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
엄정순 지음/샘터·1만원
“선생님은 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
아이의 뜬금없는 질문에 선생님은 순간 당황했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내가 어떻게 보는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그냥 잘 보이는데….’ 선생님은 서양미술을 전공한 화가, 아이는 시각장애를 가진 초등학생이었다. “세상이 온통 뿌연 분홍색으로만 보인다”는 아이는 ‘본다’는 게 어떤 건지 너무 궁금했다. 그러게? 대체 ‘본다는 것’이 뭘까? 대상의 시각적 표현을 업으로 삼는 미술가에게 익숙한 듯 낯설고 날선 질문이었다. 아이의 궁금증은 작가에게도 그대로 큰 화두가 됐다.
지난 22일 엄정순 화가가 서울 삼청동 우리들의 눈 갤러리에서 ‘앞이 안 보이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미술 작업 이야기를 담은 책 <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의 출간 기념 전시작품을 배경으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는 화가 엄정순이 22년째 ‘앞이 안 보이는 아이들’과 함께 미술 수업을 하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은 가치들을 잔잔하게 풀어놓는 이야기다. 책 표지 제목 아래엔 작은 글씨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의 빛을 따라서’라는 부제가 달렸다. 작가는 되도록이면 ‘시각장애아’ 대신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이란 표현을 쓰려 한다고 했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다른 감각 다른 관점으로 본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서울 경복궁 옆 북촌(삼청동)에는 아기자기한 박물관들과 화랑, 공예품 가게들이 모여 있다. 정감어린 골목길을 올라가다 보면 빨간색 작은 간판에 ‘우리들의 눈’이라고 쓰인 갤러리가 나온다. 엄정순 화가의 ‘코끼리 프로젝트’ 작업실이자 시각장애 미술작품 전용 전시공간이다. 지난 22일 작가를 찾아간 갤러리는 마침 이 책의 출판기념 전시로 꾸며졌다. 작품은 흔히 생각하는 그림이나 조각이 아니라, 벽면을 빼곡히 채운 글자들이다. 책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를 형상화한 ‘텍스트 전시’(2월14일까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린이들이 ‘자기 몸 그리기’ 미술 수업을 하고 있다. (사)우리들의 눈 제공
코끼리 프로젝트는 작가가 2009년부터 맹학교 아이들과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본다는 것’의 의미를 코끼리를 통해 탐색해오고 있는 작업이다. 처음 시작한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어렸을 때부터 ‘본다는 것’에 대한 의문이나 호기심이 컸어요. 그래서 화가가 됐나 봐요.(웃음) 시각 예술가로서 그 질문을 생각해보고 교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를 찾고 있었죠.” 1990년대 중반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어느 지방의 대학 교수로 있던 중, 그 지역 맹학교 아이들을 위한 성당을 지어주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건축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순간이었다. 세계 여러나라의 건축물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눈을 뜨게 된 그는 아예 교수직을 그만두고 맹학교 미술 수업 자원봉사에 뛰어들었다.
엄정선 작가의 코끼리 프로젝트에 참여한 맹학교 어린이가 생전 처음 코끼리를 직접 만져보고 있다. (사)우리들의 눈 제공
그런데 왜 코끼리 프로젝트일까? “10여년 전 동남아 여행 중에 무심히 들판을 걸어가는 코끼리를 보는 순간, 직관적인 영감이 튀어나왔어요. 코끼리가 나를 어떤 근원으로 데려간다는 느낌….” 그때부터 집중적으로 코끼리 드로잉을 시작했다. 불교 열반경에 나오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우화도 떠올랐다. 부분만 보고 전체를 아는 것처럼 여기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가르침이다. ‘그래, 아이들에게 코끼리를 만져보게 하자!’ 형상을 뜻하는 한자 ‘상(像)’도 사람 인(人) 변에 코끼리 상(象)이 합쳐진 글자였다. 우여곡절 끝에 광주 우치동물원에서 최초로 맹학교 아이들이 직접 코끼리를 만져본 뒤 그림을 그리고 찰흙을 빚는 미술 수업이 시작됐다. 아이들의 표현욕구를 실현하면서 작가 자신도 소중한 배움을 얻는 수업이었다. 그렇게 코끼리와 동행하며 근원을 찾는 ‘코끼리 걷는다’와 맹학교 아이들의 ‘코끼리 만지기’가 합쳐져 코끼리 프로젝트가 됐다.
교실에선 또다른 세계가 열렸다. 아이들은 곧잘 ‘생전 처음 듣는’ 질문을 했다. “그때마다 허를 찔린 듯 마음 한가운데 파문이 생기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한번은 초등 4학년 아이들과 점토 자화상 만들기 수업을 했다. 사람의 얼굴을 또렷이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은 조심스레 서로 얼굴을 만져보고 낄낄거리며 머릿속에 형체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문득 한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제가 보기엔 사람은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은데, 왜 누구는 예쁘다, 누구는 밉다 하는 거예요?” 아이의 간결한 질문은 작가에게 “도대체 아름다움은 뭐고 추함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미학적 질의로” 다가왔다.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1. 엄정순, 아크릴, 오일스틱, 2010. (사)우리들의 눈 제공
꼭 10년 전인 2008년엔 국내 최초로 맹학교에서 사진 수업을 시작했다. 가을 햇볕이 좋았다. 아이들은 각자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장소를 찍거나, “(주변의) 소리를 찍고, 온도를 찍고, 냄새를 찍고, 만져서 확인되는 것”들을 찍었다. 한 아이가 물었다. “선생님, 바람도 찍을 수 있나요?” 작가는 책에서 “왠지 그들은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상상력이 있으니 말이다”라고 고백했다.
작가는 이 책의 또다른 제목으로 ‘세상에 없는 질문’을 생각했다고 한다. “미술 표현이라는 게 이미지로 세상에 말을 거는 행위거든요.” 아이들은 이전엔 없던 질문으로 세상에 말을 걸었다. 선생님은 세상이 어떻게 보이세요? 반짝인다는 건 어떤 거예요? 바람도 찍을 수 있나요? 동물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요? 작가는 “내게 본디 내 육안과 타인의 눈, 두 가지 눈이 생기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갤러리 이름이자 작업 프로그램이기도 한 ‘우리들의 눈’의 영문 표현을 ‘Another Way of Seeing’(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이라고 한 것도 그래서다. 2015년엔 이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미술대학 진학생도 나왔다.
‘잠을 자고 있는 코끼리’. 맹학교 어린이가 생전 처음 코끼리를 만져본 뒤 점토로 빚은 작품이다. (사)우리들의 눈 제공
시각장애 어린이가 코끼리의 코와 자신의 손이 만나는 극적인 경험을 점토로 표현한 작품. (사)우리들의 눈 제공
그는 자신의 작업이 단순히 시각장애아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시혜로 보이지 않길 바란다. “저와 아이들은 ‘시각’이라는 감각에선 전혀 다른 세계에 있지만 그 틀을 벗으면 서로 낯섦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어? 다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같구나! 저는 그 두 세계를 재미있게 합치는 해설가이죠.”
작가는 책에 이렇게 썼다. “미술작업을 하고 있는 우리들 중에 보지 못하는 눈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시력과 시야와 색깔은 다르지만, 우리들의 눈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보고 있었다. 누구에게 보이는 것이 누구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렇게 서로 다른 지점에서 볼 뿐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