1980년 신나치주의에 가담한 이래 15년간 백인우월주의 운동의 최전선에서 증오와 편견, 인종차별주의를 퍼뜨렸다. 어느날 쇼 프로그램을 보던 어린 아들이 “아빠, 우리는 깜둥이들 같은 건 안봐요”라며 티브이(TV)를 끄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처음으로 흑백논리를 의심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결국 백인우월주의와 작별하기로 하고 주변인들에게 용서를 청하는 과정에서 “평생 처음으로 내가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어주는 이들을 만났고, 진정한 공감과 연민을 느꼈다.” 현재 리든은 ‘증오 퇴치를 위한 태스크포스’에서 일한다.

이밖에도 아들을 죽인 소년을 용서한 그레이스, 끔찍한 성폭행범들을 용서한 매들린,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자살폭탄 테러범을 만난 조, 런던 지하철 테러 때 두 다리를 잃었으나 인류애와 생명의 경의를 통해 두번째 삶을 얻었다는 질 힉스,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아버지를 용서했다고 확신하진 못하지만 인간의 선과 악 양면성을 확신하게 된 서맨사 등 각각의 사연들이 묵직한 감동과 생각거리로 다가온다.

지은이는 46명의 목소리를 모두 전하고 나서도 “용서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가치인지”,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지” 회의적인 질문을 던진다. “종교적 미사여구에 가려진 용서의 본질”을 탐구하기도 한다. 그가 보기에 “용서는 흑도 백도 아닌 회색빛”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확인하고, 거기에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을 본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가 쓴 추천사의 한 대목은 이렇다. “용서의 과정에서 증오와 분노는 배제할 수 없다. 이런 감정은 인간 존재의 일부다. 용서란 복수할 권리를 내려놓고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과 자신을 묶고 있는 분노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본인 또는 사랑하는 혈육이 끔찍한 폭력과 범죄의 피해자가 된 뒤 극도의 고통과 모멸감, 복수심에 시달리다가 국제자선단체 용서 프로젝트의 프로그램과 심리치료, 수행 등을 통해 차츰 화해와 용서, 치유의 과정으로 나아간 사람들의 모습. 부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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