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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불편한 사진, 그 진실을 직시하라

등록 2018-01-18 19:51수정 2018-01-19 10:02

전쟁·재난 참상 찍은 다큐 사진
“희생자 모독하는 관음증” 비판에
“고통의 기록은 저항의 기록” 반박
포토 저널리즘의 가치·의미 복권

무정한 빛-사진과 정치폭력
수지 린필드 지음, 나현영 옮김/바다출판사·2만8000원

여기, 헐벗고 굶주린 흑인 남자의 사진이 있다. 허벅지는 손목만큼이나 가늘고, 칠흑처럼 검고 극도로 마른 얼굴에 하얀 이가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뼈만 남은 울퉁불퉁한 등에 고름과 파리가 들끓는 이 남자는 식량 배급소 쪽으로 네발짐승처럼 기어가고 있다. 1993년 수단 대기근의 참상을 몸으로 증언하는 이 사진은 “해체된 인간성의 완벽한 예시”다. 이런 사진은 또 어떤가. 체첸 폭탄 테러(1990년대)의 어린 희생자가 병원 침상에 벌거벗고 누워 있다. 연약한 어린이의 피부가 드러난 맨가슴과 볼록한 배꼽, 작은 성기, 그리고 각각 허벅지 위쪽으로 절단된 두 다리가 보인다. 둘 다 미국 포토저널리스트 제임스 낙트웨이(69)가 카메라에 담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진실이다.

무력분쟁과 학살, 정치폭력, 빈곤, 재난 등 끔찍한 인간성 파괴나 비참한 상황을 기록한 사진은 지금껏 격렬한 논란의 중심에 있다. 포스트모던 비평가들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타인의 고통을 여과 없이 사진에 담고 그걸 보는 행위는 “희생자를 모독하고, 관음증을 부추기며, 자극에 지쳐 참상에 둔감하게 만드는 ‘재난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1970~80년대 미국의 문화비평가 수전 손택과 마사 로슬러,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 등이 대표적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1993년 8월 발행한 잡지에 제임스 낙트웨이가 수단의 대기근 피해자의 참담한 모습을 찍은 사진을 실으면서 ‘슬로 모션으로 진행되는 학살’이란 제목을 달았다. 위 사진은 2014년 <타임>이 낙트웨이의 보도사진 계약 30주년을 기념하는 기사에 당시 사진을 소개한 것이다. <타임> 누리집 갈무리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1993년 8월 발행한 잡지에 제임스 낙트웨이가 수단의 대기근 피해자의 참담한 모습을 찍은 사진을 실으면서 ‘슬로 모션으로 진행되는 학살’이란 제목을 달았다. 위 사진은 2014년 <타임>이 낙트웨이의 보도사진 계약 30주년을 기념하는 기사에 당시 사진을 소개한 것이다. <타임> 누리집 갈무리

미국 언론학자 수지 린필드의 <무정한 빛―사진과 정치폭력>(2010)은 “손택의 포스트모던 및 포스트구조주의 후계자들이 다큐멘터리 사진의 전통과 실천과 이상에 대해 품고 있는 경멸을 반박”하는 비평서다. 지은이는 “(위 비평가들과 달리) 사진을 조각조각 해체하기보다 사진에 반응하고 사진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응수한다. 책은 크게 3부로 짜였다. 1부 ‘논쟁’에선 사진 비평의 역사와 영향을 살핀다. 2부 ‘장소’에선 각기 다른 4개의 시공간에서 벌어진 역사적 순간을 기록한 사진을 다룬다. 독일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 인간의 수치와 굴욕을 혁명 수단으로 삼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내전에 동원된 아프리카 소년병과 어린이 희생자, 미국이 이라크 침공 뒤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저지른 포로 학대 사진들이다. 3부 ‘인물’에선 로버트 카파, 제임스 낙트웨이, 질 페레스 등 3인의 뛰어난 포토저널리스트의 사진과 철학을 비교·분석한다.

1944년 5월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막 도착해 가스실로 직행하는 유대인 여성과 어린이들. 나치 친위대(SS)가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1944년 5월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막 도착해 가스실로 직행하는 유대인 여성과 어린이들. 나치 친위대(SS)가 촬영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린필드의 주장을 따라가려면, 일부 비평가들이 사진을, 정확히는 인간의 신체에 가해진 반인도주의적 만행을 기록한 사진을 혐오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

“포스트모던의 관점에서 사진은 자본주의에 저항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원죄”가 있다. 그들은 “사진이 특별히 위험한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지배계급 체제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방해한다”고 여겼다. “다큐멘터리는 공포영화와도 비슷해서, 공포의 외양을 띠고 위협을 판타지로 바꿔버린다.”(1981, 마사 로슬러) 앞서 이미 반세기 전에 “포토 저널리즘이 실제로 이 세계의 조건을 둘러싼 진실을 드러내는 데 기여한 바는 전혀 없으며, 반대로 사진은 부르주아지의 손에 들어가 진실에 맞서는 끔찍한 무기가 됐다”(1931, 발터 베냐민)는 주장이 나왔었다. 사진이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 쓰이거나 인간성 파괴 범죄를 가리고 호도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사례는 흔하다. 나치의 대중계몽선전장관이었던 괴벨스가 주도한 이미지 조작은 대표적이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진과 이미지는 손쉽게 만들어지고 소비되며 인간을 대상화하는 상품이 됐다.

