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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분단체제의 주홍글씨를 새긴 사람들

등록 2018-02-01 19:32수정 2018-02-01 19:44

조난자들-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에 관하여
주승현 지음/생각의힘·1만4000원

그는 지금도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한가운데에서 지뢰를 밟고 서 있는 악몽에 시달린다. 꼬박 16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긴박했던 15분이 남긴 트라우마는 좀체 가시지 않는다. “그해 겨울밤, 찬바람이 휴전선 철조망에 부딪혀 꺼이꺼이 울음을 토하던 그 밤에, 북한군 대남 심리전 방송국에서 근무하던” 그는 목숨을 건 귀순을 감행했다. 방금 전까지도 동료였던 북한군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곤 에이케이(AK)자동소총뿐이었다.

<조난자들>은 2002년 초 스물두살 나이에 무장탈영해 군사분계선을 넘은 주승현이 한국에 정착해 살면서 경험하고 느낀 소회를 털어놓은 이야기다. 자전적 회고록처럼 쓰였지만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들에 관하여’(책의 부제) 작심하고 발언하는 절절한 호소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1부에서 탈북 이후 삶을 담담히 돌아본다. 2부에선 해방공간에서 백색테러로 악명 높았던 서북청년단(1940년대), 최인훈 소설 <광장>의 이명준으로 표상되는 전후 경계인들(1950~60년대), 북송 재일동포들과 이중간첩 이수근의 비극(1960~70년대), 독일 유학생 신분으로 밀입북과 탈북을 오간 오길남(1980년대), 주체사상의 대부였던 비운의 망명객 황장엽(1990년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는 3만여 탈북자들의 고난(2000년대 이후)까지, 분단 상황에서 “부유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아우른다. 이 책이 한 탈북자의 비망록을 넘어, 분단체제의 모순이 남과 북 양쪽 사회에 드리운 질곡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고발하는 분단 서사로 읽히는 까닭이다.

1961년 8월 동독 군인으론 최초로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독에 온 한스 콘라트 슈만의 탈출 장면을 찍은 이 사진은 ‘자유를 위한 도약’으로 명명됐다. 그러나 정작 슈만은 탈출 후 우울증과 외로움에 시달리다가 통일 뒤 귀향했으나 냉대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각의힘 제공
1961년 8월 동독 군인으론 최초로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독에 온 한스 콘라트 슈만의 탈출 장면을 찍은 이 사진은 ‘자유를 위한 도약’으로 명명됐다. 그러나 정작 슈만은 탈출 후 우울증과 외로움에 시달리다가 통일 뒤 귀향했으나 냉대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각의힘 제공

지은이는 스스로를 “지금도 ‘사선 너머의 사선’을 건너고 있는 조난자”라고 말한다. 하나원에서 퇴소한 뒤 그를 기다린 건 “고립감과 무기력”이었다. 사회에 방출되는 순간 곧바로 ‘잉여인간’으로 전락했다. 모든 게 낯설었고, 처음으로 굶어도 봤다. “한국에서 탈북민이란 이름은 경쟁사회의 아웃사이더이자 분단사회의 주홍글씨”였다. 맨 밑바닥에서 소외와 멸시를 견디고, 말도 안 되는 차별에 좌절하면서 대학에 진학하고, 도서관에서 앉아 공부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10년 만에 통일학 박사 학위를 받은 분투기는 한편의 드라마이자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그는 “북한이 고향이라거나 통일문제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남북 분단체제를 모두 살아낸 수많은 ‘조난자’ 중 한 명으로서 통일을 열망”한다. 통일이야말로 “기형적 분단체제에서 살아온 남북한 사람들 모두를 비정상적인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남북 간 적대와 증오, 불신이 걷히지 않는 한 그 열망조차 조심스럽다. 통일이 또다른 갈등의 시작이지 않으려면 “한밤중에 얻는 ‘대박’이 아니라, 시나브로 ‘작은 통일’이 모여 결실을 맺는 끈기와 인내의 열매여야” 하기 때문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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