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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젊은이들이여! 이 어두움을 와장창 뚫고 가자”

등록 2017-11-16 19:27수정 2017-11-16 19:57

평생을 길 위에서 광장에서
버림받은 자들 곁 지킨
백기완, 문정현 ‘두 어른’
이들이 말하는 싸워야 할 이유

두 어른
백기완, 문정현 지음/오마이북·1만5000원

집회가 열리거나 여기도 사람이 있다며 투쟁하는 자리엔 어김없이 백발의 사자머리와 은빛 수염을 휘날리며 지팡이를 짚은 두 사람이 나타난다. ‘백발의 투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여든네살, 일흔일곱살의 두 사람을 ‘어른’이라 부르면 두 가지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제도권에 기웃거리지 않고, 언제나 길 위에서, 광장에서 고통받는 이들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싸워온 이들을 기억하는 노동자, 강정마을 주민, 시민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반대로 ‘평생 시위나 해온 전문시위꾼이 무슨 어른이냐’ 반문할 사람이더라도, 많은 이가 이들을 ‘이 시대의 어른’이라 부른다면,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잠시 귀 기울여볼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두 어른>은 비정규직노동자 쉼터 ‘꿀잠’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자 두 사람이 나눈 대담의 알짬을 100편의 짧은 글에 담은 책이다. 시처럼, 아포리즘처럼 추려낸 두 사람의 육성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먼저 그들이 몸으로 겪어야 했던 고통에 눈길이 멎는다. “‘묏비나리’, 그건 감옥에서 내가 입으로 쓴 거야. 입으로 웅얼대면서 감옥 천장에 눈으로 새겨 넣은 시가 몇 구절 있지. 모진 고문으로 무릎이 축구공만큼 부었어.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갖은 닦달을 하는 바람에 목으로 코로 똥물이 미어지게 나왔어. (…)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벅 갈아라. 나는 죽지만 산 자여 따르라. 나는 죽지만 살아 있는 목숨이여 나가서 싸우라. 시는 나불대는 게 아니야. 사람 아닌 악질 살육과 싸우는 이들의 꿈을 빚는 거야. 그걸 비나리라고 하지.” ‘묏비나리’는 백 소장이 1979년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위장결혼식 사건 주모자로 붙잡혀 고문을 당하며 지은 시로, 훗날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가 된다.
지난해 6월 열린 ‘꿀잠’ 후원전시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왼쪽)이 자신의 시 <묏비나리>의 한 구절을 문정현 신부(오른쪽)가 새긴 목판을, 문 신부는 백 소장이 쓴 붓글씨 액자를 들고 있다. 백 소장은 “나는 문정현 신부님의 몸서리치는 아픔을 볼 적마다 문득 돌개바람 몰아치는 외로운 깃발을 떠올리곤 했다. 달려가 뜨거운 소주라도 한 모금 부어드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문 신부는 “백 선생님 말씀도 외로운 외침일 수밖에 없지. 그런데 외로운 외침이 있어야 해. 그래야 뭐든 생겨”라고 말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지난해 6월 열린 ‘꿀잠’ 후원전시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왼쪽)이 자신의 시 <묏비나리>의 한 구절을 문정현 신부(오른쪽)가 새긴 목판을, 문 신부는 백 소장이 쓴 붓글씨 액자를 들고 있다. 백 소장은 “나는 문정현 신부님의 몸서리치는 아픔을 볼 적마다 문득 돌개바람 몰아치는 외로운 깃발을 떠올리곤 했다. 달려가 뜨거운 소주라도 한 모금 부어드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문 신부는 “백 선생님 말씀도 외로운 외침일 수밖에 없지. 그런데 외로운 외침이 있어야 해. 그래야 뭐든 생겨”라고 말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문 신부는 제주 강정 해군기지가 자신의 ‘골고다 언덕’(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정엔 골고다 언덕이 있어. 해군기지 정문 앞을 그렇게 불러. 능멸의 언덕이지. 거기서 천 명이 연행되고, 560명이 사법처리 재판을 받았어. 58명이 징역을 살았고, 벌금만 4억원이 넘어.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능욕을 당한 곳이야.” 그는 2012년 4월 강정포구 방파제에서 해경과 실랑이를 하다가 7m 아래 시멘트 덩어리 테트라포드에 떨어졌다.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었지. 40일 만에 퇴원해서 깁스하고 허리 복대도 하고 있던 터에 수염을 잡고 내동댕이치는 바람에 빠진 그 수염. 볼 때마다 치욕스럽더라고. 진실을 추구하고 폭력을 폭로한다는 것은 치욕적일 수밖에 없어. 우리 사회 곳곳이 골고다 언덕이야.” 문 신부는 2011년 강정마을로 이사를 해, 기지가 다 지어진 뒤에도 싸우고 있다.

