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아리엘 키루 지음, 권오룡 옮김/문학과지성사·1만2000원
“향후 20년 안에 임금제 고용에 기초한 사회는 소멸할 것이다!”
최근 출간된 대담집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의 띠지엔 이런 무시무시한 말이 적혀 있다. 임금제 고용에 기초한 사회가 사라진다니, 그럼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실업자인 디스토피아가 온다는 말인가?
이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대담자가 누구인지 살펴보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한국에선 자크 데리다와의 대담집 <에코그라피> 정도가 번역된, 우리에겐 아직 생소한 프랑스 학자다. 그의 이력서엔 흥미로운 빨간줄이 그어져 있는데, 그는 은행 강도로 5년간 복역한 적이 있다. 20대에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가려고 막노동으로 등록금을 모으다 결국 은행을 털었다고 한다. 감옥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출소 후엔 데리다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2년 지휘자 피에르 불레즈가 만든 현대 음향·음악 연구소(IRCAM)의 소장, 2006년 퐁피두센터 문화 발전 분과위원장 등을 맡았고 <기술과 시간>과 같은 저서로 ‘기술철학의 대가’ 반열에 올라섰다.
신기술, 공상과학 전문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아리엘 키루가 2014년 봄 스티글레르와 대담을 벌일 마음을 먹게 한 것은 그로부터 몇달 전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이 선포한 ‘프랑스 신산업’을 위한 ‘전투 계획 34항’이었다. 여기엔 바이오 의료 기술,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등 우리나라에선 ‘4차 산업혁명’으로 포장된 그 모든 디지털 신기술에 대한 전국가적 투자가 필요하다는 계획이 담겼다. “10년 내에 프랑스 땅에 47만5000개의 일자리와 더불어 450억유로(약 60조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장밋빛 미래를 덧붙여.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는 “제가 책을 쓰거나 위키피디아에 참여하거나 프리웨어를 개발하는 것은 애초에 보수를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 이 경우 약간의 돈을 벌거나 절약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 특별한 건 삶을 통해 나 자신을 건설하고 활짝 피울 수 있다는 것이죠. (…) 일이란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뭔가를 성취함으로써 앎을 키워나가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출처 위키코먼스
하지만 두 대담자는 이런 정치인들의 믿음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말한다. 디지털 신기술들이 미래를 바꿔놓는 것은 맞지만,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대신 파괴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옥스퍼드 대학, 브뤼겔 연구소, 그리고 특히 매사추세츠 공대(MIT)가 맞다면, 자동화의 확산은 향후 10년 안에 이 (성장을 임금으로 재분배하는) 모델에 최후의 일격을 가하게 될 겁니다. (…) 빌 게이츠는 지금부터 향후 20년 안에 우리 사회는 전적으로 자동화될 것이며 고용은 주변적인 게 되리라고 선언했습니다. 랜들 콜린스는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함께 쓴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라는 책에서 앞으로 30년 안에 미국에서 고용이 70퍼센트까지 감축되리라고 단언했습니다.” 이들은 고용을 수호하려는 노동자와 노조의 싸움도 승산이 없다고 본다.
하지만 이들은 이런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독’이자 ‘약’으로,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파르마콘’이라고 말한다. 인간을 자동화 기계로 만들어온 ‘고용’에서 해방시켜줄 신약 말이다. 19세기 초 산업혁명 이후 200년간 신기술로 인해 늘어난 부를 나누는 방식이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임금을 주는 방식의 ‘고용’이었다. 하지만 이런 ‘고용’은 ‘일’을 파괴하기도 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극도로 세분화된 일자리에 고용돼, 반복적이고 흥미를 불러일으키지도 않고 창의력을 발휘할 수도 없는 노동을 해야 했다.
이런 고용경제는 ‘무관심의 경제’도 낳았다. 무관심이란 즉, 돌보지 않는 것이다. 1980년대 초부터 대처(영국 총리)와 레이건(미국 대통령)이 시작한 보수주의 혁명으로 국가는 노인과 장애인 같은 고용되지 않은 사람들을 돌보지 않기 시작했다. 국가는 차례로 기술의 고도화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청년들, 중장년, 여성들에게 무관심해지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방치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일은 장인이나 예술가들의 작업에 가까운데, 오랜 숙달 끝에 자신만의 해석, 관점을 내놓는 것을 말한다. 마치 바이올린 연주자가 바이올린을 제 몸 다루듯 할 때까지 연습한 뒤(‘자동성’) 다른 사람이 만들어낸 적이 없는 즉흥성, 갈래, 해석(‘비자동성’)을 창조해내는 것처럼 말이다.
신기술의 가공할 힘을 이용해 ‘고용’을 ‘일’로 바꾸기 위해선 새로운 분배 체계가 필요하다. 중세가 신분, 근대가 임금노동으로 분배하는 사회였다면 앞으로는 ‘기여’에 의해서 분배하는 사회로 만들어야 한다. 실제로 이미 기여는 경제를 움직이는 한 축인데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이 창출해내는 부의 원천이기도 하다. 스티글레르는 “이 기업들은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사람들에게 공짜로 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기여자들을 착복해 막대한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대신 그는 ‘기여소득’을 도입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기여소득의 아이디어를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개방한 ‘프리웨어’를 개발한 프로그래머와 엔지니어들에게서 얻었다고 한다. 이들이 만든 프리웨어는 누군가 배타적 소유권을 가진 것이 아니기에, 누구나 참여해 새로운 기능을 더하고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인터넷 사전인 위키피디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렇게 사람들의 “할 줄-앎, 살 줄-앎, 배울 줄-앎”을 증진시키는 기여를 측정할 도구와 기준을 만들어 소득을 지급하는 시스템이 정치적 협상을 통해 마련된다면, 고용에서 해방된 인간의 잠재력이 폭발하리라고 그는 생각한다. 고용이 없어졌으니 인간을 갉아먹는 ‘실업’ 또한 사라질 것이다. ‘장인과 예술가와 해커의 세계’가 도래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런 기여경제에서도 성과를 내지 못하는 약자들을 위해서 기본적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본소득이 필요하다. 상황에 따라 고용도 적은 비율로 이뤄지겠으나 부수적 수준에 그칠 것이다. 이를 위해서 프랑스에서 시행하는 ‘예술인 실업급여제도’(앵테르미탕)처럼 지금부터 기여경제를 실험할 ‘자유지대’를 만들어 점차 확대해나가자고 제안한다.
140쪽이라는 짧은 분량의 소책자에 다 담아낼 순 없었겠지만, 고용이 아닌 ‘비고용’ 소득, 즉 부동산과 주식 같은 자본에서 발생하는 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난제가 논의되지 않은 점은 아쉽다. 과연 인류는 새로운 기술과 기존의 자본을 ‘파르마콘’으로 이용해 새로운 사회로 나갈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