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의 고금유사
조선 후기에 중국 북경을 가려면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책문(柵門)을 통과해야 한다. 책문은 요즘으로 치자면, 공항의 출입국 관리소이다. 출입국 관리소를 통과하면 북경까지 약 한 달 남짓 걸린다. 북경 도착하기 직전, 그러니까 이틀 전쯤이면 고려보(高麗堡)란 곳에 닿는다. 북경을 다녀와 여행기를 남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곳 고려보에 대해 한 마디 하는 것이 상례다.
만주 일대는 원래 논농사가 없는 곳이다. 논을 만들 만한 습지가 있지만 밭농사만 지었던 것이다. 여러 설이 있지만 만주 일대는 가뭄이 심하여 논을 만드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단 한 곳 고려보만은 논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 잡혀온 조선 사람들이 논을 만드는 것을 묵인해 주었다는 것이다. 고려보의 논을 만드는 방식도 조선과 꼭 같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생산한 품질 좋은 쌀로 떡을 만들어 팔았는데, 그 이름도 ‘고려병(高麗餠)’이다.
고려보를 지나는 조선 사신단의 수행원들이 동포들이 파는 고려병을 사 먹으며 서로 호의 어린 대화를 나누었던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765년 북경에 갔던 홍대용에 의하면 수십 년 전만 해도 고려보 사람들은 조선 사신단을 보면 반색을 하면서 술과 밥을 대접하고 자신들이 ‘고려의 자손’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고국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때로는 떡 값을 받지도 않았고 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18세기 초까지는 그랬다는 것인데, 홍대용 자신의 시대에 오면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고 한다. 사신단의 역졸들이 술과 고기를 토색하고 간교한 방법으로 이런 저런 물건을 빼앗자, 고려보 사람들은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조선 사신단 일행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혹 고려의 후손이 있느냐 물으면 모두 화를 내며 “조상은 고려 사람이지만, 고려 후손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려보의 조선 사람과 조선 사신단은 과거 서로 베풀던 호의를 버리고 악감정을 키웠던 것으로 보인다. 박지원의 <열하일기>(1780)와 김경선의 <연행직지>(1833)를 보면, 18세기 말부터는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져 고려보 사람들은 아예 가게 문을 닫고 조선 사신단에게 물건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또 조선 사신단의 화를 돋우었고, 급기야 서로 원수와 다름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조선 사신단의 하인들은 고려보를 지날 때면 으레 “네놈들은 고려의 자손이다. 네놈들 할애비가 여기 오셨는데, 왜 나와서 절을 올리지 않는게냐?”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고, 고려보 사람들은 또 “여기에는 고려의 할아버지만 계시고 고려의 자손은 없다!”라고 받아쳤다는 것이다. 전쟁으로 동포가 나뉘어 살게 된 비극을 까맣게 잊고, 급기야 남보다 못한 원수가 되고 말았으니, 이런 한심한 일이 없다.
연행록을 읽다가 고려보의 조선 사람 이야기에 닿으니, 남북한의 험악한 관계가 절로 떠오른다. 새해다. 모쪼록 상대에 대한 증오와 곡해를 걷어내고 평화와 공존을 향해 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고려보의 조선 사람들과 조선 사신단처럼 서로 원수가 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끝으로 신동엽 시인의 시 한 구절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읽고 싶다.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베이징으로 가는 조선 연행 사신단의 모습. 1780년 6월부터 약 6개월간 청 건륭제 70회 생일 축하 연행사절단의 일원으로 선양, 베이징, 열하 등을 둘러본 연암 박지원은 그때의 체험을 토대로 1783년 <열하일기>를 탈고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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