문 신부는 1975년 인혁당 사건 때 경찰의 시신 탈취에 맞서다 차에 다리를 깔려 5급 장애를 얻었고, 1976년에는 유신독재를 비판하다 투옥됐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만이 아니라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용산참사 진실규명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으로 수없이 길 위에 섰다. 문 신부의 말을 읽다 보면 ‘그가 자신을 이런 말로 타이르고 또 타일렀겠구나’ 싶은 느낌이 든다. 벽을 밀어도 밀리지 않고, 오랜 시간 길거리에서 내처 버텨야 했던 자신을. “어디든 가야 하는 거야. 용산참사도 길 위고, 명동성당도 길바닥이고, 대추리도… 나도 싫은 때가 있지. 지겨운 때가 있지. 왜 없겠어. 그럴 수가 없으니까. 강정에서 내가 떠나버리면 어떻게 되나. 떠날 수 없는… 그러니 청년들아, 와서 보시오. 여기 현장으로.”

백 소장은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농민운동·도시빈민운동, 한일협정 반대투쟁, 반유신, 반독재 투쟁을 연이어 해오며 고문을 당하고 감옥살이를 했다. 1987년엔 민중후보로 대선에 출마하기도 했다. 겨레의 이야기 속에 숨 쉬는 민중문화를 끄집어내고 우리말 살려쓰기에 힘을 기울여온 그답게, 잊힌 우리말에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는다. 그대로 살린 백 소장의 황해도 사투리와 욕설, ‘띠따 소리’(거짓 소리, 못된 소리)를 깨부수려 내지르는 ‘괏따 소리’에서 그의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밥네라는 말은 식구라는 뜻. 같이 살고 같이 밥을 먹는 사이라는 뜻이지. 이 땅 우리네 사람들은 빌뱅이가 와도 따슨 방으로 모셔 왔어. 이게 바로 이 땅 무지랭이들의 보편적인 사람됨이야. (…) 하지만 요즈음은 그 밥네를 아예 죽여버리고 있어. 있는 놈들은 있는 놈들끼리만 식구라고 하잖아. 따라서 인류 공동체의 인간적 뿌리를 죽이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철학, 사상, 예술, 도덕, 문화부터 이 밥네의 넋으로 회까닥 바뀌어야 하는 것이지.”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책을 닫을 때쯤 발견하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세계를 긍정하는 ‘노인’들이 아니라 부정하는 ‘청년’들이다. 그들은 여전히 자본주의 세상을 뒤엎는 혁명을 꿈꾸는 불온한 이들이고, 그래서 청년들이다. “독점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죽을 맛인 건 누구냐. 노동자 농민 서민들 아니야? 때문에 내 말은 그 사람들이 알기(주체)가 돼서 참짜 변혁운동을 해야 한다 그 말이다. (…) 자본주의 문명으론 전혀 안 된다, 도통 안 된다고 하는 아주 또렷한 깨우침에서부터 차름(출발)해야 한단 말이다. (…) 썩은 자본주의 문명을 갈라칠 아, 참생명 살티의 거센 몸부림이여! ‘아리아리 떵’이라는 불림에 따라 일어나시라.”(백기완) “힘으로라도 공평하게 나누는 세상을 만들어야 해. 지금 재벌이 쌓은 걸 조금만 풀어도 민중이 살아나. 비정규직도 해결되지. 아이들 밥 먹는 것도 그렇겠지. 더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더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는 저마다 먹을 만큼 거두어들이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어.”(문정현)

