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길 위에서 광장에서
버림받은 자들 곁 지킨
백기완, 문정현 ‘두 어른’
이들이 말하는 싸워야 할 이유
버림받은 자들 곁 지킨
백기완, 문정현 ‘두 어른’
이들이 말하는 싸워야 할 이유
백기완, 문정현 지음/오마이북·1만5000원 집회가 열리거나 여기도 사람이 있다며 투쟁하는 자리엔 어김없이 백발의 사자머리와 은빛 수염을 휘날리며 지팡이를 짚은 두 사람이 나타난다. ‘백발의 투사’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길 위의 신부’ 문정현. 여든네살, 일흔일곱살의 두 사람을 ‘어른’이라 부르면 두 가지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제도권에 기웃거리지 않고, 언제나 길 위에서, 광장에서 고통받는 이들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싸워온 이들을 기억하는 노동자, 강정마을 주민, 시민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반대로 ‘평생 시위나 해온 전문시위꾼이 무슨 어른이냐’ 반문할 사람이더라도, 많은 이가 이들을 ‘이 시대의 어른’이라 부른다면,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잠시 귀 기울여볼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두 어른>은 비정규직노동자 쉼터 ‘꿀잠’을 만드는 데 힘을 보태고자 두 사람이 나눈 대담의 알짬을 100편의 짧은 글에 담은 책이다. 시처럼, 아포리즘처럼 추려낸 두 사람의 육성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먼저 그들이 몸으로 겪어야 했던 고통에 눈길이 멎는다. “‘묏비나리’, 그건 감옥에서 내가 입으로 쓴 거야. 입으로 웅얼대면서 감옥 천장에 눈으로 새겨 넣은 시가 몇 구절 있지. 모진 고문으로 무릎이 축구공만큼 부었어.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갖은 닦달을 하는 바람에 목으로 코로 똥물이 미어지게 나왔어. (…)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벅 갈아라. 나는 죽지만 산 자여 따르라. 나는 죽지만 살아 있는 목숨이여 나가서 싸우라. 시는 나불대는 게 아니야. 사람 아닌 악질 살육과 싸우는 이들의 꿈을 빚는 거야. 그걸 비나리라고 하지.” ‘묏비나리’는 백 소장이 1979년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위장결혼식 사건 주모자로 붙잡혀 고문을 당하며 지은 시로, 훗날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가 된다.
지난해 6월 열린 ‘꿀잠’ 후원전시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왼쪽)이 자신의 시 <묏비나리>의 한 구절을 문정현 신부(오른쪽)가 새긴 목판을, 문 신부는 백 소장이 쓴 붓글씨 액자를 들고 있다. 백 소장은 “나는 문정현 신부님의 몸서리치는 아픔을 볼 적마다 문득 돌개바람 몰아치는 외로운 깃발을 떠올리곤 했다. 달려가 뜨거운 소주라도 한 모금 부어드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문 신부는 “백 선생님 말씀도 외로운 외침일 수밖에 없지. 그런데 외로운 외침이 있어야 해. 그래야 뭐든 생겨”라고 말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2012년 3월8일 문정현 신부가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 현장 앞에서 경찰의 폭력적인 물리력 행사에 옷을 벗고 항의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극구 사양하다… ‘비정규직 쉼터’ 위해 나서
이 책은 지난해 6월 비정규직노동자와 해고노동자 쉼터 ‘꿀잠’을 짓기 위해 연 후원전시회 ‘두 어른’에서 연원한다. 문정현 신부가 목각으로 만든 새김판 80점을, 백기완 소장은 ‘한 달 동안 감옥살이를 하며 쓴 붓글씨’ 40점을 내놓았고, 모두 팔렸다. 전시회 홍보를 위해 두 사람이 대담을 나눴는데 내용이 좋아, 출판사에서 두 사람이 여러번 더 대화를 나누고 이를 책으로 엮어내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행동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두 사람은 사양했지만, 역시 책 수익금 전액을 꿀잠의 후원금으로 쓰겠다는 말에 결국 승낙했다고 한다. 오마이뉴스·오마이북스에서 대담을 진행하고 정리해 책으로 냈다. 꿀잠 건립추진위원인 송경동 시인은 “우리 시대에 어른이 없다는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언제나 다른 이들을 위해 거리와 광장에서 살아온 두 분은 진짜 어른 길을 걸어오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제목을 정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대거리를 나눈 때는 2016년 여름부터 2017년 2월까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분노와 촛불집회의 열기가 그대로 묻어난다. “박근혜 독재란 무엇이가서? 침묵을 강요해놓고 그 침묵까지 삼키는 썩은 늪이야. 이 썩어 문드러진 늪을 깨뜨리려면 어떻게 해야겠냐구? 퐁당! 우리 다 함께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라도 되어야 하는 거 아니가서.”(백기완)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절을 살면서 변화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내가 믿는 하느님도 의심할 정도였지만 급기야 촛불바다가 몰려왔으니 올 게 온 게지. 큰 변화를 가져와야 할 텐데… 촛불혁명. 거짓은 절대 감출 수 없어. 드러나기 마련이지. 혁명은 그때 일어나는 거야. 반드시 올 거야.”(문정현)
꿀잠은 지난 8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문을 열었지만 운영비를 빼고도 현재 빚이 3억7000만원 남아 있는 상황이다. “나만 생각하고 내 일만 생각한다면 무슨 희망이 있겠어? ‘꿀잠’ 같은 집을 통해 정규직, 비정규직이 한데 모여서 이 지긋지긋한 자본과 권력을 견제하거나 쓰러뜨리는 것밖에 다른 길은 없어.”(문정현) “먼 데서 온 노동자들이 마음 놓고 잘 수 있고 소주 한잔하며 뜻을 갈고 세울 데가 있어야 하잖아. 그러니까 꿀잠은 반문명에 맞선 새 문명을 빚는 바라지라.”(백기완). 후원 문의 (02)856-0611.
김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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