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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지식의 확장과 섞임이 빚어낸 ‘과학 빅뱅’

등록 2017-12-28 20:04수정 2017-12-28 20:24

“모든 것 망라하는 통합지식 갈망”
진화론·에너지보존법칙이 촉발
분자생물학·진화심리학·행동경제학…
경계 넘나드는 융합 새 지평 열어
컨버전스-현대 과학사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지적 전환
피터 왓슨 지음, 이광일 옮김/책과함께·3만3000원

“우리가 과학의 역사를 통해 누차 배우는 것은, 지식의 확장으로 말미암아 과거에는 서로 무관했던 현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관 관계를 새롭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덴마크 핵물리학자 닐스 보어가 <국제 통일과학 백과사전> 첫째 권(1938)에 쓴 기고의 한 구절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선조들로부터 모든 것을 망라하는 통합적 지식에 대한 갈망을 물려받았다.”

짧게 잡아도 르네상스(14~16세기) 이후 몇백년간 서구가 주도해온 자연과학은 쪼개고 또 쪼개어 존재의 시원과 물질의 근본을 찾아온 과정이 한 축을 이뤘다. 다른 한 축은 관측과 사고실험에 기대어 광대무변한 천체의 탄생과 운동 원리를 규명하고자 했다. 학문 영역이 덩달아 세분되면서 장벽도 생겨났다. 그런데, 각기 다른 분야의 지식이 상당한 정도로 축적된 어느 순간 새 지평이 열렸다. 경계를 넘나드는 통합 연구가 낯설지 않게 된 것. 학제간 분화가 더는 의미가 없거나 오히려 시야를 좁힌다.

영국 저널리스트 출신의 지성사 저술가 피터 왓슨은 최신작 <컨버전스>에서 그런 현상의 배경과 과정, 미래 전망을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으로 짚어낸다. 왓슨은 <생각의 역사 1, 2>(2005~2009), <거대한 단절>(2012)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져 있다. 원제 ‘컨버전스’(convergence)는 ‘수렴’(한곳으로 모임), ‘융합’ 정도로 풀이된다. 앞서 미국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1998년에 쓴 <컨실리언스>(consilience)의 번역본을 최재천 교수가 2005년 <통섭-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제목으로 옮긴 바 있다.

‘수렴’이든 ‘통섭’이든, 좀체 만날 일이 없을 것 같던 분야들의 전문 지식이 서로 연결되고 조화를 이루며 단일성을 향하는 현상은 이미 대세다. “(오늘날) 과학은 철학, 윤리, 역사, 문화, 나아가 정치에까지 침투해 어떤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대해 학계 일부에선 ‘과학 환원주의’ 또는 ‘지적 제국주의’라는 비판도 나온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던 중세가 이젠 ‘철학은 과학의 시녀’ 시대로 바뀌는 게 아니냐는 우려일 테다(이때 ‘시녀’는 실은 ‘없어서는 안 될 보조자’라는 뜻에 가깝다).