정신은 청년이나, 육신의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온다는 예감이 비집고 들어오는 걸 막을 순 없다. 하지만 이미 이들은 그 죽음까지 자신들의 너른 품으로 껴안는다. “몸뚱아리의 끝을 죽음이라고들 하는데 아니야. 진짜 죽음은 뜻을 저버렸을 때야. 뜻을 저버리면 죽되 싸그리 죽는 거야. (…) 우리 모두 한갓된 죽음은 뿌리치고 강요된 죽음과는 끝까지 맞서 싸우다가 죽어야 사는 깨우침으로, 우리 새 세상을 빚어내야 한다 그 말이다.”(백기완) “길 위의 신부라는 이름이 참 좋아. 내 남은 생에 힘을 주는 말이 아닌가 생각하고 살아. 백 선생님 보니 참 안타까운데 나도 육체적인 힘이 많이 빠져 있어. (…) 뭔 일을 어떻게 당할지 모르지만 하여간 현장에 있고 싶어. 처절한 노동 현장, 세월호 아이들이 있는 곳, 백남기 농민이 사경을 헤매는 곳 (…) 현장에 있다가 마감하는 삶. 바로 그 길 위에.”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2012년 3월8일 문정현 신부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 현장 앞에서 경찰의 폭력적인 물리력 행사에 옷을 벗고 항의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2012년 3월8일 문정현 신부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 현장 앞에서 경찰의 폭력적인 물리력 행사에 옷을 벗고 항의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극구 사양하다… ‘비정규직 쉼터’ 위해 나서

이 책은 지난해 6월 비정규직노동자와 해고노동자 쉼터 ‘꿀잠’을 짓기 위해 연 후원전시회 ‘두 어른’에서 연원한다. 문정현 신부가 목각으로 만든 새김판 80점을, 백기완 소장은 ‘한 달 동안 감옥살이를 하며 쓴 붓글씨’ 40점을 내놓았고, 모두 팔렸다. 전시회 홍보를 위해 두 사람이 대담을 나눴는데 내용이 좋아, 출판사에서 두 사람이 여러번 더 대화를 나누고 이를 책으로 엮어내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행동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두 사람은 사양했지만, 역시 책 수익금 전액을 꿀잠의 후원금으로 쓰겠다는 말에 결국 승낙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오마이북스에서 대담을 진행하고 정리해 책으로 냈다. 꿀잠 건립추진위원인 송경동 시인은 “우리 시대에 어른이 없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언제나 다른 이들을 위해 거리와 광장에서 살아온 두 분은 진짜 어른 길을 걸어오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제목을 정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대거리를 나눈 때는 2016년 여름부터 2017년 2월까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분노와 촛불집회의 열기가 그대로 묻어난다. “박근혜 독재란 무엇이가서? 침묵을 강요해놓고 그 침묵까지 삼키는 썩은 늪이야. 이 썩어 문드러진 늪을 깨뜨리려면 어떻게 해야겠냐구? 퐁당! 우리 다 함께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라도 되어야 하는 거 아니가서.”(백기완)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절을 살면서 변화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내가 믿는 하느님도 의심할 정도였지만 급기야 촛불바다가 몰려왔으니 올 게 온 게지. 큰 변화를 가져와야 할 텐데… 촛불혁명. 거짓은 절대 감출 수 없어. 드러나기 마련이지. 혁명은 그때 일어나는 거야. 반드시 올 거야.”(문정현)

꿀잠은 지난 8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문을 열었지만 운영비를 빼고도 현재 빚이 3억7000만원 남아 있는 상황이다. “나만 생각하고 내 일만 생각한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어? ‘꿀잠’ 같은 집을 통해 정규직, 비정규직이 한데 모여서 이 지긋지긋한 자본과 권력을 견제하거나 쓰러뜨리는 것밖에 다른 길은 없어.”(문정현) “먼 데서 온 노동자들이 마음 놓고 잘 수 있고 소주 한잔하며 뜻을 갈고 세울 데가 있어야 하잖아. 그러니까 꿀잠은 반문명에 맞선 새 문명을 빚는 바라지라.”(백기완). 후원 문의 (02)856-0611.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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