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스레브레니차에서 보스니아의 기독교 민병대가 세르비아계 무슬림들을 집단 학살해 암매장한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 희생자는 머리에 총을 맞고 숨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스레브레니차에서 보스니아의 기독교 민병대가 세르비아계 무슬림들을 집단 학살해 암매장한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 희생자는 머리에 총을 맞고 숨졌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수전 손택이 <사진에 대하여>(1977)에서 사진의 속성을 표현한 단어들은 경멸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에게 사진은 “거창하고”, “기만적이며”, “제국주의적이고”, “관음증적이고”, “약탈적이고”, “중독되기 쉽고”, “정신적 오염을 피할 수 없는”, “부드러운 살해”일 뿐이다. 롤랑 바르트 역시 <카메라 루시다>(1980)에서 사진가를 “죽음의 대리인”으로, 사진은 “단조롭고”, “진부하고”, “어리석고”, “교양 없는”, “재난”으로 묘사했다. 이런 인식은 급기야 “다큐멘터리 사진은 인간의 비참함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포르노그래피”(1978, 앨런 세쿨라)라는 조소로까지 이어졌다.

영화 잡지 <아메리칸 필름>의 편집장을 지낸 지은이는 이런 비판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대부분의 현대 사진비평가가 스스로를 좌파로 정의하지만, 이들의 사진 혐오는 체제전복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도덕적 무기력함’을 감추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사진을 포르노에 빗대는 것도 부당하다. “포르노그래피는 섹슈얼리티를 표현함으로써가 아니라 배신함으로써 보는 이를 매혹”하며, “남이 봐선 안 될 것을 보았을 때 가치가 감소하는 뭔가를 폭로”하는 것이다. 고통받는 사람들, 고통에 빠진 신체를 찍은 사진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이런 사진은 “존재하지 말아야 할 것을 폭로”한다. 육체적 사랑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지만, “재난은 모두에게 공통된 사회적 조건”이다.

1941년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소수자 강제수용 지역)에서 유대인 식별 표식인 ‘다윗의 별’ 완장을 파는 여인. 이 사진을 찍은 나치 군인 하인리히 외스트는 뒷날 “여자는 금방이라도 쓰러져 다음 순간 바로 숨을 거둘 것처럼 보였다”고 술회했다. 바다출판사 제공
1941년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토(소수자 강제수용 지역)에서 유대인 식별 표식인 ‘다윗의 별’ 완장을 파는 여인. 이 사진을 찍은 나치 군인 하인리히 외스트는 뒷날 “여자는 금방이라도 쓰러져 다음 순간 바로 숨을 거둘 것처럼 보였다”고 술회했다. 바다출판사 제공

지은이는 불편한 사진을 외면하지 말고 똑바로 바라보라고, 그럴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고통의 이미지는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이것은 일어나선 안 될 일’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런 일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는 동시에 ‘이 일은 중단돼야 한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기록은 저항의 기록이며, 우리가 세상을 파괴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포토저널리즘의 의미와 가치를 되살리는 복권 선언이다.

책은 주요한 다큐 사진들과 그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면서 시종 묵직하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폭력과 고통이 담긴 사진을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런 사진을 거부하는 것은 희생자를 존중하는 행위인가? 왜 이런 사진은 관음증을 자극하는 착취적이고 선정적 사진이라고 비난받는가? 사진 속 사람들과 연대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나아가, 사진이 없다면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실제로, 2015년 9월 터키의 휴양지 해변에 싸늘하게 식은 몸으로 파도에 떠밀려온 세살배기 어린이의 주검을 찍은 사진은 세계적인 반향을 낳았다. 시리아 내전을 피해 바다 건너 유럽으로 가던 중 조난당한 난민 가족의 막내였다. 사람들은 큰 충격과 수치심에 휩싸였다. 한 장의 사진이 수백만 난민에게 굳게 닫혀 있던 유럽 국경의 빗장을 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2015년 9월 터키 경찰이 보드룸 해변에서 숨진 채 파도에 떠밀려온 시리아 난민 알란 쿠르디(3)의 주검을 수습하기 앞서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보드룸/AP 연합뉴스
2015년 9월 터키 경찰이 보드룸 해변에서 숨진 채 파도에 떠밀려온 시리아 난민 알란 쿠르디(3)의 주검을 수습하기 앞서 현장을 기록하고 있다. 보드룸/AP 연합뉴스

