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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마주 앉았을 때 평화가 있었다

등록 2018-02-01 19:32수정 2018-02-01 19:43

남북관계 전문가 김연철 교수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대북정책
정부 성격 따라 충돌-공존 널뛰기
“탈냉전으로 ‘사실상의 평화’부터”

70년의 대화-새로 읽는 남북관계사
김연철 지음/창비·1만6800원

꼭 50년 전인 1968년 1월21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 특명을 받은 북한군 특수부대원 31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청와대 턱밑까지 침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들은 우리 쪽 군경과의 격렬한 교전 끝에 김신조를 뺀 전원이 사살됐지만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이틀 뒤에는 북한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해군 함정 푸에블로호가 북한 초계정에 전격 나포됐다.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휩싸였다. 전쟁은 멈췄지만 여전히 정전 상태로 남아 있는 남북 대결구도의 위험천만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올해로 정전협정 65년, 남북 분단 73년을 맞지만 한반도는 지금도 냉전의 격랑에서 표류하고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가슴 철렁한 무력충돌과 긴장만 계속된 건 아니었다. 팽팽한 대립의 한가운데서도 때때로 대화와 협력의 공간이 열렸다. 이산가족 상봉, 세계선수권대회의 남북 단일팀, 두차례의 남북정상회담,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조성 등 극적인 해빙과 만남에 감격하기도 했다.

2000년 6월13일,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직접 마중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두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고 있다. 평양/청와대사진기자단
2000년 6월13일,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북한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직접 마중 나온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두 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고 있다. 평양/청와대사진기자단

<70년의 대화―새로 읽는 남북관계사>는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가 정전협정부터 북핵 문제에 이르기까지 결빙과 해빙을 반복해온 남북관계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기록이다. 지은이는 특히 기존 학계와 정책당국이 남북관계 분석에서 북한의 대남정책이나 국방·외교정책을 중시하던 틀을 깨고, 역대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을 꼼꼼히 비교·분석하고 각 국면의 의미와 시사점을 도출한 뒤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군부독재 시절에도 이뤄졌던 남북의 비밀접촉과 힘겨루기, “서울 불바다” 발언의 진실, 역대 정부의 안보라인 내 갈등, 미국의 한반도 비상계획 등 널리 알려지지 않은 비화들은 조마조마한 현장감을 더한다.

책은 크게 10년 단위 시대순으로 7장으로 짜였다. △전후(1950년대와 제네바 회담)부터 △대결의 시대(1960년대 제한전쟁) △대화가 있는 대결의 시대(1970년대와 7·4 공동성명) △합의의 시대(북방정책과 남북기본합의서) △공백의 5년(김영삼 정부의 남북관계) △접촉의 시대(두번의 남북정상회담) △제재의 시대(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남북관계)까지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대북정책은 전쟁의 연장선에 있었다. 전쟁 중에는 휴전에 반대했고, 전후에도 반공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제네바 회담(1954년)에 반발하는 통에 휴전협상이 깨질 것을 우려한 미국이 ‘이승만 제거 계획’까지 검토했을 정도였다. “미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이승만의 북진통일 의지를 단념시킬 수단이라고 판단”했다.

2016년 3월 경북 포항시 해안 일대에서 한미 양국 군인들이 연합상륙훈련을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016년 3월 경북 포항시 해안 일대에서 한미 양국 군인들이 연합상륙훈련을 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박정희 정부 들어서도 양쪽의 무력충돌이 빈번했지만, 그래도 대화는 시작됐다. 1971년 직통전화 설치를 시작으로 이듬해엔 분단 이래 첫 만남인 적십자회담을 이어가고 7·4 공동성명까지 채택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는 남북 해빙 국면을 국내정치 수단으로 활용하는 이중성도 보였다. 남북 공동합의의 공개 발표를 꺼리던 박정희가 결국 공동성명을 발표한 것은 한달 전인 6월 북한의 김일성이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4단계 군축안을 밝힌 게 직접적 계기가 됐다. “당시 미 국무부는 김일성의 제안을 매우 적극적인 평화 공세로 해석하면서, ‘남북 비밀회담을 공개하도록 남쪽에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평가했다.”