그러나 지은이는 컨버전스야말로 “현대 과학사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지적 전환”이라고 확신한다. “과학들이 상호 수렴됨으로써 드러난 총체적 일관성과 질서가 새로운 역사의 단계로 우리를 안내하고 있”으며 “이는 본질적으로 우리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 출발점을 18세기 중반에서 찾는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과학사는 대개 고대 그리스의 ‘이오니아의 마법’(세계는 질서정연하며 몇몇 자연법칙들로 설명될 수 있다는 믿음-편집자 주)에서 시작하거나, 코페르니쿠스-케플러-갈릴레이-뉴턴으로 이어지는 천문학 분야의 주요한 관찰과 발견, 또는 1660년대 영국왕립학회와 파리 왕립아카데미 창설로 대표되는 ‘과학혁명’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과학들의 거대한 통합과 컨버전스는 그보다 한참 뒤인 1850년대에 시작한다. 에너지 보존(열역학 제1법칙)이라는 아이디어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에 관한 이론이 세상에 알려진 때가 바로 1850년대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세른) 강입자가속기의 일부 장치인 뮤온 관형코일의 모습.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지대에 있는 이 설비는 길이 27㎞, 지름 3m의 거대한 원형 터널 구조로, 원자핵이나 미립자를 거의 빛의 속도로 충돌시킬 때 생기는 물리 현상을 관찰하는 실험 장치다. 초미시 세계인 입자물리학 실험으로 천문학의 영역인 ‘빅뱅’을 소규모로 재현해, 찰나에 이뤄진 우주 탄생의 비밀을 직접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CERN 누리집 갈무리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세른) 강입자가속기의 일부 장치인 뮤온 관형코일의 모습. 프랑스와 스위스 국경지대에 있는 이 설비는 길이 27㎞, 지름 3m의 거대한 원형 터널 구조로, 원자핵이나 미립자를 거의 빛의 속도로 충돌시킬 때 생기는 물리 현상을 관찰하는 실험 장치다. 초미시 세계인 입자물리학 실험으로 천문학의 영역인 ‘빅뱅’을 소규모로 재현해, 찰나에 이뤄진 우주 탄생의 비밀을 직접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CERN 누리집 갈무리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은 초판이 나오자마자 당대 유럽의 세계관을 맨 밑바닥에서부터 뒤집어놨다.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 아니라 원숭이의 후예라니! 그러나 컨버전스의 관점에서 보면 진화론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 공간을 다루는 천문학, 아주 먼 과거를 다루는 지질학, 고생물학, 인류학, 지리학, 생물학이 융합된 결과”였다. 적응과 변이, 자연선택설을 뼈대로 한 다윈의 진화론에는 커다란 약점이 있었다. 유전형질이 환경과 무관하게 후손에게 전달되는 실질적 메커니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 그즈음인 1865년 오스트리아 수도사이자 식물학자 멘델은 완두콩 실험으로 알아낸 유전법칙 논문을 발표했다. 1900년에는 미국 생물학자 토머스 모건이 초파리 실험으로 유전자의 실체를 발견했다. 덕분에 진화론은 더욱 단단하고 풍성해졌다.

20세기 초 미국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앤드루 더글러스는 태양의 흑점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그는 11년 정도마다 태양의 흑점 활동이 최고조에 달하며, 그때마다 지구가 폭풍우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 시기에 식물과 나무는 평균을 웃도는 수분을 얻을 수 있었고, 나이테의 두께는 더 넓게 형성됐다는 것도 확인됐다. 이로써 천문학-기상학-식물학-고고학이 연계된 ‘나이테 연대학’이란 새로운 과학이 탄생했다. “나이테의 흐름을 보면 미국 남부에서 1276~1299년 사이에 혹독한 가뭄이 있었던 사실도 알 수 있는데, 이는 바로 그 시기에 푸에블로(오늘날 미국 콜로라도주의 도시)에서 인디언들의 대규모 이주가 일어난 이유를 설명해주는” 결정적 열쇠가 됐다.

이 밖에도 컨버전스의 성공 신화는 차고 넘친다. 오늘날 진화론은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나아가 예술·미학과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진화하고 있다. 초거대세계를 논하는 천문학은 초미시세계를 다루는 입자물리학과 손잡고 우주 진화 초기의 역사를 밝혀냈다. 물리학과 화학의 결합은 양자화학과 분자생물학으로 이어졌고, 심리학은 경제학과 만나 행동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틔웠다.

지은이는 “지난 150년 동안 다양한 학문 분과들은 서로 융합하고 통합되면서 독특한 거대 서사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우주의 역사”라고 말한다. 이즈음에서 이른바 ‘빅 히스토리’나 불교의 연기론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잘게 쪼개져 각각의 성을 쌓았던 과학이 이젠 서로 넘보고 섞이면서 17세기 과학혁명에 이어 다시 한 번 현대과학의 빅뱅을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번역본 기준 700쪽 분량의 책에는 다양한 최신 과학 분야에서 나온 깨알 지식과 에피소드가 담겼다. 그러나 지레 움츠러들 이유는 없다. “이 책은 거대한 모자이크와 같다. (…) 21세기 과학의 현 단계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수준에 와 있고 인문·사회과학 등 성격이 다른 분야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보여주자는 게 원서의 취지인 만큼, 디테일에 너무 신경 쓸 필요는 없겠다.”(옮긴이의 말)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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