이번에 처음 한글본을 얻은 원서의 제목은 ‘크루얼 레이디언스’(The Cruel Radiance). 사진을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빛의 발산’으로 은유했다. 사진이란, 카메라로 붙잡지 않았더라면 문자 그대로 빛의 속도로 사라져버렸을 어떤 한 장면을 오롯이 물리적으로 포획한, 차갑지만 차가울 수 없는 기록이다. 영어 낱말 ‘Cruel’은 ‘남에게 부당한 고통을 주는’, ‘남의 고통에 무감각한’이란 뜻이다. 지은이는 사진이라는 ‘존재의 무정한 빛’에 눈길을 돌려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2003)에서 이미지 과잉 시대의 현대인들이 타인의 고통을 감각적으로 소비하고 마는 현실을 비판한 것과 맥락이 닿는다. 무엇을 보느냐(시선의 대상)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시선의 태도)가 문제였던 셈이다.

지은이는 “독자들이 이 책에서 다룬 사진과 다루지 않은 다른 사진을 찾아보고, 그 사진들이 증언하는 비참한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기를” 바란다. “이것은 우리 사진이며 우리 역사인 까닭이다. 이 사진들을 보기로 하든 안 하든, 심지어 이 사진들이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척하더라도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포스트 모더니즘: 20세기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품고 탈중심·다원적 사고를 앞세워 규칙·권위·규율 따위를 해체하려는 사상적 경향.


낙관·파국·회의…포토저널리즘의 세 빛깔

로버트 카파. 1937년 5월 스페인 내전의 현장을 16㎜ 영사기로 촬영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로버트 카파. 1937년 5월 스페인 내전의 현장을 16㎜ 영사기로 촬영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근대의 발명품인 사진은 맨 처음부터 본성이 혼란스러웠다. 과학/마술, 예술/상업, 저널리즘/감시, 창조/모방 같은 상반되는 평가 속에서 의혹과 논란의 대상이었다. “꿈꾸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것”을 그린다는, 기술 복제에 대한 거부감과 비난이 그 시작이었다.

이 모든 논란에 아랑곳없이 포토저널리즘에 굵은 획을 새긴 사진가들이 있다. 미국 언론학자 수지 린필드는 비평서 <무정한 빛―사진과 정치폭력>의 3분의 1을 할애해 3명의 인물과 그들의 사진 철학을 조명한다. 로버트 카파(1913~54, 헝가리→미국), 제임스 낙트웨이(69·미국), 질 페레스(71·프랑스)가 그들이다.

‘낙관주의자’ 카파 티브이(TV)가 등장하기 전 포토저널리즘의 전성기인 1930~50년대까지 가장 전형적인 전쟁사진가. 스페인 내전의 한순간인 <어느 병사의 죽음>은 전설적 작품으로 기억된다. 2차 대전, 인도차이나 전쟁 등에서도 최전선을 누볐다. 린필드는 “전쟁 한복판에서 찍었든 민간인 사이에서 찍었든 카파가 스페인에서 찍은 사진은 자발성을 기념하는 사진이며, 인간임을 경험하는 것이 전시에조차, 강압 아래서조차 경이로 가득한 매우 기쁜 일인임을 암시한다”고 평가했다.

제임스 낙트웨이.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임스 낙트웨이. 위키미디어 코먼스

‘파국주의자’ 낙트웨이 20세기 후반의 전쟁과 학살, 대형 재난 등을 담은 낙트웨이의 사진은 카파와 대척점에 있다. 묘사는 충격적일 만큼 잔인하며 본능적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린필드는 그의 사진이 아니라 현시대가 그렇다고 설명한다. “로버트 카파가 정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충동이 일치하던 행복한(?) 시대를 살았다면, 우리는 그런 충동들이 산산조각 난 야만적 허무주의 시대를 살고 있”으며 “카파는 명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낙트웨이는 그런 주장을 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회의주의자’ 페레스 그는 장례식장과 묘지를 자주 찾았다. 이런 곳은 분명 혁명가를 위한 장소다. “타나토스, 즉 죽음의 본응이 혁명의 동력이며, 모든 장례식은 감정적 카타르시스이며 정치적 저항이자 복수의 산실”인 법이다. 보스니아 내전, 이슬람혁명 직후 이란, 르완다 내전의 인종청소 등을 담은 그의 사진에는 “위로할 길 없는 깊은 비애가 스며 있으며, 대개의 좌파 사진을 특징짓는 허세는 찾아볼 수 없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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