대결과 대화 사이를 널뛰던 분위기가 1980년대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전환을 맞은 것도 역설적이다.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을 유치한 전두환 정부는 한반도 정세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1983년 한국방송(KBS)이 애초 이틀만 계획했던 ‘이산가족 찾기’ 24시간 생방송이 폭발적 반응을 얻으면서 136일간이나 이어진 것도 남북관계 개선의 압박으로 작용했다. 이어 노태우 정부는 ‘북방정책’을 추진해 소련·중국과 수교하고, 남북관계의 당사자 주도 원칙을 세웠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그리고 남북 간 화해·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가 이때 나왔다.

1987년 민중항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박정희 쿠데타(1961년) 이후 1993년 첫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나 지은이는 김영삼 정부가 “북한이 도발하면 대북 강경여론에 올라타고, 정부 능력을 문제 삼으면 장관을 교체”하는 식으로 전략도 원칙도 없이 눈앞의 정치적 이익에 급급했다고 혹평한다. 역대 정권 중 남북회담 횟수도 가장 적었다. 1994년엔 북한과 미국이 각각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 수용과 한-미 군사훈련 중단을 교환한 ‘슈퍼 화요일’ 합의를 이뤘음에도 김영삼 정부는 ‘남북대화 먼저’를 구실로 역사적 합의에 어깃장을 놨다.

특히 북한이 남쪽 정부에 강하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온 실무접촉의 동영상 녹화 테이프를 전체 맥락에 상관없이 가장 자극적인 2분40초 분량의 테이프만 잘라 공개한 건 최악이었다. 김일성 사망과 조문 파동이 인 것도 그 해였다. 북미 합의가 무산되고 한반도는 전쟁 위기까지 치달았다가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중재로 고비를 넘겼다.

2017년 7월4일 북한 <조선중앙텔레비전>이 방영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 시험 발사 장면. 연합뉴스
2017년 7월4일 북한 <조선중앙텔레비전>이 방영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형 시험 발사 장면. 연합뉴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헝클어진 남북 간 신뢰와 평화 공존을 구축하기 위한 ‘햇볕정책’을 폈다. ‘퍼주기’라는 일부의 비난을 무릅쓰고 대북 쌀 지원을 추진했고 금강산 관광 사업, 개성공단 조성, 철도·도로 연결 등 경제·사회·문화적 교류를 이어갔다. 이 시기 가장 큰 성과는 상대방 체제 인정과 공존에 합의하고 북핵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남긴 두차례 정상회담이었다. 특히 분단 반세기 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낸 김대중 정부의 통일정책을 지은이는 “패러다임의 전환기”라고 평가한다. 후임 노무현 정부 시기에 남북 간 군사충돌은 한 번도 없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9년 동안 남북관계는 ‘오래된 과거’로 후퇴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과 함께 통일부를 폐지해 외교통일부로 통합하려다 거센 반발을 샀고, 박근혜 정부는 태생부터 “노무현 정부가 북방한계선(NLL)을 양보했다고 주장하는 북풍으로 대선을 치렀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과 ‘그랜드 바겐’,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이름만 거창하고 실행 방침이 텅 빈 정치적 구호”에 그쳤다. 박근혜의 ‘통일 대박론’은 그 결정판이었다. 지은이는 두 보수정권의 대북정책을 각각 ‘진지함의 부족’(이명박), ‘현실성의 고의적 결여’(박근혜)라는 말로 평가했다.

꼭 1년 전 겨울, 서울 광화문광장은 수백만 촛불로 넘실거렸다. 그렇게 들어선 문재인 정부의 평화와 통일 비전은 어때야 할까? 현재 청와대 국가안보실 자문위원이기도 한 지은이의 관심도 이 지점에 닿아 있다. 지은이는 “정치적 협상의 결과물인 ‘법적 평화’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상의 평화’”라고 강조한다. ‘사실상의 평화’란 “법적·제도적 합의의 이행 과정을 포괄하며, 관계 변화를 통해 분쟁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면서 분쟁의 상처도 치유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지은이는 “6·15 공동선언 이후 남북한이 발전시켜온 분야별 협의체를 더 진전시키고, 그 성과를 반영해 ‘남북연합’의 제도적 수준을 점진적, 단계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남북관계의 기본 성격을 냉전체제에서 탈냉전체제로 전환할 때 ‘사실상의 통일’ 상태는 실현될 것이며, 이는 자연스럽게 법적·제도적 통일의 기회를 가져다줄 것”이란 전망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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