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맑음-망원시장 여성상인 구술생애사/최현숙 등 지음/일곱번째숲·1만5000원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베이비부머 세대의 구술생애사를 통해 본 희망의 노년 길 찾기/김찬호 고영직 조주은 지음/서해문집·1만3500원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다. 요즘엔 집 주변 조그만 재래시장만이 아니라 대형마트도 잘 가지 않는다. 스마트폰 앱으로 생필품을 4만원 이상만 사면 배송료 없이 집으로 배달해주는 인터넷쇼핑 때문이다. 비록 집 앞이지만 무거운 생수를 어깨로 짊어지고 올 필요가 없어 그 편리함에 굴복하고 말았다. 나 같은 게으름뱅이들이 점점 늘고 있어서, 재래시장 같은 곳들은 얼마 가지 않아 없어질까 걱정과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망원시장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좀 다르다. 연예인과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핫플레이스’이면서, 더 앞서는 대형마트와 끈질긴 투쟁을 벌여 성과를 일궈낸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12년 대형마트인 홈플러스 합정점 입점 반대 투쟁을 벌여 홈플러스익스프레스 망원점 폐점과 대형마트 의무휴업일 시행을 이끌어내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불리기도 했다. 가게를 비울 수가 없어 평생 일주일 이상 휴가를 가본 적이 없다는 상인들이 다섯 차례나 점포를 동맹휴업해가며 2년 넘는 투쟁을 벌인 끝에 일군 성과였다. 상인들의 단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망원시장 인근 합정동에 있는 ‘말과활 아카데미’에서 구술생애사 강좌를 들은 여성 수강생 9명이 망원시장의 여성 상인들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상인회장이니 서울시의회 비례대표니 드러나는 자리엔 남성들이 있었지만, 그 뒤에는 오랜 기간 장사를 해오며 끈끈한 관계를 맺어온 여성 상인 간의 강한 결속이 있었다는 데 주목했다. 그렇게 9명의 여성 상인이 9명의 여성 필자들을 만나 들려준 살아온 이야기가 <오늘은 맑음>이란 제목의 책에 오롯이 담겼다.
망원시장에서 전통과자와 닭을 파는 망원유통을 운영하는 박미자씨.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 시장이란 데가 옆집도 영향을 받으니까 내가 맘대로 닫기가 좀 그래. (그러다) 해외여행을 올해 4월에 처음 다녀왔어. 진짜 큰맘 먹고 4일 닫은 거지.” 사진 이경훈·일곱번째숲 제공
책은 두 갈래 결로 읽힌다. 경리·직공·시다 같은 저임금 업종을 거치고 가게를 연 뒤 아이엠에프(IMF) 사태를 헤쳐온 ‘자영업자 생존기’이면서, 딸이라 받는 천대와 시집살이와 독박 육아·집안일 등 여성으로서 차별을 겪어야 했던 1960년대생(1명은 50년생) ‘여성들의 서사’가 그것이다.
교동왕족발을 운영하는 방보경(49)은 강원도 정선군 광산촌에서 살아남은 4남매 중 셋째딸이다. 다섯명은 어려서 죽었다. 부모는 하나 남은 아들을 편애했다. 대신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물 길어다 주고, 밭에서 배추를 사다가 장에서 팔았다. 고교 등록금은 항상 제때 내지 못했다. 수학여행 때는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그에게 김밥을 싸다준 영숙이를 지금도 다시 만나보고 싶다. 고교 졸업 뒤 섬유공장을 거쳐, 컴퓨터디자인 학원을 다니다 고향 교회를 같이 다닌 남편을 만나 동거를 하다 딸을 낳고 결혼한다. 둘째도 딸을 낳았을 때, 아버지가 친구인 시아버지에게 ‘딸 낳아 죄송하다’면서 90도로 허리를 굽혀 사죄를 한 모습을 잊지 못한다. 산후우울증을 겪다가, 이를 떨쳐내기 위해 부천 이마트에서 일을 시작한다. 이마트 입점업체 관리자로 일을 하다가 박한 급여 때문에 1997년 아이엠에프 이후 부천시장에서 족발 장사를 시작한다. 여자 혼자 하다 보니 술 마시던 남자와 욕 대거리를 하기도 한다. 2015년 망원시장으로 옮겨왔다. 주변 여성 상인들과 함께 젬베를 배워 공연을 하는 일이 즐겁다.
망원시장은 2012년 상인회를 중심으로 대형마트 홈플러스 저지 투쟁을 벌여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2014년엔 망원시장 상인인 김진철씨를 비례대표(더불어민주당) 서울시의원으로 배출하기도 했다. 사진 이경훈·일곱번째숲 제공
자신이 만드는 물건과 음식에 대한 상인들의 거짓 없는 자부심도 인상적이다. ‘장사꾼이 앉았던 자리에선 풀도 안 난다’는 말도 있듯이 ‘이문을 많이 남기기 위해 질 나쁜 상품을 속여 팔지 않나’ 하는 시장상인들에 대한 오해를 씻어준다. “저희는 여기서 앞으로도 장사할 거고, 저희를 믿고 수년 동안 오시는 단골들이 많기 때문에, 좀 힘들어도 조금 가격이 나가는 걸로 가져와서 팔아요.”(대진청과 김미숙) 일등급 재료만 써서 떡을 만드는 종로연떡방과 족발의 짙은 갈색을 내는 용도로 쓰이는 커피와 캐러멜을 넣지 않고 야채를 듬뿍 넣어 맛을 낸다는 교동왕족발 이야기에 입에 침이 고이면서 ‘언제 한번 망원시장을 꼭 들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망원시장은 또다른 싸움에 나섰다. 지난해부턴 인근 상암디엠시(DMC)에 조성될 초대형 쇼핑몰인 롯데몰 건설 반대 투쟁의 열기를 지피고 있다. 점점 거세지는 대형마트와 인터넷쇼핑의 물결 속에 재래시장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마포 민중의집 전 대표이자 망원동주민회 대표인 조영권은 책 말미에 쓴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형마트에서 우리는 너와 내가 없다. 하지만 시장은 다르다. 시장에서 우리는 상인과 관계로 너와 내가 다른 개성을 발휘할 수 있다. 시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관계를 주고받는 곳이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일하는 상인이다. 상인이 건강하고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전통시장 지원의 새로운 방식이어야 한다.” <오늘은 맑음>을 읽고 나니 이전에는 스쳐 지나갔던 좌판 뒤의 시장상인들이 살아온 이야기들이 궁금해졌다. 이야기가 있다면 승리하지는 못할지라도 지지는 않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는 1950년대 중후반생 ‘베이비부머’ 3명의 구술생애사를 담은 책이다. <모멸감>의 저자로도 잘 알려진 사회학자 김찬호와 문학평론가 고영직,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 조주은이 듣는 이로, ‘문래동 홍반장’ 최영식(64)씨와 ‘자원봉사의 달인’ 김춘화(58)씨, 정광필(61) 전 이우학교 교장이 말하는 이로 나섰다. 저자들의 문제의식은 현역에서는 물러났지만 노인층으로는 편입되지 않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노후에 어떤 시간을 보낼지 밑그림을 좀처럼 그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김찬호는 “실마리는 이미 지나온 발자취에 숨어 있다. (…) 구겨지고 얼룩진 시간일지라도 찬찬히 응시하다 보면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복선이 떠오를 수 있다”며 이들에게 자신의 생애를 정리해볼 것을 독려한다.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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